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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밑에선 봉선화야’ 작사가 김형준이 홍성사람이라고?아직은 가설 고증자료 아쉬워
홍동면 금평리 김형준이 살았던 집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산 위에 산소와 봉선화 시비가 있다. 사진은 오른쪽부터 박상현, 배경덕(가운데) 씨 등 김형준의 자료 발굴을 위해 애쓰고 있는 어르신들. 박상현 씨는 서울에서 공직을 은퇴하고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배경덕 씨는 예산에서 공직을 은퇴하고 향토사를 연구하고 있다.

배경덕·홍병필·박상현·오연석 씨 주장, 홍동면 금평리에 집과 산소, 노래비 있어
작곡가 홍난파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로 그의 고향 경기도 화성에 생가 복원돼
서울에 살다가 충남 홍성군 홍동면으로 내려가 43년 보냈다는 행적은 기록 없어


국민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가곡 중 ‘봉선화’의 작사자 김형준이 홍성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가설 수준을 뛰어넘어 실제 김형준의 후손이 살던 집도 있고, 그의 묘도 있다.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 김애마을, 외진 산기슭에 가면 김형준의 장남 김창집의 가옥과 봉선화의 노랫말을 새긴 비석이 세워진 김형준의 묘를 볼 수 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와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상키를 바라노라

일제 강점기 홍난파가 작곡한 이 노래의 가사가 김형준의 작은 묘비에는 2절까지만 새겨져 있다. 1984년 후손들이 묘를 이장하면서 형편에 맞춰 구입한 묘비가 너무 작아 3절을 새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널리 사랑받는 국민가곡의 작사자가 세상을 떠난 후 국가가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묘지를 관리하고 묘비를 세웠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 이유는 홍성에서 잠든 김형준이 봉선화의 작사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봉선화’의 작사가가 김형준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홍성에 잠든 김형준은 봉선화의 작사가가 아니라 단지 동명이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곡가 홍난파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로 그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시에는 생가도 복원돼 있다. 이에 비해 김형준은 봉선화의 작사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자세하게 그의 인생여정을 소개한 글을 찾아보기 힘든다. 한 인터넷 블로그에는 봉선화를 처음 불렀던 여성 성악가 김천애(1919~1995)를 소개하면서 그녀가 인터뷰를 통해 김형준에 대해 말한 대목이 있는데 그대로 옮겨본다.

홍난파는 1920년 4월 ‘처녀혼’이란 단편소설집 첫 머리에 ‘애수’란 제목으로 이 곡의 기악곡 멜로디를 실었다. 그 책을 본 김형준(1884~)이 1926년 가사를 붙였고 홍난파는 같은 해 ‘세계명작가곡선집’에 봉숭아를 수록했다. 홍난파와 김형준의 관계에 대해 김천애는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숭아가 가득했어요. 김형준은 생전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죠”라고 말했다.

봉숭아의 한자 표현은 봉선화로 김형준이 처음 만든 제목도 봉선화다. 일제 강점기에 한자 표기가 일반화되면서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 같다. 이후 다시 한글 표기를 선호하게 되면서 봉숭아로 불리고 있다. 꽃은 6월말부터 10월까지 피었다 이듬해 다시 핀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그 물이 빠지지 않으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하는 그 전설의 꽃이다. 홍난파는 이후 10여 곡의 가곡과 111곡의 동요를 남겨 천재 작곡가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인물이고 김형준은 국내 음악교육가로 한평생을 보냈다.

김형준에 대해 이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 그가 홍성과 관련한 인물로 설명하는 글이나 문헌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홍성의 원로들과 출향인 가운데 일부 인사들이 홍성에 잠든 김형준을 봉선화 작사가라고 주장하면서 공식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평리에 있는 김형준의 장남 김창집 씨가 살았던 집으로 지금은 자녀들이 관리하며 주말에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경덕·홍병필·박상현 씨 등 팔순 어르신들과 홍동면지 편찬위원을 지낸 오연석 씨가 그들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형준은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로 와서 종로구 다동 72번지에 본적을 두고 신림동에서 거주하다가 홍성군 홍동면으로 이주해 43년간 살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홍난파와 바로 이웃집에 살았다는 주장도 한다. 앞서 성악가 김천애가 기억하는 김형준의 모습과 일치하는 주장이지만 충남 홍성군 홍동면으로 내려가서 43년의 생애를 보냈다는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으로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홍성 출신 원로 세 사람은 김형준에 대해 독립운동을 했다며 그들이 나름대로 발굴해낸 이야기를 몇 가지로 정리해서 설명한다. 그들이 국가보훈처에 제출하기 위한 문서를 기사 말미에 인용해봤다.

지난 6일 기자는 배경덕·박상현 어르신의 안내로 홍동면 금평리 김형준의 묘소를 찾았다. 야트막한 산 아래 볕이 잘 드는 곳에 김형준의 장남 김창집이 살던 집이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는데 주인이 팔순의 나이에 파킨슨병으로 서울에서 투병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자녀들이 자주 내려와 꾸준히 관리하는지 집 내부는 매우 깨끗하고 단정했다. 집은 한옥 형태를 띤 단층이었지만 현대적인 양식을 가미해 아름답게 디자인된 외관이 눈길을 끌었다. 처마에 달린 풍경이 가끔 바람에 흔들리며 울리기도 했다.

바로 위 가까운 산등성이에 묘지가 보였다.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소에 올라가보니 김형준의 묘 앞에 노래비가 있었다. 김형준의 묘를 비롯해 여러 기의 조상들 유택이 벌초가 잘 되어져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고인이 봉선화 작사가로 고증할 자료가 없으니 정말 안타깝죠.” 팔순 어르신들이 찬바람을 맞고 산을 내려오면서 탄식하듯 내뱉었다.

김형준, 과연 홍성군이 자랑할 역사인물군에 추가로 편입될 수 있을까? 보다 치밀한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진짜로 인정을 받기까지 길은 멀기도 하지만 가깝기도 하다.

■김형준의 생애
-출생지: 평양
-은거지: 충남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 김애마을
-생존기간: 1905~1947년(43년)
-묘소: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 산 34번지
-가족관계: 2남(1명 사망, 1명 생존) 6녀(3명 사망, 3명 생존)
-대표후손: 김창집(1935년 5월 28일생) 고향 홍성 거주중 결혼 후 서울 구로동으로 이사 거주

■본인 행적 및 독립운동
-의사면허(소지 여부는 불분명)
-일제강점기 서울·평양 오가며 독립운동
-금평리 거주 주택 대문에 대형 태극기 모형 그려놓음(일본 순경과 수차 마찰)
-일제 시 크고 작은 천에 그린 태극기 다수 집에 보관
-1945년 8·15 해방 당시 제일 먼저 자택에 태극기 게양
-작은 태극기 손에 들고 홍동면사무소 도착
-8·15 해방 당시 홍동면사무소에서 태극기 가져다 태극기 제작 배포

■유품
-의사 청진기 체중기 등 의료장비
-일기장, 사진첩, 인장, 만년필
-유성기 트럼프 시조놀이 카드(최근 까지 보존되다가 가족들 부주의로 유실됨)
-의서는 6·25사변 당시 부인 딸 2명 병사 시 진료비 없어 홍성 한양병원 김동주 원장에게 기증(장남 창집이 직접 전달)

■김형준의 비참한 생애
-일제강점기 서울 평양을 비밀리에 왕래하다가 큰 병을 얻어 경기도 의왕시 요양병원에 입원 진료중 사망
-의왕공동묘지에 매장 시 가세가 빈약하여 작고 조잡한 노래비를 자손들이 건립
-6·25전쟁을 겪는 중 부인이 홍동면 금평리 본가에서 사망하자 이곳 선영 밑에 부부합장하기 위해 의왕에 있는 본인 유골 이장하면서 노래비도 옮겨 세움

허성수 기자  sungshu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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