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된 충청도 유일의 반교마을
상태바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된 충청도 유일의 반교마을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한지윤 기자
  • 승인 2019.05.25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돌담길의 재발견<2>
부여 외산면 반교마을은 밭 등에서 골라낸 돌로 돌담을 쌓게 된 원인이다.

반교마을 돌담, 마을 주변 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석 막돌 사용
담의 폭은 하부 90cm 정도로 넓고, 위로는 좁아져 상부 폭 60cm 정도
돌담 축조방식 하부에 폭이 큰 지대석 두 줄, 위로 규격이 작은 돌 사용
마을의 좁은 고샅길, 옛 정취 풍기는 구불구불한 돌담길 관광상품 개발


마을 중심부에 우물가와 빨래터가 남아 있는 가난하지만 인심이 넘치도록 남아 있는 옛 농촌마을의 전형이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마을 이야기다. 반교천과 아미산 사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작은 산촌마을이다. 이 마을의 진산(鎭山)인 아미산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데, 여기에 얽힌 설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옛날 어느 효자 부부가 부친의 건강 회복을 위하여 하나뿐인 아들 아미를 삶았다는 이야기가 그것. 효자 부부가 아미산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는 아미를 몰래 ‘납치’해 가마솥에 넣고 불을 지폈더니, 한참 뒤 아들이 사립문을 열고 “엄마” 하고 뛰어 들어왔단다. 놀라서 솥뚜껑을 열어보니 솥 안에는 아이 대신 아이만 한 산삼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1687년 나주 정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이 마을은 옛날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골, 돌이 많아서 돌팍골이라고도 불렸으며, 널판을 다리로 쓰는 마을이라 해서 ‘판교’라고 불리다가 다리가 많다고 해서 ‘반교’로 변한 지명이 자리를 잡았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는 돌로 담을 쌓은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됐다. 충청도에서는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된 마을은 이곳 부여 외산면의 반교마을이 유일하게 하나뿐이라고 한다.

반교마을의 돌담은 마을 주변의 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석 막돌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호박돌이라고도 함)을 사용해 담장을 쌓은 것이다. 담의 폭은 대개 하부가 90cm 정도로 넓고, 위로 가면서 조금씩 좁아져 상부의 폭은 60cm 정도가 되는 담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담은 ‘상후하박(上厚下薄)’의 형태로 안정감이 있으며, 담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1.5~2m 내외가 많다. 돌담의 축조방식은 하부에 제법 폭이 큰 지대석을 두 줄로 놓고 그 위로 가느다랗고 규격이 작은 돌을 사용해 쌓았다. 담의 중앙에는 흙과 주먹돌로 속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쌓았다. 이 마을의 돌담은 주택의 외곽에 쌓았음은 물론 밭의 경계에도 쌓았는데, 주택의 돌담이 지붕 처마가 닿을 정도로 높은데 반해, 밭의 돌담은 2~3단 정도로 낮게 축조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밤나무가 많은 땅에는 돌이 많다고 한다. 밤나무는 비옥하고 물이 잘 빠지는 땅에서 잘 자라는데 땅에 돌이 많으면 배수가 잘 되기 때문이다. 이곳 반교마을에는 밤나무가 많다고 한다. 돌도 많다. 마주 보이는 산을 봐도 ‘흙 반 돌 반’이다.
 

반교마을청년회장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휴휴당’ 전경.

■ 충청도의 유일한 돌담길 문화재마을
돌담이 있는 마을은 경사 높은 산사면 또는 깊은 골짜기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반교마을도 이러한 유형이다. 마을에 들어서자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개천 등에도 돌이 천지다. 때문에 이 마을도 밭 등에서 골라낸 돌로 돌담을 쌓게 된 원인이다. 집과 돌담 사이의 간격이 좁거나 아예 바깥 벽 쪽에는 겉면에 돌담으로 한 켜를 덧쌓았다. 돌담의 높이도 지붕처마에 닿을 정도로 높은 편이다. 경사진 땅에 집을 짓기 전 돌을 깔아 수평을 잡은 모습도 더러 눈에 띈다. 척박한 땅에서 돌을 골라내 여러 용도로 쓴 개척자들의 노력과 수고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담장을 돌만으로 쌓은 것도 있고 돌과 흙을 같이 쌓은 담도 눈에 띈다. 한번 허물어진 적이 있는지 부분적으로는 시멘트가 발라진 돌담도 보인다.

박물관에 전시된 신석기, 구석기 유물의 경우 보는 이로 하여금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을 때리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현장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돌담길에서는 살아있는 삶의 흔적이랄까.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산촌의 돌담에서 아득하면서도 생생한 전시를 보는 듯하다.

반교마을 돌담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건성쌓기 또는 메쌓기라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말처럼 건성건성 쌓은 듯 보이지만 나름의 방법과 규칙이 있다는 의미다. 큰 돌을 지대석으로 사용해 두 줄을 깔고 점점 작은 돌을 쌓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담의 가운데로는 자잘한 돌과 흙 등을 넣어 속을 채워 빈 공간을 메우는 방식도 규칙적이다. 물론 돌의 양에 따라 담의 높이와 길이는 다양하다. 이 마을의 돌담도 전체 길이로 치자면 2㎞는 족히 될 것이라는 게 마을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돌의 근원이 궁금해 졌다. 이 마을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부여군의 서북쪽 산지의 특징이 암괴류와 암괴원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차령산맥은 충북에서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낮은 맥을 유지하다가 서해바다에 이르기 직전에 높아지는데 이 지점이 반교마을과 가깝다. 충청도의 유일한 돌담길 문화재가 이곳에 있는 이유와도 상통하는 대목이다.

반교마을의 돌담은 현재도 꾸준한 관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돌담길보존회를 구성했으며. 요즘도 직접 돌담을 쌓는다고 전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관리하는 이유지만 돌담을 보러오는 여행객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전직 문화재청장이자 이 마을의 청년회장인 유흥준 전 청장이 이 마을에 머물면서 반교마을은 유명세를 탔다는 설명이다. 5도2촌 생활을 권장하는 유 전 청장은 일주일에 이틀은 머문다는 ‘휴휴당(休休堂)’이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작은 사립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고, 장대 2개로 입구를 막아놓았다. 물론 담장은 돌로 쌓았고 집은 돌과 흙으로 쌓았다. 지붕은 한옥 기와를 얹었다.

이쪽은 파란지붕, 저쪽은 반교3교, 저기는 마늘밭…. 돌담과 함께 각인된 곳곳의 풍경이 돌담길을 따라 교차되면서 마을의 모습이 쉽게 그려진다. 물론 녹음이 자꾸 짙어지는 계절이니 만큼 마을 전체를 한 눈에 넣기는 무리다. 돌담길 사이로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빈말이라도 ‘돌담 무얼 볼게 있다구…’라고 혼잣말처럼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모른다. 돌담길을 걷다보니 그 정겨웠던 모습이 어느 순간 회상되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마을의 좁은 고샅길과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구불구불한 돌담길이 어느 새 세월의 간극을 뛰어 넘어 관광상품으로 개발돼 관광상품으로 뜨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