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참선의 ‘마음정토’ 만해, 현실참여 ‘현실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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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참선의 ‘마음정토’ 만해, 현실참여 ‘현실정토’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5.2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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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8>
예산 덕숭산에 있는 만공 선사의 부도 ‘만공탑’.

덕숭산 수덕사는 근대의 선풍을 일으킨 경허와 만공 스님의 활동무대
만공탑 ‘세계일화(世界一花)’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문구 새겨져
만해 1910년대 ‘조선불교유신론’서 ‘승려 대처론’ 주장, 유숙원과 재혼
만해, 일본의 불교정책에 맞서 비타협으로 승려생활을 한 만공을 존경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은 명찰 수덕사를 품고 있다. 덕숭산의 수덕사는 근대 선풍을 일으킨 경허와 만공 스님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을 오르는 길에는 만공 스님의 사리 무덤인 ‘만공탑’이 있다. 만공이 1946년 76세로 입전한 뒤 제자인 박중은 선사가 설계해 1947년 세운 우리나라 처음의 현대식 부도이다. 불교의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받침대 위에 불·법·승 삼보를 뜻하는 삼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법호인 만공(萬空)과 법명인 월면(月面)을 상징하는 둥근 공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았다. 전체로는 앉아서 참선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크기도 산세와 절벽 크기에 비하면 우람하지도 않아 보기에 아담하다. 탑 이름도 한글로 ‘만공탑’이라고 세로로 쓴 글씨가 친근하다. 만공탑 뒷면에는 가로로 ‘세계일화(世界一花)’와 세로로 ‘백초시불모(百草是佛母)’,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이란 “천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러한 의미를 더 깊게 하는 것은 수덕사 주지를 역임한 옹산스님은 만공선사의 항일운동을 조명하는 저서 ‘만공’을 지난 2017년 11월 발간했다. 여기서도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이라는 의미의 중심에 만공이 있었다면 만공은 이 지역의 백야 김좌진 장군, 매헌 윤봉길 의사와 만나 교류한 적이 있으며, 만해 한용운 선사를 통해 항일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공에게 김좌진과 윤봉길은 구국의 일념이 같았고, 만해는 동시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한 도반이자 동지였다. 그래서 만공은 만해의 거처인 성북동 심우장을 자주 찾아 불교와 조국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 만공과 만해, 일제강점기 불교·조국독립 추구
그렇다면 만공과 만해에게 ‘천사(千思)’는 무엇이었고 ‘일행(一行)’은 무엇이었을까. 만공이 동지적인 유대감으로 만해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불교계 독립운동은 축소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불교계의 중론이다. 만공과 만해가 추구한 정신과 실천한 행동은 불교 독립운동이었다. 순응과 아부, 변절과 배신이 횡행하던 일제강점기 불교와 조국의 독립을 추구했던 만공과 만해, 이들은 해방을 전후해서 세상을 떠났다. 1944년 만해를 먼저 떠나보낸 만공은 수덕사에 주석하며 더 이상 서울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사상적 짝꿍이었던 만공과 만해에겐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13도 도지사들과 조선불교 31본산 주지들이 참가했다고 한다. 당시 공주 마곡사 주지였던 만공도 이 회의에 참석했다. 미나미 총독이 일본의 도움으로 승려들이 도성출입을 할 수 있게 됐고,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총독이 사찰령을 선포하고 은혜를 베풀었다면서 조선불교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일본불교와 조선불교가 통합해 진흥책을 수립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려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친일 주지들이 아부를 하며 맞장구를 칠 때 만공스님이 일어서서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해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전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그리해 전 승려로 하여금 일본 불교를 본받게 해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해 부처님의 계율을 파계한 불교에 큰 죄악을 입힌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이 고통을 받아야 함이 당연한데 어찌해 공이 크다고 하는가. 우리 조선불교는 일천오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하거늘 일본불교와 합해 잘될 필요가 없으며, 정부에서 간섭을 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하는 것이 옳다.”고 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회의는 어수선하게 끝났다고 한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만공은 선학원으로 가서 만해를 만났다.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만해가 “잘했다. 사자후여! 한 번 할을 하매 그들의 간담이 떨어지게 했구나. 비록 한 번 할을 한 것도 좋기는 하지만, 방망이를 휘둘러 때려주고 나오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하거늘, 만공이 크게 웃으며 “차나 한잔 드세,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영리한 사자는 할을 쓰느니” 만공은 사자가 되고 만해는 곰이 되어 버린 꼴이다.

그런데 만해가 즉각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라고 응대했다고 한다. 만공은 새끼 사자가 되고 만해는 큰 사자가 되어버린 셈인데, 누가 사자이고 누가 곰이며, 누가 새끼 사자이고 누가 큰 사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일화 속에는 당대 두 고승의 막힘없는 관계와 조선불교의 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로 동지이며 도반이었던 만공 송월면 선사<사진 왼쪽>, 만해 한용운 선사<사진 오른쪽>.

■ 만공과 만해, 일본총독부에 큰 소리 쳐
만해는 당시의 이야기를 1938년에 발행한 ‘불광(佛光)’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작년 2월 26일에 조선총독부 내에 31본산 주지들을 회동시키고, 총독 이하 관계 관헌이 열석한 중에 각 본산 주지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조선불교 진흥책에 대한 요지를 들었다. 공주 마곡사 주지 송만공 화상의 순서가 되었을 때 화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정본연(淸淨本然)커늘 운하홀생(云何忽生) 산하대지(山河大地)리오’하고 대성(大聲)으로 할을 하였다. 선기법봉(禪氣法鋒)의 쾌한(快漢)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의리로 이해할지라도 그 좌석 그 시기에 가장 적당한 대답이다.”

만해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어느 날 31본산 주지회의의 요청에 따라 강연을 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만해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묻고는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 하겠지요.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 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그런데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그건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고 한다.

만공은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주지를 지냈다. 이때는 우가키 총독의 ‘심전개발운동’과 미나미 총독의 황민화정책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으며, 조선불교 31 본사 주지들이 대부분 일본의 불교 정책에 동조하던 시기였다. 그 무렵 만공은 31 본산 주지회의를 틈타 총독을 죽이려고 몰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만해는 “이제 그놈들도 끝장이야. 얼마 안가서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거요. 그때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형을 받을 것이니 이제 죽을 날 받아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서 칼을 빼앗았다고 한다.

만공은 미나미 총독 앞에서는 대처를 인정한 데라우치 총독이 무간아비지옥에서 떨어졌을 거라면서 일제 총독부의 조선 불교정책을 비판했다. 하지만 일찍이 만해가 1910년대 ‘조선불교유신론’을 써서 ‘승려 대처론’을 주장하고, 1933년 55살 때 36살 된 간호사 유숙원과 재혼했어도 서울의 심우장을 찾곤 했다고 전해진다.

만해도 만공의 현실에 대한 대응과 실천은 좀 어설퍼 보였어도 경허 스님의 제자로 조선불교의 중흥조였으며, 일본의 불교정책에 맞서 비타협으로 승려생활을 하고 있던 만공을 존경해 만공이 있던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를 자주 찾곤 했다고 전해진다.

만해가 유숙원과 재혼해 낳은 딸인 한영숙은 “송만공 스님 같은 분들께서 오시면 약주상을 가운데 두고 허심탄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지새우며 환담을 나누시던 일들이 환히 떠오른다”고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를 회고했다.

만공은 1942년 스승인 경허스님의 문집인 ‘경허집’을 만들면서 만해에게 서문을, 그리고 방한암 스님에게는 행장기를 쓰게 했다. 만해는 서문에서 “경허 스님은 육신을 초탈해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마음대로 자재하며 유유자적했다”고 썼다.

만공은 늘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 데 꼭 하나와 반이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바로 만해를 가리키는데, 반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만해가 돌아간 뒤 만공은 ‘이제 서울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는 서울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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