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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15>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렸다. 어떻게든 중절이라도 해 달라고 수원의 병원 의사에게 매달렸으나 거절을 당했다고 했다. 부탁이라는 것은 한 박사에게 어떻게 수술을 좀 해줄 수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도 거절을 했습니다. 첫째 하나의 생명체를 죽인다는 기분으로 수술을 해 준다 하더라도 6개월 태아라면 적어도 하나의 생명체로 거의 형체가 이루어져 있는 셈이죠. 7개월이면 인큐베이터(미숙아를 넣어 기르는 보육기)에 넣어 적어도 기를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의미에서든지 좋은 일은 결코 되지 못하는 겁니다. 고등학생으로 엄마가 된 것도 문제죠. 결국 무리를 해서 태아를 긁어내는 짓이므로 출산보다는 오히려 몸에 큰 지장이 있고, 또 아이는 7개월의 미숙아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므로 양쪽 모두 좋지 못한 일이라고 겁을 주어서 돌아가게 했지만‥‥‥”

“중절을 해 놓고 보육기에 넣어 길러요?”
“그렇지요. 옛날에는 이런 경우 겨울이면 그 근방 추운 곳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든지 아주 심한 경우에는 조산한 갓난애를 물통에 거꾸로 집어넣거나 했다는 이야기도 흔히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간 큰 사람은 좀처럼 없지요. 나는 아이를 소중히 길러 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에게는 어떻든 처음으로 보는 증손자이니 말입니다. 낳아서 길러 보라고, 의외로 이 아이가 커서 훗날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그런 날이 있을지 누가 아느냐고, 실제로 그런 일도 있었어요. 3대인가 4대인가의 독자인데, 혼전 임신이 되었죠. 집안 망신이라고 야단이 나서 싫다는 여자에게 무리하게 중절을 시켰어요. 그런데 아들이 회사인가 어딘지 근무했는데 결혼도 하기 전에 출장을 갔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거든. 뒤에 그 아이나마 있었더라면 우리 집 혈통이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미 때는‥‥‥”

한 박사는 이렇게 말을 이으면서 박 여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했다.
“혈통이 끊어진다는 괴로움 같은 건 누님은 못 느끼실 거야.”
“아니, 나도 알지.”
낮은 음성으로 박 여사가 대답했다.
“놀랐는데요. 누님에게도 다른 여자들과 같은 섬세한 감정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는데.”
“죽은 남편이 미국 사람이긴 했지만 그런 말을 하곤 했었지. 이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딸이 둘 있어. 그래도 내게는 아이가 없으니, 가엾다, 가엾다, 하고 항상 위로해 주었었지.”
“재산을 자기의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그럴까요?”
한 박사가 물었다.

“그런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애. 실은, 나, 최근 혈통 같은 것에는 초월하고 있지.”
“어째서 초월한 거죠?”
“비교의 문제가 아니지. 이 세상은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그런 까닭에 아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아. 죽은 그이와 나는 참 사이가 좋았었지. 서로 좋은 이야기 상대였어. 지금 한 박사가 앉아 있는 그 소파에 그이가 앉고 나는 지금 이 의자에 앉아서 우리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었지. 그 때는 이 집에 쓸쓸한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어. 두 사람만의 세계로 가득 차 있었어. 사랑으로.”
“부러운데요.”

삽화·신명환 작가.

한 박사는 일부러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런데 그렇게 다정했던 상대가 없어졌잖아. 지금은 온 세상이 텅 빈 것 같아. 이상하지? 신부님, 이 집도 그래요. 한결 썰렁하고 텅 빈 것 같아. 전에는 즐거움만 가득 차 있었는데‥‥‥”
“그러니까 부부 사이가 너무 좋은 것도 문제라니까. 사이가 나쁜 부부라면 한 쪽이 죽으면 한 쪽은 만만세지만 그런 영감은 죽어주는 것이 마누라를 편하게 해 주는 격이 되거든요. 마누라에게 애먹고 있는 영감도 마찬가지지요. 장례식 때 아이쿠 살았구나 하는 얼굴을 한 사람을 난 알고 있어요. 어떻든 금슬이 좋은 부부는 가여워요. 홀로 되어 쓸쓸해 보이고 처량하기까지 해 보이거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느 쪽으로 굴러도 결국 같은 것이긴 하지만‥‥‥”<계속>

한지윤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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