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잊어버리지 안 잊어버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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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잊어버리지 안 잊어버려유”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7.0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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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8>
이순표 1929년생으로 장곡면 신동리에서 태어나 예산군 대흥으로 시집을 갔다. 이발관을 운영하는 남편을 따라 장곡면 옥계리로 30살에 와서 지금까지 4남매를 키웠다.

곡 신동리서 태어나 예산군 대흥으로 갔다가 수리갑되아서 땅이 다 들어갔응께 이발소 하나 사갔구 청양으로 갔다가 우리 집 양반이 타관 타니까 안 되더라구유. 그런께 거기서 또 여기로 왔쥬. 17살 먹어 글루 시집갔응께. 여자들 붙잡으러 대녀서. 위안부. 밤으로 밤으로 광천으로 피해다니느라구 우리 아버지가 혼나셨어. 안 보낼라구. 하두 귀찮아서 굴뚝에 감춰놨는디 거기까지 왔슈. 일본놈이. 우리 친정할아버지가 안 된다구 나 하나니께 우리 오빠하구 딱 남매여. 그래서 도망다니다 귀찮아서 시집 왔단께.

정은 잘 살았는데 시집 가니께 식구는 많고 어렵고 10식구. 어린 맘에 가서 방아 쪄서 그 식구 다 맥여 살렸어. 그 때는 열일곱이면 다 했슈. 국민핵교 졸업하구 내내 피해 다니다가 장곡초등핵교 졸업했지. 보리고개니께 먹을 것두 읎슈. 콩 심은 거 꺾어다가 우리 시할아버지는 쌀 한 숟가락에다가 보리쌀하구 먹구, 우리는 그 보리만 먹구 콩 허구. 논두렁에다 콩 심으믄 그거 까서 그게 식량이라 먹구 살구. 보리 모가지 자르러 가구. 절구통에 꺼죽을 해갖고 볶아 말려서 타서 그걸루 밥 해먹었어. 쌀두 하나두 읎은께. 남이 논 타작으로 열 마지지 짓더라구. 근디 그거 농사져서 타작 주고 인저 먹고 살 수가 읎은께 도지 얻어 먹잖여. 그러믄 갚어야지. 그러믄 뭐가 있슈. 열마지기 지면 80키로 한 짝 씩, 두 짝 씩, 갖다주고. 갚으믄 읎은께 또 도지 얻어 먹구, 그러구서 일 년 농사 져서 또 갚아야 허구. 그 전에는 노인 양반들인께 돈 버는 양반이 읎지. 시동상들도 어리구. 내가 다 가르쳤응께. 사촌 시누들 다 우리 집 와서 먹구 살았어. 시골집 치구 사랑방도 있고 컸지. 방 3개. 작은집 식구들두 왜 안 가구 그렇게 다 우리집서 먹드라구. 그런께 내가 곤혹을 많이 치뤘슈.

 애가 죽었슈. 내가 스무 살에 낳았지. 대핵교 졸업하고 여름방학에 내가 저기 가 밭을 매니까 뜨겁다고 밭 매지 말고 자꾸 들어가자구 그러더라구. 근디 그걸 매는데 지가 나와서 거들다 막 뜨건디서 더위 먹었나 배가 아파 죽는다고 해서 홍성의료원 갔다 그냥 죽었슈. 지금 살았음 칠십이 다 됐슈. 그 때 병원이 뭐 있슈? 급해 죽겄는디 걔는 지 아버지랑 먼저 병원에 보내고 여기 택시 하나밖에 읎었어. 가매가매 돈 버느라고 빨리 안 가잖어. 사람 실느라구. 아구 속 터져 죽겄어. 가니께 벌써 죽었잖여. 죽는 날 장사 지내는데 취직자리 알선됐다고 빨리 오라고 하는디 죽었는디 뭐 사람이 있어? 서울 홍익대 다녔는디 공부도 잘허구. 저혈당으로 맨날 근력 읎어 쓰러져. 병원 가믄 약도 안 주고 보만 하라고. 그 땐 어려우니께 보약을 맥여유? 못 맥였쥬. 항상 죽어도 잊어버리질 안혀. 산에다 묻었다가 지 동상이 쳐다보믄 맘 아프다고 화장해서 뿌렸어, 그래서 그 자리 파서 뭉갰어도 광천 갈라믄 거기가 자꾸 봬. 거기 생각나서 광천 갈라믄 산성 칼바위 거기여. 지금까지 죽으면 잊어버리지 안 잊어버려유. 걔 죽고 교회로 뛰쳐 가 버린거야. 그래 지금 40년 됐슈. 교회 믿은 지. 교회 안 나갔으믄 발써 죽었을껴.  

루 밥을 다섯 번 씩 이구 지구 다녔어. 농사 짓는데 일꾼 얻어서 나물 뜯어야지, 모 심을라니 술병 나르제 그러고 다닝께 몸땡이가 힘들더라구. 이발해갔고 어려운디 우리 할아버지가 논 닷마지기 샀어. 근디 땅 수리잡으니까 다 읎잖여. 그래 이리루 이사를 왔지. 내가 서른 살 먹어 이루 왔응께. 자운영 거름 할려구 심은 거 있어. 배고프니께 그거라두 여러 식구 먹어야 허니께 그거 뜯어다 무쳐 먹고 밥 쪼끔 있으믄 그 눔 넣구 밥 비벼서 여남흔 식구가 다 퍼 먹구. 논에 그거 베러 가면 바구니 들고 다 글루 가. 그러면 논 임자들이 쫓아와 뺏어가유. 그래도 그거 낫으로 벼다가 삶아서 무쳐서 밥 한 그릇 있으믄 그 눔 양재기에 썰어서 넣고 비비면 여자들 너댓 모여 먹는겨. 쑥뿌리도 캐다 먹고 아카시도 따다 밀가루 넣고 쪄서 먹구. 밀 갈아서 체를 쳐서 아카시 한 바가지 따서 그렇게 먹었지. 겨울에는 시래기 삶아 놓고 고구마 방 하나에다가 통갈이를 혀. 고구마 하나 채워놓으면 그거 쪄서 김치도 동 나고 고구마도 동 나. 겨울엔 그거만 먹는겨. 김치도 지금마냥 안 담그고 총각김치 마냥 다듬어서 소금에다 넣고 물 타서 싱건 김치가 돼지. 고추도 알바닥에다 씨 갖다 갈고 그 눔 나면 솎아주고 북 주고 그랬지. 지금마냥 비닐이 있깐? 지금은 농사 짓기 편혀. 옛날에가 어려웠지. 우리 시할아버지가 글 가르치시구. 글방 선생. 학생들이 많드라구. 우리 시할아버지가 벼 가지고 오면 안 받았어. 무료로 가르치고 봉사하셨어. 유명하셨지. 우리 시할아버지 돌아가신께 글 가르치던 학생들 잔뜩 왔드라구.

리 집 양반 결혼해서 군인 갔다 와서 이발했지. 나랑 세 살 차이. 지리산서 토벌할 땐데 우리 시할아버지가 손자 죽는다고 얼매나 애걸복걸 울구 그랬슈. 4년 있다 왔쥬. 군인 가서 시동상 하나 죽었슈. 아들만 삼형젠데 우리 막내 시동상 하나 살았슈. 지금 서울서 사는디 거기두 이발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그거 못허구 아들이 벌어 맥여 살려.

우리집 양반 국민핵교 졸업하구 일본 갔었대. 어려우니께 돈 벌어다 사업한다구. 일본 가서 돈 벌었는디 논 살 거 부쳤는디 우리 시할아버지가 손자가 돈 벌어온 거 아까워서 못 쓴다고 꽁꽁 묻어 놨는디 그냥 다 써 버렸댜. 일본 갔다 와서 아프니께. 거기서 배 고프니까 고구마 캐다 여럿이 먹었대. 근디 그거 먹고 체해서 위장병 걸려서. 평양도 갔는디 시 사람이 돈 벌러 갔었대유. 평양 가서 기계 같은 거 만지구 그런 거 했댜. 가난이 진저리하고 살았응께.

이발해서 돈 쪼끔 벌어서 그때부터 힘 펴고 살았어. 애들 머리 감기는 사람들 다 뒀잖여. 물 져다가 그 때는 지하수 물 떠다가 머리 감았잖유. 그러니께 일하는 사람 뒀지. 이발사도 셋 뒀지. 그 사람들 다 내가 밥 해주고 수건 빨아서 대야 하고 말리고 전기가 있나 뭐가 있어. 아고, 그거 빨아서 다림질 혀야 허구 그렇게 해서 보냈슈. 대목에는 워따 말릴 데가 읎잖여. 근께 다림질로 대려서 말려서 그렇게 해서 손님들 씻으라구 보내지. 지금은 편혀. 물지게에 물통 떠다 부어놓고 머리 갬겨 주지. 대목 때는 하나 더 둬야 했응께 손 나는대로 그 사람들 밥 먹어야 허니께. 생선 시장에서 사서 지져 주고 그거지 뭐.

농사진 거 읎구 장 서믄 쌀을 팔아야 혀. 팔아야 그 사람들 밥 해주지. 그 사람들 월급주고 나면 읎어. 대목 때는 고기 사줘야 하고 양말 사줘야 하고.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은겨. 보너스 줘야 허니께. 이발소 이름 알간? 그냥 이발소라고 불렀어. 오십까지 했지. 더 해도 되는디 오십까지 허구 안 한다고 하대. 지금 이발소 하는 이가 우리 집 양반이 가르키던 이여. 지금두 얘기혀. 우리 집 양반이 애들 잘 달래서 깎아 줬다구. 자기가 몸이 아프니까 않더라구. 우리 이발할 때는 손님도 많구 깡패도 많았어. 담배 꼬다 물고 그거 아주 비기 싫어 죽을라 했어. 장 서믄 그 나무 사와 우리가 땠슈. 그 때는 아궁이에 불 땠잖유. 나무장사들이 이고 오면 그 나무 쟁여놔야 혀. 그런 건 구애 안 받았어. 그 전에 여기 장 섰어. 소 장, 돼지 장, 별거 다 섰는디 고속도로 나니께 장이 깨져버리더라구. 아숩더라구. 청양장, 광천장, 홍성장 가잖여. 난 꼬부라졌응께 청양장도 못 가. 애들이 사다주믄 먹지 못 해유. 우리 며느리들이 가끔 오다가 사다 줘서 넣구 가. 이웃에 아저씨가 나 데리고 다녀. 그러니께 고맙지. 병원에두 이웃 아저씨가 데리구 가. 그래 문을 일찍 열어 놔. 내가 미안해서 괜찮다구 안 간다고 그럴 때도 있구.

큰 아들 죽고서 4남매. 다 서울 있슈. 지금은 애들이 잘 되아서 출판사 하거든. 말년에 가서 고생 면했슈 인자. 걔들이 잘 허유. 밥 먹구 드러눴다가 경로당 가구. 여기 노인네들 다 죽고 있깐? 나이 먹은 이는 나하고 둘 밖에 읎어. 구십까지 살았다고 엊그제 손주가 꽃두 사오고 케이크도 사오구. 아들이 교회에다 돈 내놓고 점심 대접하라고 경로당에다 돈 주고. 엄마 오래 살아서 고맙다고. 작년 가을에는 교회에 차도 사 줬슈. 노인네들 다친다구 문도 자동으로 했디유. 경로당도 여적 10만원, 20만 원, 30만 원 행사하면 베풀었어. 저런 거 하지 말라고 했더니 회장님이 자꾸 해싸서 감사패 받았네. 아프지만 않으면 살어. 에구, 뭐 태어나구 싶어. 교회 다닌 지 40년 됐응께 천국 가는 거 밖에 읎어.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는 죽어서도 잊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허리가 굽어 더 작아 보이는 어머니의 마음에 바위보다 더 큰 돌이 얹혀 있습니다. 뭐라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어머니의 손만 지그시 잡아봅니다. 어머니, 건강하십시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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