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 유학의 학맥과 정신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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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유학의 학맥과 정신 유산
  • 건양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김문준 교수
  • 승인 2018.07.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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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5>
충남 논산에 위치한 사계 김장생 선생의 돈암서원. 출처= 논산시

‘기호 유학’이라는 명칭은 ‘영남 유학’과 병칭되는 개념으로 기호 지역의 유학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기호학파’라는 말의 사용은 잘못이다. 기호학파란 용어는 ‘퇴계학파’가 중심이 된 ‘영남 유학’에 대한 ‘율곡학파’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율곡학파가 대개 기호 지역에 연고를 가지고 활동했기 때문에 부르는 명칭이다. 따라서 율곡학파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단순히 지역적인 의미로 기호 유학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기호 유학을 다 함께 총칭해 기호학파와 동의어로 사용하면 안 된다.

더욱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라는 말은 학파와 당색에다가 지역 연고를 묶어 생각하는 병폐를 내포할 수 있으므로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학파라고 칭한다면 사제 간의 학맥을 중시하는 율곡학파나 우계학파, 사계학파, 우암학파, 명재학파 등 구체적으로 칭해야 한다.

기호 유학이라고 할 때, ‘기호’(畿湖)는 경기(京畿) 지역과 호서(湖西) 지역을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호서라는 명칭은 조선 중종 때 기록에 보이며, 호(湖)는 공주의 금강을 호강(湖江)이라 했다는 설에서 유래한다. 즉 금강을 기준으로 호(湖)의 서쪽과 남쪽을 호서와 호남이라고 불렀으며, 따라서 호서 지역은 지금의 충청 지역을 가리킨다.

기호 지역의 유학은 한 가지 학문 경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과 양명학, 예학과 실학 등 다양한 학문 내용을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기호 유학을 하나의 학파로 묶어 기호학파로 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양란 후 김장생이 이이의 학통을 이어 연산을 중심으로 문인을 대거 양성하고 그 문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겪은 이후, 기호 유학은 호서 지방의 명현들에 의해 형성된 학문과 학풍이 지배적이 됐다. 이처럼 기호 유학의 학적 성격과 범위 설정은 지역적인 특성보다는 사승 관계가 중요하며, 특히 율곡학파와의 연계성이나 동질성이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이는 파주를 중심으로 성혼과 송익필과 더불어 친교를 맺고 학문 교류를 했으며, 그 문인들도 대개 자기 스승만을 고집하지 않고 이이, 성혼, 송익필을 두루 찾아가 배우고 서로 간에도 서로 왕래했으므로, 성혼, 송익필 계열도 율곡학파와 연계돼 기호 유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17세기 초 기호 유학의 중심인물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이은 조헌·김장생·신흠·김집·최명길·장유·송준길·송시열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호서를 근거지로 활동한 조헌·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 등은 문묘에 배향됐으며, 그 밖의 많은 인물들이 호서 지역의 여러 서원과 사우에 배향됐다. 그런 점에서 호서 유학은 기호 유학의 핵심이며, 조선 후기 유학의 주역들이었다. 

기호 유학의 중추를 이루는 인물은 이이와 성혼이다. 두 사람은 경기도 파주에 살며 이황과 기대승이 논했던 사단칠정론을 이어서 사단칠정과 인심도심 문제를 논했다. 이이는 인간이 성실한 의지로 능동적인 기질 변화를 이룰 수 있으며, 사회 개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서 율곡 학파는 삶을 규제하는 예학과 강한 사회 개혁 사상을 표출했으며, 이러한 학파의 성격과 동질성이 강화된 시기는 17세기 초 김장생을 거쳐 17세기 후반 송시열이 활약한 때다.  

이들이 중심이 됐던 충청 유학의 내용과 특성은 한국 전통 유학의 내용과 구조적 특성을 체계적이며 전반적으로 내포하고 있었으며, 17세기 이후 한국사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 전통 유학은 성리학, 예학, 의리학과 체계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17세기 양란 이후 도학의 정통주의 강화, 춘추 대의정신의 권위화가 진행됐고 이러한 일을 주도했던 당시 산림의 주축이 바로 충청 유학자들이었다. 기호 유학은 한국 전통 유학의 내용과 특성을 체계적이며 전반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특히 충청 유교 정신은 17세기 이후 한국 유교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18세기 한국 유학계는 다양한 경향을 보였는데, 기호 유학은 그러한 경향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성리학으로 주춧돌을 삼고 ‘존왕양이’로 기둥을 세우고 예학으로 대들보를 삼은 성전(聖殿)을 세운 정통 성리학, 그 성전의 벽에 작은 구멍을 내고 새로운 관점을 세우려 했던 윤휴와 박세당, 아예 성전 밖에 새집을 지으려 한 실학의 유형원과 이익, 그리고 양명학의 정제두가 나왔다. 이러한 18세기 학계 상황에서 벽을 더욱 견고히 하고 주춧돌과 기둥을 보완하려 한 인물성동이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유학자들이 보여준 삶과 학문을 통해 오늘날 높이 평가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치열한 진리 추구의 학문 정신, 진리와 함께 하는 생활 태도를 보여줬다. 이것이 예학, 인물성동이론, 존왕양이론, 양명학, 실학으로 드러난 것이며, 투철한 진리관과 현실에 대한 사명감은 이들 유학자들의 공통된 바탕이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며 깨닫는 바를 신속하고 독실하게 결연하게 행동하며 곧은 지조와 절개, 평생 기질을 연마하던 독실한 수양 등 도학 선비들의 충실한 학행은 모든 한국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고루한 도덕군자가 아니라 자신의 과오와 부정과 불의에 엄격하면서도 삶에 진지하고 인격과 생명을 존중하는 어질고 바른 삶의 태도를 주목하고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기호 유학의 인간정신과 보편정신은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중시해 펼쳐나간 공리주의나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등에서 살펴보기 어려운 인류 공영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높은 진리관, 도덕관, 가치관을 온전히 드러내고 계승하는 일은 한국 인문학계와 문화계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성리학의 학문관은 다른 학문을 이단 사설이라고 공박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성리론과 예론 안에서도 다른 이론과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므로 대단히 편협한 학문관과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학은 종교, 인종, 국가를 차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고 지선한 보편적 인도정신을 진리로 추구하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은 21세기의 오늘날 인류 공영의 절실한 전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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