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랑 같이 사니까 좋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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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랑 같이 사니까 좋더라구요”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8.0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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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10>
김태희 1948년생으로 광천에서 태어나 광천으로 시집갔다. 남편 병 뒷바라지를 하며 두 남매를 키웠고 지금은 딸과 함께 홍북읍에서 살고 있다.

로 살았었는데 여기 명절 쇠러 왔었어요.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혼수상태가 됐어요. 명절 하루 전날. 홍성의료원 갔더니 급성신부전증이라고 천안 단대 가서 중환자실에 구일 있다가 일반 병실 이틀 있다가 의료원으로 간다 해서 그 때 이쪽으로 옮겼어요. 그런 바람에 우리 딸이 엄마 혼자 놔둘 수가 없다고, 엄마 혼자 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그 때 이쪽으로 옮겼어요. 딸이랑 같이 있으니 음식 조절하고 병원 델고 가니 덜 해요.

천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했어요. 어떡허다 보니 다시 광천으로 시집 왔어요. 우리 친정 오빠가 광천서 사는데 동창인 사람하고 중매를 섰어요. 스물두 살 땐가, 서울 간 게. 스물일곱 살에 시집갔죠. 인물은 잘 생겼어도 술 먹는다고 해서 좀 꺼려했어요. 술 먹는 사람한테 시집 안 간다고 싫다고 그랬더니 술 안 먹고 맨숭맨숭한 것도 속 터진다고, 마음 너그럽고 하니까 결혼하라구. 한참 생각하다 결혼했어요. 시아버지 자리가 마나님을 위하셔요. 그걸 아니까 결혼 시켰나봐요.

애 아빠가 마흔아홉 살에 일찍 죽었어요. 위암 걸려서. 우리 딸이 일곱 살 때 제 아빠가 교통사고 났어요. 무릎뼈 다치고 척추 부러지고 여기 홍성서 안 되고 서울 성모병원 가서 척추수술하고 척추마비가 돼갔고 시골 내려와 살았어요. 그렇게 사는디 약을 일 년 먹었나? 소변을 맘대로 못 봐요. 집에서는 대변도 항상 관장시켜서 빼내고, 13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12년 째 됐을라나. 자꾸 밥을 못 먹고 속 쓰리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 병원 가자고 해도 겁 나가지구 안 갈라 하더라구요. 한약물 같은 걸 토한다고 그래요. 우리 손자뻘 되는 애가 있었어요. 걔가 의과대를 다녀서 물어봤더니 빨리 병원 가보라구 그러더라구요. 원자력 병원 갔더니 의사가 이렇게 가족들을 관찰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고개를 저었어요. 보호자 한 분 남고 다 나가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 내가 “선생님, 저 사람 보셨잖아요. 척추마비로 13년째 살아요.” 의사가 “척추마비 환자들이 보통 2~3년 사는데 어떻게 살렸냐구?” 그러대요. 내가 “차마 내 입으로는 얘기 못하겠어요.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만약에 3월에 발견했으면 나서슬라나요?” 그랬더니 급성이었다고. 의사가 다 들어오라구 하더라구요. 의사가 얘기허니 애 아빠가 “그럼 내가 얼마나 살겄냐구?” “길으면 3개월, 짧으면 한 달이라고.” 진짜 의사들이 어째 그렇게 잘 맞추는지 몰르겄다고 그랬어요. 딱 한 달 됐는데 죽드라고요. 8월 13일. 그 때 애들이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2학년 그랬는데. 애 아빠 죽고 나서는 처음에는 우리 애 아빠가 들어오는 것 같고 그러더라고요.

상금이 나왔었어요. 애들 저기허구 뭐해서 잘 아는 사람에게 돈을 꿔줬어요. 사기 당했어요. 그랬어도 애들은 내가 장사 해갔고 대학 가르치고 그랬어요. 취직 헐 때까지. 공부 가르킬 때는 괜찮았는데 사기 당하고 그 때부터 내가 너무 신경 쓰니까 당뇨 오고 그러더라구요. 생활은 그냥저냥 해나갔어요. 의사 하는 소리가 잡숫고 싶은 거 다 해드리라구, 지 아빠가 족발 푹 삶아서 막걸리 한 잔 먹고 싶다고. 족을 압력밥솥에 넣어 가지구 폭 삶으면 얼마 안 가믄 삶아져유. 그걸 맛있게 먹드라구요. 딱 2조각 줬는데 더 먹고 싶어 하드라구요. “이따 줄게. 지금 이거 먹고 부대껴 토하면 어떡해. 당신 그렇게 하는 게 날 것 같아.” 그러구 저녁에 준다니께 안 먹는다고 하더라구요. 그 다음에는 스프가 먹고 싶대요. 경양식 집 가면 나오는 스프 있잖아요. 아는 식당 가서 얘기해 얻어 오니 맛있게 먹드라고요.

치킨집을 했었는데 애들 대학 공부 다 가르키고 나니 IMF가 터져서 장사도 잘 안 되고, 내 몸도 안 좋구 그래서 쉰다섯 살에 그만 뒀어요. 지 할아버지 모시고 살았었는데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만뒀어요. 혼자 사는 것보단 나서스니까요. 시아버지가 의지가 됐어요. 우리 남편 죽고 났는데 시아버지가 친정아버지 겸, 친정 오빠 겸, 남편 겸 의지하고 살았어요. 처음 신랑 죽고 나서는 그렇게 시아버지가 보기 싫더라고요. 당신 자식 죽었는데 어쩜 저 양반은 밥도 잘 먹고 저러나. 내가 밥을 해 줘도 안 먹고 그랬어요. 어쩌다 우리 시아버지 얼굴을 쳐다봤는데 얼굴이 새카맨해요. 간 환자들 얼굴 시커멌듯이. 어머나, 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에요. 친정 엄마가 밥 중에서 눈칫밥이 최고 무섭다고. 내가 우리 시아버지 밥 갖다 주는 것도 저 노인네 잘 먹고 가시면 좋겠다 허는 마음으로 허면 괜찮은데 밥 갖다 주는 것까지도 내가 보기 싫은 거에요. 아차 내가 잘못 했구나. 그 다음부터 우리 시아버지한테 잘 했어요. 우리 신랑 살았을 때도 잘 했지만 한 달 동안인가 내가 미워라 했거든요.

시아버지는 고관절이 부러져서 돌아가셨어요. 병원 모시고 갔더니 수술해도 3개월, 안 해도 3개월이라고 하더라구요. 건강 상태가 안 좋다구. 근디 우리 시아버지가 “나 수술도 안 시키고 이대로 죽게 놔 둘래?” 이러는거에요. 그래 다 검사하구 수술을 시켰어요. 근디 수술한 지 10일 만에 돌아가시더라구요. 시아버지 돌아가실 때 꿈을 꿨어요. 내가 열무를 이만한 그릇에 다듬는디 저쪽 홀 한 구탱이에 저승사자, 검은 옷 입은 사람 두 명이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거진 다듬고 나니까 둘이 나가요. 근디 나가는데 누굴 데리고 가는 거에요. 데리고 나가면서 “당신 그동안 고생 많이 했네.” 그러구 나가더라고. 내가 딸에게 얘기를 했더니 딸이 선배에게 물어봤대요. 니 할아버지 돌아가실라나 보다, 니 엄마는 아니니 잘 보라고 하더래요. 그 다음 다음날 소변이 안 좋고 엉뚱한 소리하고 그러더라구요. “아버지 왜 이래유?” “내가 가게 가거든 봐 줄게. 집에 가자.” 나중에는 물만 삼키고 다 뱉드라구요. 그 이튿날 아침 눈을 안   뜨더라구요. 시아버지 돌아가시구 내가 기절하고 기절하고 그러니까 어째 신랑 죽을 때 보다 시아버지 죽고 나니까 더 그렇게 맥을 못 추냐고 남들이 그러더라구요. 시아버지 죽고 나니까 더 의지를 못허겠더라구요.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천고등학교 1회 졸업하고 그 때는 광천여고라고 생각했죠. 친정 오빠가 얘기해갖고 우체국 교환으로 다녔어요. 홍성, 광천, 그런데루요. 친정이 서울로 이사 간다고 해서 “나 여기서 하숙하며 다닌다구.” 그랬더니 엄마가 “지지배가 혼자 놔두면 큰 일 난다”고 끌고 올라갔어요. 친정 오빠들이 서울에서 식당 했어요. 한 6년 살았나.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여기가 어딘지 저기가 어딘지 친정 엄마하고 나는 누가 데리고 가야만 하고 그랬어요. 그러구 나서 광천으로 다시 시집을 왔는디 우체국 다닌다고 다시 복직하면 어떻겠어 그랬는데 지 아빠가 여자가 돈 벌어오면 남자 우습게 안다고, 시어머니는 벌으라고 그랬는데 애 아빠가 못허게 했어요. 시어머니는 재 아빠 병 나고 나서 화병으로 돌아가셨어요. 휠체어 타고 똥오줌 받고 하니까 너무 화가 치미는 거에요, 시어머니가. 휠체어 타고 그래도 주변 사람들한테 참 잘했어요. 나 고생된다고 생각하고서. 근데 자꾸 나한티 싫증내고 짜증내고 그러더라구요. “내게 짜증낸다고 다 해결돼요? 나 당신 놔두고 도망가지 않어. 자식하구 당신 놓고 도망 안 가. 내 새끼 남의 여편네 구박받게 하고 살겄어? 나 싫어” 그랬어요.

가 딸한테 여자라도 돈 벌려면 간호과 가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농업 거기 간다고 하는 걸. 지금은 그래요. “엄마 그래도 내가 이만치라도 허는 게 엄마가 간호과 선택하라고 해서 다행이야.” 그래서 한참 웃기도 했어요. 우리 딸 보면 가끔 나 때문에 결혼 않는 것 같아 미안해요. 같이 살아보믄 둘이 다툴 때가 있어요. 그게 싫은 거에요. 부모들은 다 그런 마음인거에요. 그래도 나한테 참 잘해줘요. 같이 자구, 밥두 같이 먹구, 울기도 하고 좋긴 좋아요. 같이 사니까 좋더라고요. 여기서 내다만 봐요. 쓰레기나 버리러 가고. 얘네들(강아지와 고양이) 있어서 싸우구, 놀구 그래요.

남편과 시아버지 병수발을 평생 해 오신 어머니는 미처 자신의 몸이 병든 지도 모르고 사셨습니다. 이제는 딸과 함께 사니 식단도 조절해가며 아옹다옹 살지만 내심 딸의 결혼이 늦어져 또 다시 걱정입니다. 어머니, 사시는 동안 걱정 같은 것 하지 마시고 이제 당신 인생과 몸만 신경 쓰면서 편하게 사십시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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