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이광명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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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이광명 고택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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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12>
▲ 보령시 주산면 삼곡마을의 영친왕의 딸과 혼담이 오가자 거금을 내려 짓게한 99칸의 저택.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영친왕의 딸과 혼담
영친왕 3000환 거금 내려 가옥지어 왕가의 품격 세우려 한 곳
조선시대 말 왕가의 품위에 걸맞게 99칸으로 3년 지은 대저택
신경섭 고택, 조선 후기의 양반가옥 100여년 토종은행나무 울창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삼곡마을에는 쇠퇴해 가던 조선 왕조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이광명 고택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광명 고택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의 다섯째 아들 영친왕의 딸과 혼담이 오가자 왕가에서 거금을 내려 보내 집을 짓게 함으로써 왕가의 품격을 세우려 했던 곳이다. 이 고택은 모양 자체가 정사각형에 가까워 빈틈이 없는 입구 자로 돼 있다. 왕실과 혼담이 오가면서 품위에 맞게 99칸으로 지어진 대저택이다. 외양부터 대단히 화려한 고택. 사각의 건물은 빙 둘러 복도가 나 있고 그 옆으로 여러 개의 방들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다.

조선말 건축술의 백미를 엿볼 수 있는 이 고택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영친왕의 딸이 이 집의 어른과 혼담이 오가자 왕가에서 당시 3000환(현재의 시가로 30억 원)이라는 거금을 내려 가옥을 짓게 함으로써 왕가의 품격을 세우려 한 곳이다. 왕가의 딸이 시골의 허름한 집에서 고생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음해로 결국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영친왕이 보내온 돈으로 1940년대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집을 완성했다고 전한다. 캐나다산 홍송을 들여와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만도 무려 3년여,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탓인지 고택에서 일본풍의 양식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집이 워낙 크고 견고하다 보니 6‧25한국전쟁 때에는 인민군들이 고택을 본부로 사용한 역사가 말해주듯 아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붕과 시설들이 망가졌지만 이후 1967년에 지금과 같이 보수해 살림집으로 이용하고 있다. 거기다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내려앉아 마지막 조선의 왕조처럼 군데군데 상흔을 끌어안은 채 지쳐있는 모양새지만 그 기품만은 빼어나다. 독특한 점은 대부분의 내로라하는 대 저택은 마을의 안쪽이나 높은 언덕에 위치하기 마련인데, 이광명 고택만은 마을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해있다. 낮은 자리에서도 그 외형만큼은 여타의 양반가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단정하다. 조선왕조의 상흔이 서려있는 곳이지만, 왕조의 기품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고택이다.
 

▲ 이광명 고택 대문.

■조선시대 건축기술의 백미, 99칸 저택
이광명 고택은 한옥의 모양새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口’자로 돼 있어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저택이다. 조선시대 말 왕가의 품위에 걸맞게 99칸으로 지은 대저택이며 사각의 건물을 빙 둘러 복도가 나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복도 옆으로는 수십 개의 방이 들어서 있다. 집 뒷켠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앞으로는 우물과 재래식 화장실을 뒀다. 이 고택의 예술적인 정성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집안 내부의 모습에서도 화려하고 웅장함이 돋보인다. 사시사철 푸르고 곧게 뻗어 있는 덕에 올곧은 충절을 보여준다 하여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대나무들은, 일제의 위협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은 채 고택 뒤에서 70여년 의 세월을 넘기도록 충절을 지키고 서 있다. 대나무 숲을 거닐며 조선의 마지막 왕족과 애국지사들의 생애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건물 내부는 문간채 한 면만을 제외한 세 면이 하나의 복도를 따라 길게 연결돼 있다. 이 복도를 따라 안방과 건넌방, 손님들에게 내주는 행랑채가 방향을 달리하며 줄지어 들어서 있다.

중간 중간에는 대청마루가 큼지막하게 마련되어 있어 큰 방들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방 안은 옛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느낌그대로다. 비록 낡아 보이지만 조선의 역사가 깃들어 있어 대들보에 내려앉은 먼지조차도 고택과 자연스레 어울려 고풍스런 느낌을 자아낸다. 방문은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이 함께 만들어진 이중문으로 하여 보온이 잘 되도록 하였다. 왕가와 혼담이 오갈만큼의 집안이었던 만큼 이 집을 들른 옛 조선의 인사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나라를 논하고 백성을 이야기했을 법하다. 
 

▲ 신경섭 고택의 안채 전경.


대청마루에는 유리로 만든 출입문이 있어 대청도 실내가 됐다. 그래서인지 고택이 유리 속에 갇힌 문화재마냥 멀게만 느껴진다. 원래의 자리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져 제 용도를 관람객들의 시선 끌기에 한정한 지난 시대의 유물들처럼 이 고택도 지난 역사를 품에 안은 채 시대의 빠른 물결에 휩쓸려 가며 위태위태한 생을 이어가는 듯하다. 하지만 옛 역사와 생활양식을 낡은 문서나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닌 오감으로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하다. 뒤뜰에는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불룩한 배를 불리고 있다. 축대를 쌓은 나지막한 야산은 한옥과 함께 그림이다. 특히 이 고택은 대나무 숲과 논 사이에 있어 고택에서는 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가을이면 고택 앞에서 무르익은 황금빛 논이 쇠락한 왕가의 자존심을 세워주려는 듯 풍성한 느낌을 준다. 또 담벼락과 나란히 한 노란 은행나무는 빼어난 외관의 고택에 운치를 더한다. 그래서 이 고택을 만추에 닿는 고택이라 부르는가보다. 겨울에는 여느 시골 마을 집과 다름없는 모습이리라.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논에서 조선 왕조의 흔적이 담긴 고택의 너른 마당과 논바닥에서 한바탕 눈싸움을 하는 것으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 듯하다. 주변에는 시비와 함께 산책을 할 수 있는 ‘시와 숲길’ 공원이 조성돼 있어 사색하기에도 제격이다.

이광명 고택은 오래된 은행나무가 담벼락 옆에 자리하고 있어 노랗게 물이 드는 가을이면 운치를 더해 주는 곳에 있다. 고택의 주변으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고 바로 옆에 논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있는 고택이다. 이 고택은 위치부터가 독특하다. 대부분의 고택들은 마을에서도 중앙이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광명 고택은 마을 아래쪽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택의 모양 자체도 정사각형에 가깝고 외양은 무척이나 화려하다. 사각의 건물은 빙둘러서 복도가 나 있고 그 옆으로 수십 개의 방들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다. 단일 건물로서는 면적이나 규모면에서 참으로 대단해 보이는 이광명 고택의 내력처럼 화려하다.
 

▲ 신경섭 고택 주변은 은행나무마을로 유명하다.

■천년나무가 지키는 200년 신경섭 고택
신경섭 고택 혹은 신경섭 가옥(문화재자료 제 291호)이라고 불리 우는 이 고택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밭길 62번지에 있다. 보령시 청라면 오서산길 일대 은행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고택이다. 이 고택이 운치를 더하는 것은 은행나무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고택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의 형태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신경섭 고택은 조선 후기의 양반가옥으로 ‘ㄱ자형’의 사랑채와 ‘ㅡ자형’의 안채가 어우러진 ‘ㄷ자형’ 구조의 팔작지붕의 전통가옥이다. 안채에는 안방·대청·건넌방·고방·부엌을 두었고, 사랑채에는 사랑방 옆에 높은 누마루를 들여 정원을 바라보는 운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사계묘(崇禎紀元後四癸卯)’라 쓰여져 있어 1843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가옥의 대문에는 신석붕의 효자문 정려(1868년)의 붉은 색의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특이한 것은 담에는 돌과 기와로 멋을 냈는데 이는 안채의 담도 마찬가지다. 신경섭 고택의 담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으로 돼 있으며 일부는 보수한 흔적도 보인다. 안채 앞마당에는 돌로 쌓은 우물이 있는데, 쌓은 돌이 깨끗한 것으로 봐서 보수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대문을 들어서 왼편으로 곳간이 있다. 다섯 개의 출입문이 있는 곳간을 들어서는 곳에도 모두 디딤돌이 있다. 고택 입구에는 수령이 천년이 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다. 표지석에는 수령이 300년이라고 적었는데, 왜 보령시에서는 ‘천년나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고택 주변으로는 100여년 이상 된 아름드리 토종은행나무들이 세월을 이기고 위풍당당한 기세를 보이며 서있다. 3000여 그루의 토종은행나무가 울창해서 매년 가을에는 은행나무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곳 청라마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특히 가옥 앞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여년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뻗어 나온 은행나무 가지들이 돌담 너머의 은행나무와 손길을 맞추며 고요한 황금빛터널을 만들어 내는 형국이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100여 톤 가량의 은행을 수확한다고 하는데 이는 전국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양이라고 전한다. 신경섭 고택은 조선 후기의 가옥 형태가 오롯이 남은 고택으로,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전통가옥의 멋은 집 주위에 펼쳐져 있는 황금빛 물결의 논과 오서산의 은빛 억새와 은행마을의 노란 단풍에서 무르익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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