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지역3·1독립운동과 일농 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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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지역3·1독립운동과 일농 서승태
  • 김옥선 기자
  • 승인 2019.01.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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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슈-3·1독립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동아일보 1935년 11월 9일자 故 서승태 씨 홍학기념비 보도. 지난 3일 오후 5시경에 충남 광천 공립보통학교 교문 앞에서 광천공보교의 전신인 덕명학교 교주였던 故 서승태 씨의 홍학기념비 제막식이 있어 관민과 유지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는 내용이다.

박원식 등 주도 광천시장서 독립만세운동
서승태 1908년 덕명학교 설립 후진 양성


광천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7일 홍성읍 장터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한 것으로 시작, 3월 6일 광천리 박원식의 집에서 이명종이 박세화로부터 경성의 독립에 대한 상황과 조선독립을 주창하는 뜻을 기재한 선언서를 보고 박원식과 함께 행동할 것을 협의했다.

3월 8일에 박원식과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취지의 선언서를 종이에 써서 광천시장과 옹암리 두 곳에 게시해 지역 주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다수의 독립선언서를 각 가정에 배부할 것과 광천시장 장날을 이용해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선동해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후 잡화상을 경영하던 최응모, 제화점을 운영하던 오인섭, 농사일에 종사하던 성배호 등에게 이 계획을 상세히 전해 찬동을 얻었다. 이후 3월 16일에 서승태를 찾아가 선언서의 내용을 요약해줄 것을 부탁했다.

3월 18일 오인섭의 집에서 박세화, 이명종, 최응모, 오인섭 등이 선언서 510매를 복사해 이면종과 성배호 등은 이날 밤 독립선언서를 광천리와 옹암리 각 가정에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이명종, 최응모, 오인섭, 성배호, 서승태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명종은 징역 1년6월, 최응모와 성배호는 징역 1년, 오인섭은 징역 10월, 서승태는 징역 8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어 3월 21일에는 광천시장과 은하면 대천리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서승태의 자는 성삼(聖三), 호는 일농(逸農)이다. 연산서씨 출신으로 연산 5세조인 서련 제주판관의 13세손으로 1854년 광천읍 상정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민종식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 방면에서 홍주성을 향해 행군하는 것을 보고 당시 지방의 부호였던 박모의 창고를 허락도 없이 열어 창고 안 곡식을 군량미로 제공했다. 1908년부터 공립 홍주보통학교의 학무위원을 역임하면서 교육활동에 투신했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만회하는 길은 신문화를 배우는 것이라 생각해 1908년 상정리에 덕명학교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서승태의 교육열이 알려지면서 당시 기호홍학회 홍성지부에 의해 본 학회로 보고되면서 황성신문 1909년 3월 9일자에 소개되기도 했다. 1910년 7월에 있었던 제1회 졸업식에는 서홍모를 비롯해 8명이 졸업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놓이자 박창병, 서태석, 방철용, 이희홍과 졸업생 8명은 학부형회를 조직해 운영이 연장되고 6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다. 유능한 인재양성을 추구했던 덕명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후 광천읍 신진리에 광천보통학교가 일본인에 의해 세워지면서 덕명학교는 폐교됐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광천보통학교는 덕명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일농 선생의 뜻을 후세에 알리고자 홍학기념비를 세웠다. 1992년 국가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형목 연구원은 ‘한말 홍성지역 근대교육운동의 성격’에서 “을사늑약 이후 자강단체 지회도 조직됐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번천면국채보상기성회와 기호홍학회 홍성지회로 국채보상운동과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이 단체에 의해 주도됐다”며 “기호홍학회 지회원들의 3면1교제에 입각한 의무교육 시행을 계획한 이들의 노력으로 홍성지역 근대교육운동이 사실상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1914년 덕명학교 나무명패로 1914년 홍주에서 홍성으로 개명될 당시 만든 것으로 1915년 덕명공립보통학교로 통합 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왼쪽) 황성신문 1909년 3월 9일자 신문에 기록된 덕명보명. 충남 홍주군 궁경면(현 광천) 덕명학교는 서승태 씨가 독립설립해서 열심히 유치하는 중 박창병, 이충호, 서태석, 김병욱 등 여러 명이 찬성해 뜻을 함께했고 의연금을 내는 자가 많아 나날이 학생들이 증가하니 호서의 모범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내용이다.(사진 오른쪽)

을사늑약 직후까지 사립학교 설립은 전무했는데 1907년을 정점으로 변화됐다. 1908~1909년은 교육운동의 전성기로 대표적 교육기관이 홍명학교, 호명학교, 덕명학교, 광명학교 등이다. 이 학교들은 단순한 사립학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지역단위 근대교육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였다.  

기호홍학회는 기호지역 출신 인사들이 모여 1908년 1월에 창립됐다. 본부는 서울에 중앙회를 둔 반면 지방에는 지회를 설치해 계몽운동을 확산시키려 노력했다. 1909년 1월 16일 인가된 홍성지회 지회장은 서병태, 부회장은 김시원, 총무는 서승태, 평의원은 김교홍 외 10명이다.

박 연구원은 “일농 서승태는 내포지역을 대표하는 인물군에 속하며 3·1운동에는 직접 참여·지도하는 등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며 “그러나 기초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일농의 삶과 민족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향후 일농과 함께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홍성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필수적 요인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군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로 ‘1919 그날의 함성’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홍성지역 3·1운동유족회와 보훈단체를 비롯해 각 기관과 사회봉사단체, 문화예술단체 등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또한 만해생가 및 문학체험관에 만해와 3·1운동 100주년을 주제로 교육프로그램, 전시 계획, 기미독립선언 시비제작 등이 예정돼 있다. 이밖에도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 ‘금마·홍동·장곡·광천의 31운동’, ‘호서유림의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등 다양한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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