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종죽 숲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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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종죽 숲속에서
  • 이원기 칼럼위원
  • 승인 2017.11.2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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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면서 기도하는 마음이 되어보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과 수업의 일환으로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어서 였을까?

그 일요일의 날씨처럼 깨끗하고 유쾌한 마음 속에 ‘기도’라는 단어가 자리했던 불가사의는 결국 그날 오후에서야 해명이 되었다. 아침 9시에 출발한 우리의 행선지는 전북 고창. 그날 따라 서해안 고속도로 어딘가에서 신하대 무리들이 창밖으로 휙 휙 지나갔다. 차를 모는 학생을 즐겁게 해주려다 보니, 이런 저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신하대가 있으니 신하의 상대 개념인 왕의 대나무 즉, 왕대도 있고 더운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맹종죽이라는 것도 있다. 일명 죽순죽 또는 일본죽이라 불리는 맹종죽은 나도 이름만 들었지 본 적은 없다.”

초겨울 상쾌한 공기를 머리에 인 선운사 입구 드넓은 주차장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이삼년 전에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군데군데 코끼리처럼 웅크리고 있는 느티나무며 활엽수 거목들이 보여주는 위풍당당함과 이에 뒤질세라 넘치는 패기로 하늘을 향해 팔을 쭉 쭉 뻗고 서 있는 전나무의 기상도 여전했고, 두툼한 허리마냥 넉넉한 마음씨에 편안한 웃음이 얹어진 아주머니들의 호객 행위도 여전히 정겨웠다.

그러나 샛노랗고 푹신해 보였던 자연산 양탄자는 어디로 갔으며, 노란 은행잎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은행을 줍던 할머니는 어디에 계신가? 그때의 정경을 떠올리며 가지만 앙상해진 은행나무들을 올려보는 순간 허공에선듯 한 소리가 들려온다.

“만사 사 때가 있는 벱이거든!”
아! 자연은 또 이렇게 조용히 인간들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고창까지 와서 풍천장어를 안 먹어 본다는 게 말이 돼?”

고참 학생의 그 한 마디에 어느 장어구이 식당으로 들어선 우리는 누군가가 거금 2만 원이나 주고 산 복분자 원액을 소주에 타서 즉석 복분자주를 만들어 두세 잔 마셨던 것 같다.

다음으로 찾아간 고인돌 유적지에선 또 다른 해프닝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사시대 조상님네 혼령들이 초겨울 오후 햇살을 즐기러 나와 앉았을 자리에 웬 국화꽃들인가? 길 한쪽으로는 줄줄이 쳐놓은 장막 속에서 갖가지 길거리 음식들이 냄새 풍기기 경연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 고창은 ‘국화 옆에서’를 노래한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다. 그래서 군에서는 ‘국화꽃 축제’를 여는 모양이었다. 어린이 팔뚝만한 꽈배기며 국화빵 따위를 먹으며 도착한 우리들 앞에는 초가집 두 채가 고즈넉하다 못해 소박맞은 여인네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었다.

내 마음은 못내 우울해졌다. 그의 걸작시 ‘동천(冬天)’과 ‘국화 옆에서’가 씌어 있는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본 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니 뒤로는 적당한 크기의 산이요, 저 멀리로는 언제 들어왔는지 서해바다가 조용히 드러누워 있었고 그 사이에 논과 밭이 제법 넓게 자리하고 있어 이렇게 어우러진 자연이 내방객들의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 했다. 이제 우리는 판소리를 중흥시킨 동리 신재효 선생의 자취를 찾아 나설 참이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명창들.

선친께서 누차 말씀하셨던 이화중선, 임방울 명창 얘기며, 실력은 당대 제일이었으나 불행한 가정사로 자살했던 안향년! 사진으로나마 그들을 만난 것은 나로서는 근래에 없던 기쁨이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가장 놀랍고 벅찬 감격은 따로 있었다. 고창읍성에서 만난 맹종죽! 고창읍성의 야트막한 등성이 너머에 출정 직전의 군대처럼 숨죽여 가며 도열해 있는 거대하고 거대한 맹종죽 숲 앞에서 우리 모두는 그 장엄한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이영하 선사가 1938년에 절을 지으며 중국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기념비문을 읽는 순간 머릿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1938년이라면 일제가 드디어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고 미국과도 끝장을 보고자 광분하며 우리 민족을 사지로 몰아넣기 시작한 때가 아닌가!

나는 여기에 이르러 오늘 아침에 왜 ‘기도’ 라는 단어가 까닭 없이 떠올랐는지를 불현듯 깨닫고,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나라의 앞날과 우리 제자들의 장래를 위해 마음을 모으며 어른 양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는 맹종죽을 거듭 거듭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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