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지역 파리장서운동, 민족운동사의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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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지역 파리장서운동, 민족운동사의 쾌거
  • 충남대 교수·매헌연구원 김상기 원장
  • 승인 2018.09.0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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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10>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 영남지역의 유생들은 호서지역에서도 파리에 보낼 장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영남지역의 유생들이 호서본과 비교검토하기 위해 자신들이 작성한 장서를 홍성지역으로 보내 교정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파리강화회의로 가는 대표자인 김창숙 선생이 일정보다 앞당겨 상하이로 출발을 해야 했는데 교정본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포괄적인 영남본을 상하이로 가져갔다. 파리장서를 받은 상하이 임시정부는 파리에 있던 김규식에게 장서를 전달했다. 호서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3·1운동 서북·경기 천주교 지도자 주도 호서·영남 유학자 주도
파리강화회의 독립 기회로 이용… 김복한 중심 독자적 장서운동
일본이 강제 병탄… 한국 독립 국가 다스릴 능력 충분 독립요구
독립 위해 서양 이용… 척사론의 원리주의적인 이념체계의 극복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3·1운동은 서북지역이나 경기 일대에서는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지도자들이 주도한 면이 있다면, 호서지역과 영남 지역과 같이 유생층이 두터운 지역에서는 유학자들이 주도한 특징이 나타난다. 이들 유학자들이 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 서명하지 못했다. 영남과 호서지역의 유학자들은 이를 원통해했으며,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를 대한 독립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경북 지역에서는 김창숙 등 곽종석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호서지역에서는 홍주의병장 김복한을 중심으로 서로 독자적인 장서운동(長書運動)을 전개했다.

1910년 국망 후 죄인을 자처하면서 자정(自靖)의 생활을 하던 김복한(1860-1924)은 건강마저 악화돼 만세시위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의 ‘시해’ 소식과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고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강화회의를 개최하고 있음을 전해 듣고, 의병의 동지들과 연명해 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했다. 김복한은 장서를 작성한 후 의병의 동지들을 찾아가 서명을 받았다. 임한주를 찾아가 광무황제가 죽음을 당하는 흉변을 만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무꾼이나 몸 파는 여자까지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는데 우리가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파리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호소하고 대한 유민(大韓 遺民)의 원통함을 호소하자고 했다. 임한주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김복한은 이어서 청양의 안병찬과 김덕진, 홍성의 최중식, 전양진, 이길성, 황택성, 서산의 김상무, 김봉제, 보령의 유호근과 신직선, 김지정 등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김복한의 제자 황일성은 서명에 참가는 안했으나 비용 일체를 조달하였다.

홍성에 건립돼 있는 파리장서 기념비. 홍성군은 파리장서운동을 기리기 위해 홍성읍 동문로 입구 도심배후 주차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김복한은 서명을 받은 후 황일성, 이영규, 전용학 등을 서울로 보내 임경호와 협의해 만국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의 파리로 장서를 보내도록 했다. 그런데 임경호가 서울에서 장서를 받고 출국을 준비하던 중에 김창숙을 만나게 됐다. 이들은 호서, 영남 유림의 계획과 목적이 같음을 알게 됐다. 이에 따라 양 지역 유림의 장서운동은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장서의 내용을 비교 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영남본의 뜻이 잘 갖추어지고 분명하다고 하여 영남본을 취했다.

김창숙은 파리장서 영남본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김창숙은 상해에서 이를 임시정부 요인들과 일부 문구를 수정한 후 영문으로 번역해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보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했다. 파리에 보낸 장서에는 자주독립사상이 잘 나타난다. 장서에서는 일본이 거짓으로 한국을 강제 병탄하였다면서 한국이 독립 국가를 다스릴 능력이 충분하다며 독립을 요구했다.

김복한이 작성한 호서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김복한의 행장에 요지만이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호서본의 장서에는 1)일제가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어긴 죄, 2)고종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 3)모든 백성이 이를 분통해 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킨 일, 4)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조선왕조를 회복하려 한다는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영남본과 호서본은 차이가 존재함을 볼 수 있다. 호서본에서는 일제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어긴 죄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또한 명성황후와 고종을 시해한 죄를 묻고 있다. 영남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어 호서본과는 이념적인 차이를 보인다.

파리장서운동이 일제에 알려진 것은 1919년 4월초였다. 호서지역 서명자들은 6월 초부터 체포되기 시작했다. 1919년 6월초 홍성경찰서 순사부장이 김복한을 압송하려고 찾아왔으나 이를 거부했다. 임한주, 안병찬, 최중식, 전양진, 김덕진 등이 6월초 압송됐다. 김복한에 대해 궐석재판을 했다. 이 재판에서 그는 같이 재판을 받은 이들 중에서 가장 중형인 집행유예 없는 징역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호서지역의 파리장서 운동을 주도했던 김복한 선생. 1차 세계대전 직후 승전국들은 전후질서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회의를 열었다. 유학자들은 파리강화회의를 독립의 기회로 여기고 호서지역과 영남지역에서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했다. 파리장서운동이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를 보내는 운동이다. 호서지역은 김복한 선생이 주도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문서를 작성했다.

한편 김복한은 파리에 장서를 보낸 일로 화서학파의 일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유중교의 문하인 신태구는 김복한에게 글을 보내 이에 대해 질정을 구했다. 김복한은 주자강목의 예를 들어 회신했다. 즉 오랑캐인 거란과 돌궐이 주(周)와 수(隋)를 공격한 것은 ‘입구(入寇)’라고 써야 마땅하나, 천금공주와 북한의 요청으로 침공한 것이라고 하여 주자가 이를 ‘벌(伐)’이라고 써 포상했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제를 구축하기 위해 서양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서운동이 비록 ‘정례’는 아니나 주자의 강목에 따른 ‘변례’로써 강목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은 일제를 토벌해 원수를 갚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급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결정이었다고 했다.

임한주 역시 명의 숭정제가 이자성 휘하의 반군에 북경이 점령당했을 때 오삼주가 청군의 원조를 받아 이자성 군을 물리친 일을 들면서 ‘이를 어찌 죄라 할 것인가’라면서 김복한을 변호했다. 그는 더 나아가 “차라리 서양 오랑캐에게 망할지언정 원수인 왜의 백성은 결단코 원치 않는다”며 반일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이 호서지역 유림들은 영남지역에서 추진한 장서운동에 연합해 하나의 통합된 장서운동을 전개했다. 비록 서양제국에 협조를 요청한 일로 화서학파의 일부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는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서양을 이용하고자 한 방략이었다.

따라서 호서지역 파리장서운동은 척사론의 원리주의적인 이념체계의 극복을 시도한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또한 영남과 호서라는 지역적 차이는 물론 충청도의 노론 계열과 경상도의 남인 계열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호서와 영남지역 유림의 장서운동의 통합은 민족운동사에서 일대 쾌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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