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 일찍 접고 우레탄으로 길 바꿔 최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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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일찍 접고 우레탄으로 길 바꿔 최선의 선택
  • 취재=허성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4.1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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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1> 이민우 성일우레탄(주) 대표이사
이민우 대표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은 회사지만 내실있게 경영한는 ‘강소기업’ CEO다.

기자로 인터뷰하러 갔던 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
80년대 생소한 분야였으나 단열재로 가능성 발견
전국 곳곳의 미군부대 찾아다니며 영업실적 올려
40년 한 길 걸어오면서 업계에 독보적 위치 올라


성일우레탄(주)은 단열재로 뛰어난 우레탄을 소재로 냉동창고, 화학탱크, 가스저장고 등 각종 산업·건설분야의 건물 시공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로 경기도 여주시에 본사가 있다. 40여 년 전 우레탄을 단열재로 개발해 이 분야에서 선두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성일우레탄 이민우 대표이사는 홍성 출신 향우다. 홍주고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지금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 홍주고는 사업가로 성공한 동문 많아
본지는 지난달 30일 여주로 직접 달려가 이 회장을 만났다. 홍성에서 상당히 먼 거리였다. 이천시를 지나 강원도가 지척인 곳, 여주에서 원주로 가는 국도변 한적한 곳에 성일우레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천시에도 홍주고 출신으로 얼마 전 모교에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했던 전인수 동문이 생각나 자주 만나는지 물어봤더니 이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인수(4회) 동문이 이천에서 하이디스 테크놀로지를 운영하면서 올해 모교 입학식에 장학금 5500만 원을 기부했어요. 그 동안 동창회에 자주 나온 분이 아니어서 본 적이 없었는데 5월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 회장은 모교 출신으로 성공한 기업가가 바로 가까운 이천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도 뒤늦게 알게 됐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적극 실천하고 나선데 대해 무척 반겼다.

“4월에 만나려고 했다가 미뤘어요. 5월에 화장품을 하며 매년 장학금을 내놓고 있는 친구, 하이디스 전인수 동문, 경찰청 외사과장 김재원(3회) 동문 등 좀 잘 나가는 사람들을 모아서 모교 발전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회장은 1974년 3월 홍주고가 개교하면서 첫 입학했다. 홍성군청 소재지에 먼저 설립된 홍성고가 있었지만 지역 출신 학생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사학재단의 홍주고 설립은 입학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홍성고는 공부를 좀 해야 들어갈 수 있었죠, 우리는 공부를 못 하거나 잘 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회적인 활동성이 좋은 편이어서 사업에 성공한 동문이 많습니다. 홍고 출신이 관직에 많이 나갔다면 사회적으로는 우리가 더 낫지 않을까요.” 이 회장은 양교에 대해 이렇게 비교하면서 후배들에게 지금 공부를 좀 못한다고 해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며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개발해 적절한 시기에 발휘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할 것을 강조한다고 했다.

“당시 홍주고생들은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홍성고에 떨어져서 많이 왔기 때문이죠. 지금도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번 모교에 가서 2시간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든지 자기만이 가진 재능이 있기에 그것을 어느 시기에 발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미래를 위해 지금 공부 안했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홍주고는 처음에 남고로 시작했다. 당시 홍성여고도 있었으므로 3개의 인문계고로 균형을 이루며 베이비부머세대에 넘쳐나는 인재들을 적절히 수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당시 신설 홍주고도 쉽게 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그 때만 해도 인적 자원이 넘쳐났습니다. 제가 입학할 때 경쟁률이 2.3대1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학생들이 자꾸 많아져 5개 반에서 8개, 10개 반으로 점점 늘려야 했죠. 홍주고가 개교하기 전에는 홍성에서 진학하기 어려워 외지로 많이 나갔습니다. 우리 선배들 중에서 초교를 졸업하면 거의 외지로 나갔죠. 서울로 많이 갔고 대전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극심한 이농 현상과 저출산으로 20여 년이 지나면서 홍주고는 남녀공학으로 전환했고 최근에는 학급을 점점 줄여 나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광천이 고향인데 그 때는 광천장날 읍내에 나가면 사람이 부딪혀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광천이 낙후된 이유는 뱃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 회장은 인구 절벽시대를 맞아 홍성군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젊은 사람입니다. 젊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농사로는 안 됩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은 가업을 중요시합니다. 우리나라도 젊은이들이 가업을 이어받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홍성은 대표적인 축산업 고장입니다. 전국의 돼지나 닭값을 좌우하는데 젊은이들이 아버지가 하는 가업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우리 때는 다방에서 닭과 소를 길렀습니다. 그러니 도태될 수밖에 없었죠. 홍성과 광천은 냄새나는 축사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홍성은 축산의 현대화를 통해 젊은이들이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 기자생활 일찍 접고 우레탄 영업사원으로
이 회장이 운영하는 성일우레탄은 거창한 이름에 비해 작고 아담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강소기업’이다. “지난 40년 동안 오직 한 우물만 파왔습니다. 우레탄은 단열재 중에 성능이 최고입니다. 저도 대학 졸업 후 처음에는 언론계에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산업경제신문(지금은 한국경제로 통합)에 1년 정도 있으면서 어느 기업체에 인터뷰를 하러가서 우레탄을 처음 구경했습니다. 그 후 우레탄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고 생각해보니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단열재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어요.”

8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분야였으나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경제수준이 높아지면 우레탄의 소비가 많아질 것으로 내다본 이 회장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기자생활을 일찌감치 접고 우레탄 업계에 뛰어들었다. “10년, 20년 후에는 우레탄이 산업의 한 축이 되겠다고 보고 인터뷰했던 그 회사에 전화해서 입사를 하겠다고 했죠.”

처음에는 그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고객을 찾아 나서야만 했는데 그는 고민하던 중 미군부대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미군부대를 찾아다녔는데 기지 내에 짓는 건물에는 반드시 우레탄을 단열재로 사용하도록 설계하고 있었으므로 상담만 하면 그대로 영업실적으로 이어졌다.

“당시 대한민국 안에 있는 미군부대 공사는 다 했습니다. 회사에서 최단시간 내에 승진할 수 있었고 이 업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죠.” 그 후 우리나라도 발전하면서 새로 조성하는 산업단지마다 우레탄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1984년 이 회장은 뜻있는 사람들과 같이 창업을 했다. 우레탄으로 내실 있게 기업을 성장시키는데 앞장섰던 그는 10년 만에 최고경영자가 됐다. 그의 회사는 그리 크지 않은 공장에 직원도 눈에 띄지 않아 너무 조용한 분위기였는데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공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직원이 36명 정도 됩니다. 여기 꼭 필요한 사람만 한두 명 남고 다 현장에 가 있어요. 공장에 다 들어와 있으면 돈을 못 벌죠.” 성일우레탄에서 지금 완공했거나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이트맥주 숙성탱크를 비롯해 동원산업, LG화학 화학탱크, 청주 하수처리장, 롯데 크라우드, 삼척 LNG저장소, 홍천 치유센터 등의 단열재 공사다.

“축사 사일로, 일반 건축물, 신재생 에너지, 자동화 창고, 학교 강당도 단열 공사를 합니다. 대형 냉동창고 공사도 많이 하죠. 도시가스는 가정에서 기화된 기체를 쓰지만 수입해 올 때는 액상으로 영하 196℃까지 내려가게 합니다. 이처럼 LNG 운반선에도 우레탄이 들어가고 구두밑창, 소파, 쿠션, 침대 매트리스 등 우레탄이 안 들어가는 데가 없습니다. 업계에서는 독보적인 기술로 인정받고 있죠. 홍성 시골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온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주에 본사를 옮기고 공장을 세운 지 6년이 됐고 하남에 서울사무소를 운영한다. 이 회장은 사회공헌 활동도 적극 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고 있다. 여주의 결손가정 아이들을 위해 매월 50만 원씩 기부하며 홍성의 모교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3년 동안 학비와 급식비를 대신 내주고 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내가 혜택을 받았으니까 혜택 받아야 할 사람을 도와줘야죠.”
그의 밝은 얼굴처럼 공장 주변에도 따뜻한 햇살 아래 봄이 와 있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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