홍주의병장 김복한 주도, 호서지역파리장서 17명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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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장 김복한 주도, 호서지역파리장서 17명 서명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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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23>
▲ 홍성읍 대교공원에 세워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호서지역 파리장서운동, 홍주의병장 김복한의 주도로 이루어져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김복한의 권유로 서명 진술
4000년 역사의 민족 원한과 분함 조선인의 민족자존의식 역설
만국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의 파리로 장서를 보내도록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대표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유림의 이름은 민족 대표에 빠져 있었다. 김창숙을 비롯한 영남지역 유생들은 33인에 유림 대표가 빠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곽종석을 수반으로 하여 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이미 손병희 등이 선언문을 발표했으니 유림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을 인정케 하자고 했다고 한다. 파리장서운동은 호서지역에서도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1910년 국가가 망한 이후 죄인을 자처하면서 자청(自靖)의 생활을 하던 홍주의병장 김복한 (金福漢, 1860~1924)은 건강마저 악화돼 만세시위에는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복한은 고종의 시해 소식과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고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강화회의를 개최하고 있음을 전해 듣게 된다. 김복한은 과거 의병활동을 했던 동지들과 연명하여 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했던 것이다.
 

▲ 파리장서비 뒷면의 파리장서와 연서인 명단.

■파리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호소
홍주의병장 김복한은 장서를 작성한 후 ‘홍양기사(洪陽紀事)’의 저자 임한주(林翰周, 1871~1954)를 비롯하여 의병의 동지들을 찾아가 서명을 받았다. 김복한은 임한주를 찾아가 “광무황제가 죽음을 당하는 흉변을 만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무꾼이나 몸 파는 여자까지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는데 우리가 그냥 있을 수 없다”면서 “파리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호소하고 대한 유민(遺民)의 원통함을 호소하자”고 했다고 한다.

이에 임한주는 “저와 같은 자는 이미 우매하고 천하여 그 사이에 경중(輕重)을 가릴 바가 아닙니다. 오직 뜻대로 행하실 뿐입니다”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이에 적극 호응했다. 임한주는 자신의 일기인 ‘우양만록(雨暘慢錄)’ 1919년 3월 2일(음)자에 “유림(儒林)들이 한 명도 원통하고 분한 뜻을 표시하는 이가 없었다. 지산(志山)이 비록 앉은뱅이가 되어 두문불출하고 있지만 일찍이 임금을 시종(侍從)했던 신하였다. …… 나와 더불어 같은 뜻으로 한번 피를 흘릴(一瀉腔血) 생각이 있었다”고 유림들이 원통하고 분한 뜻으로 지산 김복한과 함께 죽을 각오로 장서의 일을 추진했다고 적고 있다. 임한주는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김복한의 권유로 서명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김복한은 3·1운동이 전개되던 3월(음 2월) 중에 장서운동을 시작하고 임한주를 만났음을 알 수 있다. 김복한은 이어서 청양의 안병찬과 김덕진, 홍주의 최중식(崔中軾)·전양진·이길성, 서산의 김상무·김봉제, 보령의 류호근과 신익선 등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서명자의 수에 대하여 ‘면우집(俛宇集)과 심산유고(心山遺稿),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등에 의하면 모두 137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중에서 호서본에 서명한 사람은 17명으로 보인다. 김창숙의 ‘벽옹회상기(躄翁回想記)’에 의하면 “지금 호서사람 경호 임석후가 기호유림의 영수인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이하 17명이 연명으로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편지를 가지고 상경했다”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호서본의 서명자가 17명임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호서본에 서명한 17명은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김복한(金福漢)·유호근(柳浩根)·안병찬(安炳瓚)·신익선(申稷善)·김상무(金商武)·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김지정(金智貞)·유준근(柳濬根)·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이길성(李吉性)·백관형(白觀亨)·이내수(李來修)·김덕진(金德鎭)·김병식(金炳軾)·김학진(金鶴鎭) 등 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복한의 제자인 홍일성(黃佾性)은 서명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비용 일체를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복한은 서명을 받은 후 제자인 황일성·이용규·전용학 등을 서울로 보내 임경호와 협의하여 만국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의 파리로 장서를 보내도록 했던 것이다.


■김복한, 파리로 보낸 글은 의심이 없다
홍주를 비롯한 호서지역 인사들도 6월 초부터 체포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19년 6월 초 홍주경찰서 순사부장 마스카와(松川)는 서부의 이호주재소 순사 대비 요시다(比良田)와 함께 김복한을 압송하려고 찾아왔던 것이다. 이호주재소 순사 요시다는 임한주를 홍주경찰서로 압송한 것이 6월 6일인 것으로 보아 이를 전후하여 순사부장이 요시다를 데리고 김복한을 찾아 갔던 것 같다. 김복한은 순사부장이 파리에 장서를 보낸 일에 대하여 묻자 사실대로 말했다고 전해진다. 압송하려 하자 병중이라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며칠 후 경찰서장 관정(寬井)이 와서 파리장서의 일을 다시 묻자 사실대로 대답했다. 서장이 날인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서장 역시 병중인 김복한을 차마 압송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후 김복한에 대하여는 궐석재판을 했다. 이 재판에서 김복한은 같이 재판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중형인 집행유예 없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7월 31일 형이 확정됐다.

일제는 김복한에 대한 궐석 판결을 한 후 결국 홍주경찰서로 압송했다. 8월 6일(음 윤7월 11일) 홍주경찰서의 경부 구강(具岡)이 순사 여러 명을 데리고 와서 김복한을 압송하려 했다. 김복한은 “내가 만약 문을 나서면 온갖 욕을 면치 못할 것이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라 했다. 구강이 계속 가기를 재촉하자 김복한은 “파리로 보낸 글은 내 소견으로 보아도 의심이 없는데 저들이 꼭 취역(就役)시키고자 하니 죽어야 할 때 구차하게 살 수가 없는데 하물며 훼형(毁形)할 염려가 있는데 말할 필요가 있으랴. 단지 스스로 자결하여 선왕과 옛 선현, 선조께 성의를 다할 뿐이다”라고 말하고는 따라 나서 홍주경찰서에 갇혔다. 그리고 이날부터 식음을 전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5일 후인 8월 11일(음 윤7월 16일) 김복한은 홍주경찰서에서 공주감옥서로 이감되었다. 이곳에서도 단식을 계속하였다. 김복한은 옥장이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자 그때부터 쌀뜨물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후 김복한은 12월 12일 풀려날 때까지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김복한은 교회사(敎誨士) 후루사와 케이 마코토(古澤慧誠)가 “파리에 왜 글을 보냈는가?”라는 질문에 “국권(國權)을 회복(恢復)하기 위해서이다(‘欲復國權也’)”라고 국권회복(國權回復)에 목적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김복한이 감옥에 있을 때 위로의 편지들이 왔는데, 성리설의 차이로 소원했던 전우(田愚)도 글을 보내 다음과 같이 김복한의 의리와 충심을 기렸다고 한다. “멀리 생각하니 육순에 병든 늙은이가 외롭게 판자 집에 누워서 숟가락질도 못하고 몸을 덮지도 못하며 외로운 뜨거운 마음이 오직 본분으로 일을 행하는구나. 내가 육태상(陸太常)의 옥중시를 외어 생각을 돕고자 한다. 일신을 일찍이 나라에 허락했으니 아홉 번 죽더라도 그 은혜 어찌 잊으리까. 빈 뜰에서 밝은 달 바라보니 옛날의 도가 천지를 비추는구나.”

홍주의 서부면 판교리(板橋里)에 거주하고 있던 임한주도 6월 6일 홍주경찰서에 압송됐다. 6월 6일(음 5월 10일) 아침 일찍 일본인 순사 오시다(比良田)가 임한주의 판교리 집에 조사할 일이 있다고 와서 그를 홍주경찰서로 연행해 갔다는 것이다. 이미 홍주경찰서에는 최중식과 전양진이 며칠 전에 연행돼 와 있었다고 한다. 임한주 일행은 13일(음 5월 17일) 청양의 청무(靑武)헌병주재소로 이송됐다. 이날 청양출신의 김덕진과 안병찬이 구속됐다. 임한주는 이들과 함께 6월 14일 공주경찰서에 이송됐으며, 15일 검사의 심문을 받았다. 검사가 김복한의 권유에 의해서 했는지, 자의로 했는지를 묻자, 임한주는 “김복한은 하기 싫은 것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사람의 강요에 의해 내 뜻이 아닌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해 자신의 뜻에 따라 서명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서 검사가 ‘오늘날 정치가 어떠한데 인심은 이와 같은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임한주는 “우리 조선이 단군 이래 4000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민심이 원한과 분함이 있는 것은 나라가 망한 때문이지 정치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조선인의 민족자존의식을 역설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김경수 청운대 교수는 “호서지역에서의 파리장서운동은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며 “김복한은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에 유림들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고, 비록 서양과 손을 잡은 것이 괴롭고 슬픈 일이지만, 파리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했던 것이다. 김복한은 장서를 작성한 후, 임한주와 안병찬, 유호근, 김덕진 등 과거 의병의 동지들과 인근의 뜻있는 유학자들의 서명을 받았고, 이를 황일성, 이영규, 전용학 등 제자들을 서울로 보내 임경호를 통해 파리에 발송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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