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러거나 말거나 악착같이 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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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거나 말거나 악착같이 했슈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11.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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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20>
신인순 1937년생으로 예산군에서 태어나 스물다섯 살에 윤복중(왼쪽) 씨와 결혼했다. 40대 무렵에 홍동면 금평리로 이사를 와서 억척스럽게 살아 지금은 금평리가 고향이다.

산군 대술 거께서 우리 언니가 사는디 언니가 중매해서 글루 스물다섯 살에 시집갔어. 우리 엄마가 미신을 많이 익혀 가지구 스물다섯 살 먹어 시집가야 고생 안한다고 해 보냈대유. 저 양반은 스물아홉이구. 저 양반은 읎은께 장가를 못 들구. 우리 오빠는 내가 농사를 처녀적 부터 졌슈. 군인가는 바람에 그 때만 해도 3년인가 4년 군인 생활 하잖어. 나하고 둘이 농사짓는데 오빠가 군대 간 사이 논을 서마지기 샀어. 그런데 우리 오빠가 고생했다구 시골로 안 보낸다구 예산서 가게 보는 둘째 아들인데 거기를 얘기했어. 나는 국민핵교도 안 나왔는디 가게 보면 이걸 다 해야잖어. 그래 거기루 안 간다고 했지. 돌아다니며 장사헌다구 나는 살림허믄 고생 덜할 것 같아 그렇게 했더니 우리 오빠가 반대를 하는 겨. 결국 내가 좋다고 해서 왔지 뭐. 그래 와 본께 뭐가 있어? 암것두 읎지. 시어머니, 동생 내외 조카가 넷 있지. 거길루 들어갔는데 그 때만 해도 여간 어려웠슈. 생일 날 밥 허러 나오니께 우리 시어머니가 찹쌀허구 팥 넣어서 밥을 하라는데 수수, 보리, 쌀 여러 가지 섞인 걸 가마에 퍼 주드라구. 난 친정서 쌀밥만 먹었는디 잡곡밥을 허덜 안 혔어. 쌀만 허니께. 그랬는디 잡곡밥 내놓고 하라는데 세상에 난감하더라구. 그러더니 밥을 갠신히 앉혀서 끓이는디 무수를 그 위에 넣으랴. 에구 으떡혀. 그래도 설지 않게 밥은 했나벼. 우리 형님이 반찬을 차려노니께 주걱 가지고 오더라구. 식구가 여섯 식구, 일곱 식구껜 애들 조금 싹 갈겨서 주느라구. 배부르게 못 먹어. 그것두. 나는 시아즈버니허구 입 들고 으떻게 밥 먹어? 시월 열여섯 날 잊어 먹지두 않어.

시집 갔는디 부엌에 앉아 혼저 먹었지. 집에서는 밥을 저렇게는 안했는디 체허지도 않어. 그게 또 그렇게 맛있어. 결국은 재금 나야겠더라구. 저 이 보구 눈치만 보는거여. 읎는 집에 왔은께. 동네 사는 오빠가 아침에 왔드라구. 시어머니 사촌형님네서 방앗간 했었슈. 방앗간 와서 3년을 살고 난 식모로 살라구 하더라구. 그러믄 집을 마련해준다구. 그런디 시어머니는 얼른 대답허지. 좋아서. 근데 저 이는 대답을 안 하더라구. 내 저기를 들어야하잖어. 내가 그랬어. 여기 정 읎으믄 거길 가지 말고 당신은 머슴을 3년 살고 나는 식모를 3년 살자 했지. 근디 그것두 대답 안 혀. 그러믄 동네 그 전에는 방 얻으믄 거저 줬잖어. 방을 하나 얻으라구. 시어머니는 신랑은 의사여. 거기 웃방을 얻어 살라는겨. 그러믄 나는 밥을 저기 부엌에 갖다줘야 죽이라도 써 먹을겨 아녀. 저 이 보구 왜 꼭 거기를 가야 되느냐구. 아는 형님이 우리 집으로 오라구. 사랑방이랑 부엌도 따로 있은께 오라구 하더라구. 거기가 마음에 들더라구. 그렇잖어? 밥은 각각 해먹어야지. 한 솥에 하믄 얼매나 저기 혀. 시어머니가 자기 말 안 듣고 글루 갔다고 결국 내가 거기 가게 됐는데 등 너머 사이야. 우리 친정허구. 우리 이질들이 있었어. 우리 동네 이사간다고 쪼그만 것들이 2학년 3학년 됐을껴. 그것들이 왔어. 이삿짐을 들어서 가지고 가라구. 우리 시어머니가 옛날에 욕도 별 욕을 다 혀. 고것들 보구 그 소리를 했어. 외할매한테 이것들이 조잘조잘 했네? 우리 오빠가 내 말한대로 가면 고생 않고 사는데 읎는데 가서 고생헌다구 엄마 보고서만 또 뭐라 허네? 내가 우리 올케 언니를 잘 뒀어. 뭐뭐도 안 해준다고 우리 오빠가 술 먹고 목매달아 죽는다고 산으로 올라가더라구. 내가 오빠, 나는 내가 좋아서 가니께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후회 안 할테니까 나 가는 동안 맘 편케 보내달라구 그랬지. 니가 정 그렇다면 가라. 그런 바람에 악착같이 살았슈. 저이도 나도 지독허게 한께 부엌 1칸, 방 1칸 마련하게 되더라구. 우리 사촌 형님이 자네 저기 뭣허면 방 한칸, 부엌 한 칸 나오니 그리 살면 으떡컸나 하더라구. 가격에 비해 돈이 조금 부족하더라구. 저이가 금반지 해준 거 약혼반지 팔구 그렇게 해서 이사를 왔어. 그렇게 둘이 맞벌이 하니 조근조근 일어나더라구.

리 이질 언니가 요기서 살어. 논도 많고 밭도 많고 그런디 집은 그냥 살고 밭 같은 거 쪼끔 도와주고 살랴. 저이는 방앗간에 일 데녔지. 기술 있기 때문에. 형부한테 간다고 했지. 그래 이사 와서 여기서도 다섯 번 이사 다녔어. 여기가 열 번째야. 그래도 애들이 속 안 썩이는 바람에 우리 먹구 살 거는 다 해놨어. 처음엔 농사 한 3년 하는데 저이가 예산서 살 때 적금을 들었는데 일을 안 다니고 농사만 지니께 그걸 못 치르잖어. 그래 파했지. 농사짓다가 나는 도라지 장사니 뭐든 다 했어. 이 동네는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해유. 이전부터. 도라지 한 밭짜리 캐내 팔면 또 한 밭 허구. 꾸러미 몇 꾸러미 그렇게 해서 돈 뫼았지. 한 집은 그렇게 해서 돈 뫼어 서울에 집 사서 나갔어. 채소 같은 거 경운기로 실어다 주면 그거 팔고 홍성장 가서. 그 놈 팔아서 버스로 오고. 4~5시 새벽에 나가고 동네가 다 그런 장사허니께 여기 다했슈. 장날은 경운기 너 대가 갔슈. 찬거리가 많아 가지구 경운기 읎는 사람은 경운기 두 대도 타구 그래도 그 눔 다 팔렸응께. 예산 장사꾼들이 와서 우리덜 꺼 까지 다 사갔응께. 그 때 진짜 장사 잘 했슈. 그 전에 짐자전거에 빵을 싣고 가게마다 다 돌려 주드라구. 저녁에 수금해오면 그래 돈이 어지간히 되더라구. 저 이하구 결혼하고 이내 큰 애가 들어섰어. 밥을 못 먹구 그냥 드러눴는데 저 이가 고구빵을 가져왔어. 동그랗고 요만한 거 있어. 달고 맛있더라구. 그거 먹으니까 구미가 당기더라구. 그거 먹구 입맛 잡아서 먹었지. 저 이는 기술 있으니 방앗간도 다니고 예산 국수에도 다니구. 난 그 때 밭 쪼끔 있어서 집이서 농사 져가며 애들이랑 살았지. 저이가 암 것두 읎는데 일루 이사 왔는디 인심도 좋구 인저 조록조록 늙어 가는겨. 길쌈도 얼매나 했다구. 모시 같은 거 막 빨리 허느라구 이웃이 할아버지가 그랬어. 인순이 아가씨는 아무데나 가서두 잘 살꺼라구. 왜유? 그러니까 벼 짜는 소리 들으면 재미난댜. 짤깍짤깍 헌다구.

들어도 재미났지. 애들이 속 안 썩이고 저 이가 속 안 썩이니 돈을 모으면 조록조록 모으믄 가재도구 사고 그런 게 재밌지. 힘들어서 저거 허구 그런 생각 읎었어. 제대로 허믄 농사 그게 재밌잖어. 논도 한 뙈기, 두 뙈기 살 때도 어려운 줄 몰르고 재미났어. 젊을 때 고생해서 넘만큼 부자는 안 돼도 우리덜 먹고 살고 애들 잘 사니 만족허지. 그 때만 해도 타관 아녀. 난 그게 싫어서 악착같이 살은거여. 타관에 와서 45년 정도 산거니 고향이나 마찬가지여. 누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악착같이 했슈. 

정서는 먹을 거 이것저것 실컷 먹었는디 시집 와서 뭐가 있슈? 그래 가지구 친정 생각이 나드라구. 저이 보구 나 친정 가서 뭐 좀 실컷 먹고 온다구 그러믄 가라구 혀. 가서 먹구는 그 때가 정월이여. 올라구 갔는데 이틀 있는데 저 이가 데리러 왔슈. 난 저이가 얼매나 보기 싫어. 겨울이니께 실컷 좀 먹고 며칠 있다 와도 되잖여. 우리 엄마가 흰 떡이고 뭐고 싸주는디 그 때만 해도 소리길이여. 산길. 산으로 오는데 내가 막 울어가매 왜 데릴러 오느냐구 당신 나 데려다 먹을 거 잘 못 맥이면서 나 친정서 실컷 먹구 올라는데 왜 그러느냐 허니께 처음엔 받아주더니 얼추 오니께 도루 가라는 겨. 저 이도 뿔대가 났지. 근데 또 가라고 허니 겁나대? 암 소리도 않구 그냥 왔슈. 그런디 먹을 게 잔뜩인디 쳐다봐도 땡기질 안혀. 집이서는 삼시세끼 밥도 제대로 목 먹잖여. 근디 그걸 보니 안 맥혀. 맘은 편치. 워쨌거나 내 식구 아니니 가라는겨. 얼매나 분하고 서운헌지.  

리농법 한 지 한 20년 됐지. 지금은 우렁이로 하지. 밥맛이 다른 게 아니라 먹는 사람도 무공해 선택하잖어. 그런께 여기는 쭉정이가 새파랗잖어. 딴데는 그게 빨간혀. 논이고 둑정이고 빨간혀고 벼만 살고 여기는 빨간데가 읎잖어. 안 받아들이는 사람 많았지. 처음엔 허는 사람 얼마 안 됐지. 벼 값이 비싸니까 일반 농사 지면 싸잖여. 우리는 일반벼 5만 원이라면 7만 원 받으니까 따른겨.  

예산에서 홍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타관이라 서러움도 많이 겪었지만 그래서 더 악착같이 살았다는 어머니는 이제 아무 걱정 없이 산다고 하십니다. 외출하는 아버님의 옷깃을 만져주는 어머니의 손길에는 같이 늙어가는 노부부의 아름답고 섬세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회로하십시오. <끝>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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