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덕 할매와 가래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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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덕 할매와 가래떡
  • 일러스트·글=김옥선 기자
  • 승인 2019.02.0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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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자의 짧은 소설

내 이름은 김순덕. 1942년생 청양에서 태어나 은하면 골짝으로 시집 온 게 스무 살이니 거의 60년이 되어 간다. 남편이라고 얼굴도 못 보고 시집 와서 아들 하나 달랑 낳아놓고 영감탱이는 일찍도 가버렸다. 촌에서 고생하지 말고 서울 가서 잘 살아보자던 영감은 사업을 한답시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말아먹고 술에 빠져 살더니 지 혼자 편하자고 눈 감아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 하나 있는 놈이 공부도 하기 싫다고 하고 먹고 살 길 막막해 다시 촌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한 뙈기 남아 있는 딸에 농사지으면 설마 밥 굶고 살까 싶었다. 큰돈은 못 모았어도 굶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 보면 용타. 나 살아온 것 얘기하면 오늘 밤 다 새도 모자라니 그만 할련다.
요즘 가장 큰 걱정은 아들 녀석 장가들이는 일이다. 공부는 못 했어도 성품 하나는 나를 쏙 뻬서 착하고 속이 깊은 놈인데 왜 장가를 못 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일모레면 오십인데 죽기 전에 며느리나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말이다. 다른 집은 외국에서 많이 데려와 아들딸 낳고 살더만 그도 싫다고 하니 우리 때처럼 얼굴도 안 보고 장가 가란 말도 못허구 속이 문드러지기 직전이다.

“어머니, 그만 좀 하고 여기 등 따숩게 지지고 누워 봐유.”
한시도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는 내 습관 탓에 아들 녀석이 하는 말이다.
“신경 쓰지 말어.”
“뭐 해도 다 필요 읎구먼. 뭘 그렇게 해 싼디유.”
“난중에 며느리 들어오면 집안 꼴이 깨깟해야지 너저분허면 누가 오겄냐?”
“난 나갈랄유.”
장가 얘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뒤꽁무니를 빼고 나가는 아들 녀석을 가시눈을 하고 째려봤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슈.”
“언니, 나유. 잘 지내유?”
20년 전에 아들 내외를 따라 서울로 간 동생이다. 동기간도 이제 다 죽고 동생과 나만 남았다. 오래 병상을 지키던 남편을 지난해 떠나보낸 동생은 마음이 편해서인지 종종 전화를 하곤 했다.
“뭐 그렇지.”
“승철이는 아직 여자 읎슈?”
“내가 알간?”
“언니 이번 설에 내가 갈까유?”
“어디? 여그? 집은 어쩌구?”
“내 맘이지 뭐. 애들도 나 읎으믄 더 편할걸?”
“나야 오믄 좋지.”

전화를 끊고 나니 이래저래 마음이 부산해졌다.
시집오기 전이었으니 열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아버지는 글 좀 읽는다고 집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어머니는 행상부터 농사일까지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덕분에 위 두 오빠들은 학교를 갔다. 나는 아직 어린 동생을 돌보는 일까지 맡았다. 어머니 대신 어린 동생을 업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했다.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도 내 몫이었다. 등에 업힌 동생이 칭얼대 밑으로 자꾸만 내려가는 동생의 엉덩이를 추켰다. 어느 해 설날 밑이었다. 다른 집은 방앗간을 분주하게 오가며 가래떡을 뽑아오느라 여기저기 하얀 김이 올라오는 풍경에 우리 집만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하얀했다. 그나마 불이 안 꺼지면 다행이었다. 동생은 배가 고픈지 손가락을 빨며 내 등에서 힘겹게 졸고 있었다. 드디어 멀리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다라이를 머리에서 내려놓으며 누런 삼베에 돌돌 만 하얀 가래떡을 내 손에 쥐어줬다. 나는 얼른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동생은 졸린 눈을 하면서도 내가 내민 가래떡을 꼭꼭 씹어 먹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서둘러 방앗간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면에 방앗간이 있었는데 10년 전 쯤 없어졌다. 그래서 광천까지 나가야 하니 번거로웠지만 동생 먹일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아따 이모 온다고 가래떡도 뽑아싸고, 울 엄니 신났네.”
“이놈아, 너 장가가는 게 제일 신나는 일인데 내 신날 일이 읎으니 이거라도 신나야 하지 않겄냐?”
“엄니는 으째 모든 일이 장가와 연관이 된대유?”
“지발 올해는 가라, 가.”
“난 뭐 안 가고 싶어 안 간대유? 여자가 있어야 가쥬?”
말을 더 이으면 내 입만 아프다. 여기 골짝엔 젊은 처자 보기 귀허니 읍내라도 나가 보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방앗간에 도착하니 생각만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허긴 요즘 누가 쌀을 불려 가래떡 뽑으러 오는가 말이다. 다 시장에서 파는 거 사 먹고 만다. 그래도 하얀 김 내며 나오는 가래떡만큼 맛난 것이 어디 있으랴. 아들 녀석도 따뜻하고 말랑한 가래떡 하나 손에 쥐어주믄 어릴 때부터 잘 먹었었다.
가래떡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자니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아들은 농기계 가게에 간다고 나가면서 끝나면 전화하란다. 깜박 잠이 들었고 꿈을 꿨다.
사방이 지천으로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멀리 까르르 웃는 아이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 남자가 어떤 여자의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노는 모습이 보인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인다. 이내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머니’하고 부른다. 오매, 환장하겄네. 내 새끼도 몰라보고 내가 미쳐부렸지. 손자 녀석을 끌어안고 ‘오매 내 새끼’하며 울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든다.

“할머니, 웬 잠을 그리 깊게 자유. 떡 다 됐슈.”
말라 있던 입가의 침을 소맷부리로 쓰윽 닦으며 일어났다. 내 오죽허면 꿈에서도 며느리를 보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부아가 치민다. 이내 고개를 흔들며 보니 뽀얀허니 하얀 가래떡이 늘씬한 몸을 뽐내며 길게 누워있다. 가래떡을 뚝 잘라 입에 넣으니 말캉하고 쫀득하니 맛나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런 것을 맛있다고 느끼며 먹는 것을 보면 아직 살 날이 더 남은 것 같다.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방앗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에게 가래떡을 손에 쥐어줬다.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아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열 살 아들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떡을 들고 돌아서는 아들의 모습에 괜히 맘이 짠허다. 오늘만큼은 장가의 장자도 꺼내지 말자고 마음을 다 잡는다.

동생이 오기로 한 날이다. 전날부터 푹 고아낸 사골 국물을 다시 아궁이에 앉힌다. 부엌을 개량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오래 푹 끓이는 음식을 할 때는 아궁이만한 것이 없어 아직 치우지 않고 사용한다. 가마솥 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전도 지진다. 아들이 좋아하는 생선전과 동생이 좋아하는 배추전이다. 핏물을 빼놓은 갈비도 압력솥에 앉혀 불을 켰다. 아들이 홍성역으로 동생을 데리러 나갔다. 매번 아들과 둘이 보내는 명절이 내심 아쉬웠던 터라 명절에 시간 내 오는 동생이 반갑기만 하다. 명절에는 뭐니 해도 사람이 집에 북적거리는 것이 최고다. 아이 웃음소리, 윷가락 던지는 소리, 고소한 전 냄새가 퍼지는 날이 아니던가. 그런데 늘 아들과 둘이 보내려니 넘 보기도 부끄럽고 너무 조용해 다가오는 명절이 싫기만 했던 것이다.
오늘따라 겨울 햇살이 따쑵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옷을 다 벗은 나무에는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건만 꿈에서 본 진달래와 개나리가 눈에 어른거리며 다가오는 봄에 또 다시 주책없이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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