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천주교 신자들, 옹기 구우며 복음 전파했다
상태바
홍주천주교 신자들, 옹기 구우며 복음 전파했다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7.07.20 10: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해 피해로 숨은 천주교도 옹기 구워 생계 이으며 복음전파

인산리공소, 1980년대 석산마을에서 봉서리 산 139-1로 옮겨

금마는 본래 홍주군 평면이었고 일제가 강제로 개명해 바꿔
금마면 인산리 석산마을의 4년제 평면보통학교가 있던 옛터가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 사진 우측 동그라미는 인산리공소가 있었던 옛터다.

홍주지역에 천주교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초기 순교자들인 홍주 응정리(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 출신의 원시장(베드로)과 사촌 원시보(야고보), 홍주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황일광(黃日光, 시몬) 등의 순교 행적에서 볼 때, 홍주지역도 이미 1780~1790년대에 예산·당진·보령·면천·덕산·청양지역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한 신자들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홍주지역에 공소가 있었던 시기는 1900년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금마 인산리공소는 홍주지역에 현존했던 공소 중에서 가장 오래됐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인산리 공소의 신자들도 옹기를 구워 생계를 이으며 복음을 전파했던 것으로 파악되면서 홍주지역 천주교사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석산마을에 옹기터가 있던 자리.

■조선후기 옹기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다
한국의 천주교(물론 유교, 민간신앙을 포함해)와 옹기와의 관계는 매우 특별한 사연이 있다. 옹기는 신유사옥(1801년) 이후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구워서 내다팔아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생업의 수단이었다. 조선후기 옹기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옹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활도구이자 생계의 수단이었다. 그 배경은 이렇다. 17세기 초 한역 서학서(西學書·성경)라 불리는 교리서가 중국에서 전래된 이후 조선에도 천주교가 민간 신앙운동으로 전파됐다.

사대부보다 중인, 양인, 천인의 비중이 높았던 당시 유교적 신분질서 아래서 천주교의 신앙운동은 당시 민중의 사회적 저항의식과 개혁의 물결을 타고 전국에 확산된다. 체제 유지에 위협을 느낀 조선의 집권세력(벽파)은 천주교를 내세워 정적을 제거하는 신유사옥(1801년)을 일으켜 대학살을 감행한다. 신유사옥은 1800년 11월 정조의 장례식을 마친 이듬해 초 정순대비가 어린 순조를 대신, 천주교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은 역적으로 몰아 코를 베어 죽여야 한다는 법령인 ‘척사윤음’을 반포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때부터 천주교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면서 신자들과 그 가족·친척들은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어 옹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김보현) 역시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이후 그의 부친(김영석)도 옹기장수로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고, 부친 별세 이후에는 그의 어머니가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행상을 다니며 자식들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1866년의 병인박해 등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 전국의 천주교 교우촌이 파괴되고, 신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숨어 살아야만 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천주교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됐고, 이때부터 각지로 피난 갔던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홍주지역의 천주교 신자들도 박해의 피해를 당했고, 홍주의 변두리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천주교신자들은 가능하면 산속 깊숙히 숨어들어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신자들은 차츰 산 아래로 내려와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금마면 인산리의 인산리공소가 있던 퇴메산 줄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인근의 산 계곡에서는 아직도 많은 옹기 조각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퇴메산 기슭 중턱에도 처음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모여 살았다는 인산리 석산마을이 있다. 당시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던 사람들은 마을을 일구며 살았고 풍구, 베틀, 삼태기, 쇠스랑, 북, 인두 등과 옹기를 굽고 산을 일구고 베를 짜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으레이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옹기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천주교 박해시대 신자들에겐 옹기공방과 옹기점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생업수단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옹기가 이처럼 천주교 신자들의 생업에 주요 도구로 등장한 배경에는 점토, 시술, 땔감 외에는 시설, 자본이 소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옹기점을 운영할 경우 군역, 잡역을 면제받는 제역촌(除役村)을 받는 특혜도 있었는데다 옹기가마는 박해가 심한 시기에는 집회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정신도 비교적 천한 노동이었던 옹기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해 천주교 신자들에겐 자연스럽게 옹기업이 성행하게 된다. 신앙심을 기반으로 한 장인정신은 옹기업에 고스란히 계승됐다. 신앙 공동체 일원은 공동노동, 공동이익, 노동분배 원칙을 지켰고, 노동을 신성시해 주말 휴업, 매일 오수, 봄·여름·가을 3계절 작업 등을 지키며 옹기의 명맥을 이었다. 옛날 옹기에 종, 비둘기, 하트, 십자가, 물고기 등의 문양이 들어가 있는 것도 바로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항아리 하단부에 예수를 찬미하는 글귀를 문자로 새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금마면 인산리 석산마을의 옹기점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해진다.

 

1980년대 봉서리 139-1로 새로 옮겨 지은 인산리공소. 지금은 개인이 살고 있다.

■옛 인산리공소·옹기 터·보통학교 있던 곳
금마면 인산리 석산마을은 점촌과 갯들, 석산을 통틀어 부르고 있다. 석산마을과 함께 인산리 인흥마을의 경계는 점촌마을이며, 점촌마을 옆의 너른 들판을 갯들 이라고 한다. 갯들 옆에 위치한 곳을 석산마을이라 부르며 갯들이 단연 석산마을의 중심마을인 셈이다. 지금의 인산리는 점촌, 갯들, 석산마을의 3개 반으로 구성돼 마을을 이루고 있다.

점촌은 옛날에 옹기를 굽던 그릇점이 있었다고 해 점촌이라 불리는데 옛날에는 방죽골이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갯들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바닥에 들과 마을이 자리했다고 해서 불리웠으며, 석산이란 마을의 뒤에 돌산이 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마을의 형상이 호랑이 형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호랑이골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석산마을은 인산 2리로 백제시대에는 금주군, 신라시대에는 임성군, 고려시대에는 홍주,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 조선말엽에는 홍주군 평면이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흥리, 석산리, 양지리, 강월리, 용당리 각 일부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인흥과 석산의 이름을 따 인산리라 해 홍성군 금마면에 편입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 불리고 있는 석산이란 한자 지명은 1960년대부터 불리고 있다고 한다.

석산마을에서 서너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인산리 옛 옹기마을 터와 인산리공소 옛터가 있었으며, 4년제 보통학교 본교가 있었다는 점이다. 석산마을의 옹기 터는 인산리공소 옛 터의 동남쪽에 크게 세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인산리공소는 1980년대 본래의 석산마을에서 봉서리 산 139-1번지에 새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개인소유로, 일반인이 매입해 리모델링을 거친 후 살림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무슨 사연인지 여주인은 기자의 공소 사진촬영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