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자 될 때까지 고생 엄청나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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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자 될 때까지 고생 엄청나게 했지”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9.1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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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13>
김광운 1939년생으로 은하면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서울로 상경했다가 형님이 돌아가시면서 귀향, 건축일을 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

님이 1985년에 돌아가시면서 어머님이 혼자 계시니 그래서 내려왔슈. 서울서 잘 살았으믄 솔직헌 얘기루 안 내려왔쥬. 우리 집 식구가 싫다고 허는데 애들 데리고 와서 그냥저냥 살유, 귀향이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쥬. 객지생활 한 30년 했거든? 5·16 터지고 올라갔지. 혼저. 

울 처음 올라가서 고생 많이 했쥬. 말하면 뭣혀. 처음에 을지로 갔지. 별 거 다했쥬. 밥 한 그릇 10원씩 허대. 하루에 40원 주는데 일요일 한 달에 한 번 놀아. 노는 날은 안 따져 줘. 극장 구경 헐 것두 읎슈. 아침에 밥도 싼 데서 먹구, 목욕비, 극장비도 못해유. 밥이 싸서 그러나 배고프고 그래유. 그 때 짜장이 6, 7원 했을겨. 아침에 그걸 먹는거지. 섬유계통 쉐타 짜는 일 했슈. 일본말로 요꼬라고 하고 그 때는 잘 나갔어유. 기술자 될 때까지 고생 엄청나게 했지. 오일 파동 나고 안 되더라구. 장사도 해보고 쉐타 떼다가 도매상에 팔기도 하고 영등포 시장 불나기 전에 남대문 대도백화점 거기도 한 2년 있었슈. 쉐타 짰지. 시경 앞인디 거기두 불나구.

기거는 공장에서 잤지. 기숙사도 아녀. 창고 같은 2층에서 기계 밑에 그런데서 잤지. 이불은 갖고 와야지. 옷두 내가 알아서 빨아 입고 세탁기가 있나 뭐가 있나. 그 땐 다 그랬슈. 기술자 되기가 2~3년 걸리고 참 어려워유. 처음에는 심부름 허구 기술 배울라믄 뭐라 해싸구. 가르치지도 안 혀. 갠신히 배웠슈. 밤에 일 끝나믄 어떤 사람이 쪼끔씩 가르쳐주고 그 땐 그걸 배우고 싶었어. 근디 기술자 되니까 아무 때나 일해 달라고 허네. 쉐타 보믄 다 알어. 예를 들어 백화점 파는 쉐타 있잖어. 백화점 주인허구 우리가 보구서 딱 적어 갔구 와서 샘플을 내. 그래 시장에 내. 그 눔이 히트 치면 돈 들어오고. 지금은 쉐타 별로 안 입대? 다 짠 거 입고 천을 재단해서 댓마루로 짜니 알뜰허게 짜.

내가 기술자 된 다음에 취직도 많이 시켜줬슈. 그 때 먹고 살 게 있간유? 쉐뜨기라고 쉐타 만드는 사람, 실 감는 사람들두 있구 그러니 취직 시켜줬지. 그런데 잘 된 사람도 있구 다시 내려가는 사람도 있고. 그 때 기술자 돼서 한 집에 갔는데 사장 아버지가 교장이여. 사장이 아들이고. 공장이 쪼끄만 허유. 그 아들이 허는 얘기가 자기 아버지 교장 월급보다 낫다고 허대유. 근디 그것두 사시사철 그런 게 아니구 몇 달 동안만 그래유. 월급제도 아니구 일 허는데로 받어유. 물건이 잘 나가믄 잘 팔리잖유. 그 때는 관찮어. 요즘은 수출 허니께 사시사철 계속 허다가 기계를 사 가지고 집에서 시작을 했지. 살림집에서 했지. 기계 4대 놓구 허다가 나중에 12대까지 했지. 고생 바가지로 했슈. 쉐타 장사, 아이스크림 장사, 우유 배달, 파란만장 했쥬. 애들도 내가 다 짜 입히기도 허구, 시골 갖고 와서 보따리 장사 하는 사람 주기도 허구.  

러다가 서울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 근디 잊혀지질 안 혀. 지금두. 편 가여. 일 허는데 아줌마가 자꾸 남이섬 놀러가자구 셋이. 근디 그 때 내가 못 갔어. 가고 싶은데 으떡허다 일 때문에 못 갔어. 그 여자는 은근히 허더라구. 나만 좋아했는디. 그 때 전차를 타고 다녔는디 학생표 그 때 3원인가 했어. 버스표 다 사잖유? 서울승합인디 다 학생인 줄 알유. 전차를 탔는데 차표를 지가 내더라구. 신촌 연세대 앞에 그 아가씨가 살았슈. 내가 따라갔어. 근디 자기 집으로 안 가고 작은 아버지 집으로 가. 작은 아버지가 나와. 허는 말이 사람이 집을 하나 짓더라도 기초를 튼튼히 하고 벽돌 한 장씩 잘 너어야 허구 설계를 잘해야 허구 사람이 잘 살라믄 그것두 확고하게 내 신분도 밝히고 그렇게 해야 허지 않는냐 그려. 그래서 그렇다구. 그러다가 영장 나와서 으떻게 허다가 말았어. 짝사랑이지, 고백도 못 허구. 밥은 더러 먹었지만 꽃 한 번 못 사줬네. 나중에 흑석동 여자를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께 같은 김 씨여. 안 된다고 허더라구. 처음 그 여자는 지금두 생각이 나유. 그 여자가 나를 싫어하고 그런 눈치는 읎었거든? 어디가 잘 살았으믄 좋겠더라구. 누나가 중매해서 1978년에 결혼했지. 갈산 사람이여. 후회 읎어. 아들 셋 낳고 잘 허유. 난 어디 가서 집사람 찾을 때믄 내 꺼 어딨슈 그래.

울서 세를 숱허게 돌아다녔슈. 총각 때. 결혼허구두 그래. 우리 집 식구가 그래 질렸어. 그러커구서 살다보니께 이렇게선 안 되겠다 싶어 신림동 서울대 쪽 초가집, 거기다 집을 쪼끄만 거 샀어. 내가 뭐 개뿔 있어야지. 판자집 쬐끄만 걸 샀어. 더구나 시유지여. 결혼허구서 글루 이사 갔는디 세 안 나가니 얼매나 좋아. 전기는 있었는데 물은 공동수도서 길어다 먹구, 그런 시절이었어. 지금 여기 와서 그냥저냥 밥 먹구 살아유. 50대, 60대 요 때는 잘 벌었쥬. 읎으니까 처음 와서는 무지 어려웠슈. 건축 기술 설비 같은 거 하믄 재미있어유. 일은 재미가 있어야 하거든. 처음 와서는 다방도 했어유. 사람 두고. 서울서두 마지막에 보일러 설비 일을 했어유. 근디 홍성에 오니 플랜카드 붙이고 하드라구. 보일러도 지가 많이 놨슈. 집도 더러 짓구. 자격증 읎는 사람 못허게 하드라구. 그래 자격증을 땄어유. 보일러 시공, 열 관리, 가스 설비, 한문 자격증 땄지유. 여기서 그런 거 읎으면 일 못허유. 공부 내가 엄청 했지. 그 때는 새마을 보일러였지. 물 끓여서 방 도는 거. 옛날에는 연탄 때다가 그 다음에 새마을보일러, 기름보일러는 아주 난중에 나왔지. 물이 자동으로 끓여서 모터 안 달아도 돌아유. 지금은 읎쥬. 아들도 건축허는데 도와달라 해서 살살 하는겨. 홍성중학교 앞에 목조주택 사무실 냈슈. 참 내가 아들 얘기 좀 해야겠다.

아주 속 징그럽게 썩였슈. 둘째 아들. 갸가 서울서 초등핵교 다니다가 일루 와서 홍고에 합격을 했슈. 얼매나 좋아유. 홍고 여기서 많이 떨어지고 몇 사람 안 됐슈. 교련복 사 주고 뭐 다 해줬는디 학교 갔는디 배울 게 읎대유. 선생을 밟고 올라설라 그래유. 카세트 음악 틀어놓고 노래허구 춤 추고. 학교에서 연락이 왔슈. 자퇴하라구. 내가 참, 그렇게 좋은 학교 들어가서 나는 배우지도 못허구 그랬는데. 그래 해라. 자퇴 아니면 퇴학하라고 그러는디 워떡혀. 분명히 아침에 핵교 갔는디 맨 마지막 가는데가 오락실이여. 그러더니 결국 자퇴하고 홍주고를 들어갔어. 내가 그 때 홍북 문화마을에서 집을 몇 채 졌슈. 걔가 왔다갔다 허구 같이 했슈. 근디 일을 안 혀. 조금 허는 체 허더니 나 보고 돈 좀 달래. 줬더니 오토바이를 사드라구. 좋은 오토바이는 군에서 한 두 대 밖에 읎었슈. 막 쌩하고 가는 거 있잖유. 그걸 끌고 왔슈. 나중에 구항면사무소 가는데서 포크레인하고 박치기를 했슈. 은하면직원이 술 먹어서 개울가에 빠졌어. 포크레인으로 뺀다고 길을 다 막았슈. 이쪽서 얘가 홍성서 쌩하고 오는디 틀었을 것 아녀? 고대로 논 위로 떨어졌슈. 내가 그 때 소방대장 할 때여. 대장님 죽은 거 같다구. 근디 면 직원이 날 붙잡고 놔야지. 아들 죽었는데 병원 먼저 가야잖어? 근디 날 붙잡고 파출소 글로 가는겨. 얘기 좀 잘해달라고. 모가지 떨어진다고. 에휴. 나하고 잘 아는 사람이여. 워떡혀. 거기부터 갔네. 한 마디만 해주고 가라고 해서. 병원 갔더니 안 죽고 멀쩡혀. 젊은 새끼라 뛰어내렸데. 다 죽었다 했거든? 긁히고 뭐 그런데는 있는데 괜찮여. 정신 차리고 살더니 지금은 잘 혀.

국전쟁 때 내가 11살 먹었는데 그 전에 어른들 허는 얘기가 있어. 내가 못 먹어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먹을 꺼니 과수나무를 심어놔야 한다구. 전쟁 터져도 산 사람은 살 거 아녀. 그래서 우리 아들들헌테 이따금 그런 야기 혀. 누가 먹어도 심어는 놔야 헌다구. 늦모 심을 때 참 어려웠어. 내동 넘어갈 때 그 동네서 피난을 일루 왔어. 여기 사람은 딴 데루 가구. 넘의 동네 가면 모르잖어. 그 때 애들허구 총알 가지구 놀았지. 총알하구 총알 껍데기 주어다가 화약 넣어서 딱 던지면 팍 터져. 무서운 것도 몰랐어. 인민군들이 가면서 주먹밥 한 덩어리씩 주면 왜 그렇게 맛있대유? 맨 깡보리밥만 먹다가 쌀 들어가고 짭짤해서 그런가벼.

요새는 농사도 많이 져유. 한 3000평. 애들이 도와주고 우리 집 식구가 도와주고. 의용소방대장도 허구 바르게살기위원회도 허구 몇 십 개 될껴. 그 전에 내무부장관 상도 타구. 도지사 상도 타구 읎는게 읎슈.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큰 힘이 아버님을 그 모진 세월 동안 버티어 온 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온갖 고생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우리나라 근대화를 일구는 숨은 일꾼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직도 부인 사랑이 끔직해 내 꺼라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을 보며 아버님, 어머님 모두 건강하시기를 두 손 모아 간절하게 바래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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