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기호학파 근거지였던 논산, 사계 김장생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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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기호학파 근거지였던 논산, 사계 김장생 고택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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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14>
▲ 논산 사계 김장생 고택의 대문과 안채가 보인다.

저술과 제자 양성을 했던 예학(禮學)의 종장(宗丈) 사계(沙溪) 고택
김장생 고택 규모가 수십 칸에 이르나 평대문 사용 겸손함 나타내
율곡 이이 제자 김장생 조선 예학정비, 예송논쟁 사상적 기반 다져
논산지방 조선 중기 안동지방 영남학파에 맞선 기호학파의 중심지

충남 논산시 두마면 두계리 96번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고택이 위치한 곳이다. 삼한시대에는 천태산, 백제시대에는 계람산, 고려 때는 구룡산이라 불리었던 계룡산은 백두산, 태백산과 더불어 영산으로 여겨 종교 활동이 전개됐던 곳이기도 하다. 남쪽에는 1393년 조선 태조인 이성계가 신도읍지로 정해 대궐 공사를 벌렸던 곳이 신도안이다. 신도안은 명당일까? 역사의 추측으로 남는다. 대궐 공사에 쓰이던 주춧돌이 남아있는 신도안은 1984년에 3군 본부가 입주함에 따라 계룡(鷄龍)시로 발족했다. 계(鷄)는 새벽을 알리는 닭이며, 용(龍)은 변화무쌍한 상상의 동물로 계룡시의 상징이 되어 시민 중심의 전원, 문화, 국방, 모범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대궐 공사를 시작할 때 지역이 바깥쪽에 있다하여 ‘바깥거리’로 불리었던 두계리는 이곳에 밭이 많고 녹두, 팥 등이 잘되어 팥거리(豆村)로 불리었다. 혹은 대궐공사 때 부역(負役)하는 인부들에게 팥죽을 팔았다하여 팥죽거리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팥거리인 두계리에 ‘사계고택(沙溪古宅)’과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재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계 김장생 고택 평대문 사용 겸손함 나타내
지난 2013년 11월에 충남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된 사계고택(沙溪古宅)은 사계(沙溪)가 55세 되던 1602년에 건립했으며, 사계와 정부인인 순천 김씨가 거주하던 곳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해 이곳에 낙향하여 남은여생을 우암 송시열, 송준길 등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낸 곳으로 조선 중기(1602)에 건립된 고택이다. 조그만 행세나 했다면 하늘이 낮다하고 높게 올린 솟을대문을 한 고택이 부지기수건만, 한 성씨(性氏)가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한 사람 배출도 어려운, 삼정승 육판서 전부를 배출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여겼다는 문형(文衡, 대제학)을 무려 7명이나 최다 배출한, 조선조 일등명문 광산(光山)김씨 사계가(沙溪家)의 대문은 소박한 평대문이다. 양반집은 대개 집안의 권위를 높게 하려고 솟을 대문을 짓는데 사계 김장생의 고택은 규모가 수십 칸에 이르나 평대문을 사용하여 겸손함을 나타내고 있다.

사계고택은 사랑채인 은농재(隱農齋)만 원형이 보존되고 다른 건물들은 중간에 개·보수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랑채도 본래는 초가였다가 후에 기와를 얹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고택은 사계가 만년에 머물면서 저술과 제자양성을 했던 곳이다. 그래서 ‘은농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고택의 이름을 ‘사계고택’이라 함이 오히려 적절할 것이다. 이 고택은 사계의 8째 아들인 두계(豆溪)공 김규(1606~1677)의 자손이 장자(長子)물림으로 대대로 살아온 집이며, 현재 사계 의 16대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은농(隱農)’은 사계의 7세(世)손의 호(號)이며,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대문 왼쪽의 광채는 사계의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계의 영정 아래에는 그를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泰斗)로서 자리매김을 하게한, 그의 저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비롯해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의례문해(儀禮問解)’와 또한 ‘전례문답(典禮問答)’등의 책이 놓여 있다.

▲ 사계 고택 은농재 전경.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정통을 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은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이 중심을 이룬다. 사계(沙溪)가 생존했던 당시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이괄(李适)의 난(亂, 1624) 등의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정치&#65381;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이 극심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사계(沙溪)는 이욕(利慾)추구로 치닫는 가치관의 동요와 국가 사회의 질서와 기강의 해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예학(禮學)에 관심을 기울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비롯해 ‘가례집람(家禮輯覽)’이나 ‘의례문해(儀禮問解)’ 또는 ‘전례문답(典禮問答)’ 등의 저술도 사계(沙溪)의 이러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와 고금(古今)의 의례(儀禮)를 참고하여 정밀한 분석과 고증을 통해 예(禮)의 본질을 규명하고, 당시 상황의 시속(時俗)을 참고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실용적이고 주체적인 예(禮)를 모색하여 올바른 규범과 정통성의 확립으로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안마당 다른 반가에 비해 크게 만든 것 특징
논산시 두마면 남쪽에 위치한 천호봉 자락에 북으로 길게 흐르다가 이 마을에 이르러 끝자락을 맺으면서 대전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 바로 두계마을이다. 천호봉 끝자락이 마을 뒤에서 약간 솟아 이름 없는 봉을 형성하는 것이 은농재의 배산이 된다. 좌우로 구릉이 감싸고 있으며 전면에는 농경지가 형성돼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집을 배치하다보니 동북향을 하게 됐다. 마을의 북쪽에는 넓은 들이 있고, 들 가운데로 두계천이 동으로 흐르며, 두계천을 따라 호남선이 지나가고 있다. 사계 고택의 배치구성은 정면 11칸의 대문채를 두고, 뒤에 사랑마당을 두었으며, 사랑마당 가운데에 은농재를 중심으로 사면에 건물을 배치했다. 은농재 뒤에는 ‘ㄷ자’형 평면의 안사랑채와 ‘ㄱ자’형 평면의 안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 ‘ㅁ자’형 집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안채의 서쪽 후면에는 사당이 앉아있다. 이 고택은 곤좌간향인 동북향을 하고 있다. 지형조건으로 볼 때 배치계획을 하려면 좌향은 동남에서 동북향까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향을 곤좌간향으로 한 것은 풍수적 측면을 고려한 것이라 생각된다. 안채의 공간에는 또 하나의 안사랑을 만들어, 안마당을 다른 반가에 비해 크게 만든 것도 이 고택의 특징이다.

은농재는 사계의 8대손인 두계공의 장자로부터 16대손까지 세거해온 곳이다. 현재 은농재를 비롯하여 안사랑채, 안채, 문간채, 광채, 부속채 등이 하나의 커다란 건축 군을 형성하면서 나지막한 구릉을 배경으로 배치돼 있다. 은농재의 서쪽 뒤로는 후에 지은 별채가 있고 그 앞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다. 은농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좌측은 1칸)으로 평면을 구성하였는데, 중앙 2칸 통칸에 앞으로 툇마루가 달린 대청을 드리고 그 좌·우측에 1칸씩의 온돌방을 대칭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은농재는 연산에서 낳은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으나 1995년 해체 복원할 때 모든 부재를 새로운 부재로 바꾸었다. 사계 김장생의 영당 자리에는 숭정 4년(1631년)에 사계가 돌아가자 출상하기 전 이곳에 시신을 모셨던 곳이다. 영당의 유래는 돌아가시면 출상하기 전에 시신을 모시는 곳으로, 왕은 150일 후에 사대부양반은 90일 후에 출상하는 제도였다.

▲ 사계 고택 전경.



■종가의 면면 청백리 선비의 기품과 어울려
사계 김장생의 종택은 조선 중기 기호학파의 근거지였던 논산에 자리 잡고 있다. 율곡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조선 예학을 정비, 훗날 ‘예송논쟁’의 사상적 기반을 다진 선비다. 소박하되 예학의 뜻만은 오롯이 새겨놓은 종가의 면면이 청백리 선비의 기품과 썩 잘 어울린다. 성씨따지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씨 중에 광산김씨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광김’이라고 줄여 부를 정도로 성씨에 자부심이 높다. 이들 ‘광김’ 자부심의 중심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있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선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대표적 학자다.

13세 때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20세 때부터 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78년 6품직에 오르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해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철원(鐵原)부사, 공조참의(工曹參議), 형조참판 등을 지내고 낙향했다. 김장생의 종가는 충남 논산에 있다. 논산지방은 조선 중기부터 경북 안동지방의 영남학파에 맞선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다. 논산 연산면의 고정산 자락에 자리한 종택은 김장생과 그의 뜻을 받들어 예학을 집대성한 아들 김집(金集·1574∼1656)을 배출한 집인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김장생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느라 주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서인(西人)이던 탓도 있겠으나, 그가 청백리(淸白吏)에 오를 만큼 청빈하게 살았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효자문과 사당 주변의 묘역, 그리고 종가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염수재(念修齋)’만이 예학의 종주 김장생 종가임을 짐작케 한다. 효자문을 들어서면 먼저 열십자로 난 돌길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제사 때 제관들이 다니는 길을 표시한 것으로, 첫눈에도 이 고택은 예학(禮學)의 본거지임을 느끼게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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