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학이편, 인간다운 삶의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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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학이편, 인간다운 삶의 실현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0.1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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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아카데미
사진 출처= https://image.baidu.com

공자의 핵심 사상이 인(仁) 곧 ‘사람다움의 구현’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공자는 바로 이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성패(成敗)의 수가 객관적으로 이미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도 노나라의 정치를 쇄신하려 했고 그 일이 실패해 14년간의 천하 유력을 떠났다. 훗날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반추하며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15세 무렵에 사람다운 사람의 위용을 봤다. 그 후 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30세가 됐을 때 그것을 이뤄 자타가 인정하는 위치에 섰다. 40대에는 어떤 유혹이 닥쳐도 인간다움을 이뤄야겠다는 애초의 뜻이 흔들리지 않게 됐고, 50대 무렵에는 그것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절대 명령임을 깨달았다.”

바로 그의 나이 50대에 공자는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개혁하다 실패해 풍찬노숙이 기다리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향해 떠났던 것이다. ‘학이편’은 이러한 공자의 의지가 분명하게 표현된 장이다. 이 ‘학이편’은 공자가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원의 교칙에 해당하는 것이다. 신화적 존재 혹은 절대 도덕적 존재가 아닌 ‘인간’ 공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장이다. 그 중 제1장은 공문의 학칙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공자의 평생에 걸친 지론이 농축돼 있다.
먼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에 대해 보자. ‘학’을 무엇인가를 보고 배운다거나 어떤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새기면 문장의 함의를 정확하게 전달받을 수 없다. 요즘 우리 주위에 ‘인성교육’을 강조해 인성을 도덕(사회적 권력)에 맞게 개조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가치 척도가 한 가지 밖에 없는 독재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순종적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인성을 개조하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욱이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인성 교육의 전거로서 공자의 사상을 들곤 하는데 이것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공자는 그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함의는 이렇다. 어린 새가 어미 새가 되기 위해 둥지에서 날개 짓을 열심히 한다. 어린 새는 아직 새라고 불리기 어렵다. 새가 되기 위해서는 새의 형체는 물론 새가 지니고 있는 소질과 재능을 모두 발휘해야 한다. 어떤 것이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게 요구되는 구조와 기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처음에 어린 새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어미 새(새)가 되어 간다. 그때 느끼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될 수 있는 소질은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지만 사람이 되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다.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근기를 극복하려면 필히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문제는 그 과정이 매우 고단하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이 고단함을 감내하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마침내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 인정받고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는다면 그때 느끼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학이편 제1장의 ‘학이시습지’는 바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의 마음과 자세, 그리고 보람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학’은 읽고 느끼고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행위, 곧 사람다움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포함한다. 곧 ‘학’과 ‘습’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학습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공자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사람다움’에 있으니 이 사람다움을 깨달아 이루는 것이 사람됨의 도리라고 했다. 이러한 노력의 전체 과정을 학습의 요체로 봤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말하는 인성 교육과는 전혀 다른 학습관이다. 실제 공자는 ‘교육’이라는 말을 강조하지도 않았고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교육이 행해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교재가 있어야 하고 가르치는 선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자 당시에는 이에 대한 교재도 없었고 이것을 가르치는 선생도 없었다. 교육의 수혜도 귀족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 이때 귀족들이 받은 교육의 주요 내용은 효(孝)와 제(悌) 같은 것이었다. 효와 제를 실천해야 사회가 통합돼 나라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사회는 농업을 주요한 생산수단으로 하던 사회였다. 효와 제는 사회 안정에 필요한 덕목의 필수 조건이었고, 그 덕목을 수행하는 것은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곧 천명(天命)을 항구적으로 지키는 길이었다. ‘孝悌=修德=受命=사회안정’이라는 매카니즘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사람이 되는 길은 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고 스스로 깨달아서 그것을 익히는 데에 있는 것일 뿐 사회적 권력을 내면화시키는 강제적 수단(교육)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인성이 바로 선다면 그때 가르치는 사람의 도덕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능한 인성 교육 강사가 도덕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공자조차도 차마 허여(許與)하지 않았던 성인(聖人)만이 이룰 수 있는 경지다. 사람이 되는 것은 교육이라는 외적 수단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알아서 깨닫고 부단히 연마하는 과정(學習)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로 교육이 강조된 것은 전제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던 시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논어나 맹자에서는 가르침과 스승의 권위가 강조되지 않았다. ‘교(敎)’라는 말이 빈출(頻出)하는 것은 ‘사(師)’의 권위가 강조되는 전국시대 말기부터다. 이때 관리를 스승으로 삼는다(以吏爲師)는 말이 널리 유행했다. 사람들을 전제 군주나 법(法)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한 법가(法家)계통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바로 인성교육이다.

다음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에 대해 보자.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내 주위에 그런 데 관심을 둔 사람이 없다면 사람이 되려는 나의 노력은 매우 고단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근무하는 부서의 사람들이 형식과 절차만을 고려하고 국민을 위한 행정 서비스에는 무감각하다고 해 보자. 그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부서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형식과 절차에 맞게 처리해도 누구 하나 비난하는 사람이 없는데 왜 굳이 맞춤형 서비스를 고집하느냐며 비아냥거릴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맞춤형 서비스야말로 공무원이 가져할 할 첫 번째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새로운 부서장으로 취임해 왔다. 그 동안 나는 동지(同志)를 만나지 못해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고 내가 하는 일은 모든 이에게 어리석은 일로 간주됐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평가해 주며 함께 가자며 다독이는 사람이 부서장으로 왔다. 이때 내가 느끼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승진이나 근무평점을 떠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즐거움이 될 것이다. ‘학이시습지’에서의 ‘열(說)’이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희열이라면, ‘유방자원방래’에서 오는 ‘낙(樂)’은 밖에서부터 오는 즐거움이다. 학이편 제1장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붕(朋)’은 친구라기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붕’은 고기덩어리(肉) 두 개가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른바 컴퍼니(company)라는 말이 있다. 라틴어의 콤-파니오(com-panio)에서 온 말인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같은 뜻과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붕’인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붕당(朋黨)이요 붕우(朋友)이다.

다음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척 서운하다. 나는 누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행동을 비웃거나 곁눈질로 엿보다 비아냥거린다. 그때 주위에서 나의 이러한 노력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이러한 뜻을 지닌 것이 바로 이 문장이다. 사실 사람이 되려는 것은 나의 의지고 그런 마음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그런 뜻이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알기 때문에 기뻐하지만 남은 모르기 때문에 무관심하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남을 비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나와 생각·지식가치관·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하면 나도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이런 경우에는 상대가 나의 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아닌가? 남을 비난하거나 서운해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군자(君子)의 ‘군(君)’은 회초리를 들고(尹) 무언가 말을 하는(口) 사람이고 ‘자(子)’는 요즘말로 하면 ‘미스터(Mr)’라는 뜻이다. 군자라는 말은 군(君)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를 테면 ‘나으리’라는 뜻이다. 공자, 맹자, 순자라면 공 선생, 맹 선생, 순 선생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공자는 귀족 출신이 아니다. 그는 사(士) 출신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술직 공무원 혹은 사무관 이하의 하위직 공무원이다. 그런 신분의 사람이 사무관 이상의 직에게 요구되는 것을 익히려 했다면 이는 반역이요 모반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살던 시대는 기존의 질서는 이미 무너진 반면 새로운 질서는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다.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학습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연히 공자에서는 군자라는 말의 함의도 예전처럼 법(신분)적으로 정해진 지배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공자가 추구했던 인간다움에 맞게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변화됐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비로소 인간다운 세상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공자는 정치의 본질이나 기능·효과 등에는 무관심했다. 공자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에게 있어 정치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공자가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인간다움의 구현 때문이었다. 그런 한 군자는 인간다움을 체득하고 정치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해석될 것이다.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데에는 정치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인간다움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말한 곳이 바로 ‘학이편’이다.

정리하면, 학이편 제1장은 공문의 교칙으로서 인간다움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공문의 제1 과제임을 주장한 곳이다. 논어는 공자와 공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공자가 평생 하고자 했던 것이 인간다움의 구현, 인간다운 세상의 건설이었다면 그것을 집약한 것이 논어의 맨 앞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억측이지만 논어의 편집자들은 이 점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논어의 맨 앞에 이 장을 넣었던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이 된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나의 이러한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못내 서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이러한 마음과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먼 곳에서 찾아와 함께 그 길을 걷자고 한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나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노력은 나만이 아는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라서 남들은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 이때 그 이치를 알고 서운해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야말로 사람다운 사람(‘君子’)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논어 ’학이편‘ 제1장의 취지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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