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읍성, 왜 복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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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 왜 복원해야 하는가?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5.3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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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1>
홍주성 남문 성벽.

충남 서북부지역의 중심이자 서해안 행정·국방의 중심지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홍주읍성 복원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는 등 홍성군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4년 정비기본계획이 수립돼 장기적인 복원·정비계획을 통해 추진한 홍주읍성 복원사업이, 이후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거쳐 다양한 학술적 성과를 거뒀음에도 이를 종합적으로 반영한 장·단기적 로드맵이 없어 이에 대한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또 사업추진의 실현가능성을 높여 홍주읍성 복원·정비사업의 내실을 기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14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의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를 1단계 사업 기간으로 설정해 △토지 및 건축물 매입 지속 추진 △2015년까지 여장 및 편의시설 도입 △2015~2017년 북문지 복원△ 2018~2019년 서문지복원과 서벽해체 보수 등을 추진하는 안이 제시됐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2단계 장기사업으로는 여장복원, 객사복원, 군청 이전과 동헌 복원, KT 이전 계획 검토와 진영복원, 홍주성내 시설물 2차 발굴조사 등이 장기과제로 제시됐다. 또한 군청과 KT사옥 등 현실적으로 이전이 쉽지 않은 홍주성내 건물들에 대해, 군청의 경우 한옥형태의 신축 건물 건립, KT사옥의 경우 더블스킨 적용, 미디어 파사드 설치, 벽화제작 등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정비 대안 등이 제시돼 눈길을 끌었다. 이밖에 향후 홍주읍성의 체계적인 개발과 복원, 문화재 경관 등을 살릴 수 있도록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홍주읍성 경관형성기준’을 마련하자는 안이 건의되기도 했다. 사적 제231호인 홍주읍성은 지난 2004년부터 정비계획이 수립돼, 현재까지 홍주성역사관 건립, 옥사건립, 남문복원 등의 사업이 완료됐으며, 현재 발굴조사를 통해 북문지 복원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 일제, 홍주지명 바꿔 홍주의 맥 끊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홍성의 옛 이름은 ‘홍주’였다. 홍주와 공주의 일본식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홍주’를 ‘홍성’으로 바꿨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홍주의병 등 그 어느 지역보다 항일의식이 높았던 지역의 특성을 희석시키고자 일제가 지명을 강제로 바꿨다는 것에 설득력이 더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홍주의병과 홍주성 전투에서 일진일퇴의 곤혹을 치른 것에 앙심을 품고 홍주의 맥을 끊기 위해 홍주의 지명을 홍성으로 바꾸고 동헌을 가로막아 청사를 지었다. 또한 주산인 백월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쇠말뚝은 제거했으나 군청사와 ‘홍주’라는 지명은 되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명된 ‘홍성’이란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과거의 아픈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과거 홍주는 고려시대부터 서해안권의 행정·교통의 중심지로서 번성했으며 고종 32년인 1895년에는 현재의 평택부터 서천에 이르는 22개 군현을 관할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서는 “홍주는 호서의 거읍(巨邑)이고 그 땅이 넓고 기름지며, 그 백성이 번성하여 난치(難治)의 고을로 불려 왔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홍주(홍성)는 자타가 공인하는 충절의 고장일 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예술인을 배출한 곳이다. 청산리 전투에 빛나는 백야 김좌진 장군과 3·1독립운동 민족대표인 만해 한용운 선사를 비롯해 102년의 시차를 두고 한 곳에서 태어난 고려 말 충신인 최영 장군과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 선생, 노론의 영수로 후일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남당 한원진, 홍주의병을 이끈 지산 김복한 등이 대표적인 충절의 인물에 속한다. 문화예술인들로서는 민족시인 한용운, 판소리의 시조 최선달, 한국무용을 집대성한 한성준, 한국 근대화단의 거목 고암 이응노 화백 등이 있다. 이러한 땅 홍주의 홍주읍성, 관아의 출입문인 ‘홍주아문’과 동헌인 ‘안회당’, 홍주목사가 휴식을 취했다는 ‘여하정’ 등 3개의 건축물이 현존하고 있다. 일제는 강점기 당시 홍주읍성의 성곽을 부수며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동문인 조양문마저 철폐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군민들이 들고 일어나 결국 조양문을 지켜낼 수 있었고, 성곽도 완전히 훼손되는 것을 막아냈다. 홍주성은 전체 1772m 중 현재까지 약 800여m가 남아 천년역사도시의 면모를 지켜주고 있다. 홍성군에서는 오는 2024년까지 예정으로 홍주읍성 복원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더디기만 하다. 홍주읍성 복원은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암울했던 이 땅의 근현대사를 극복해 가는 일이기도 하다. 홍성은 현재 2012년 말 충남도청 등 충남의 주요 행정기관이 이전해 오면서 충남도청소재지로 인구 10만 명을 넘어섰다. 홍주성복원사업과 맞물려 현재 홍주읍성 내 문화재구역에 거주중인 주민들과 함께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해 찬란한 천년 홍주 역사의 창조적 복원과 함께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오롯한 천년역사의 역사문화유산인 홍주읍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이며, 복원 이후에는 또 어떻게 활용하고 보전할 것인지가 최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홍주읍성 전경.

■ 홍주읍성, 1451년 새로 수축한 기록
홍주읍성은 처음 축조된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시대까지도 개축기록은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의 둘레가 533보2척이며,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춰 수축했을 때, 홍주읍성도 1451년에 새로 수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 4856척, 높이 11척이며,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높이는 2척으로 608개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적대 24개 중 6개, 문 4개 중 1개가 옹성(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이 없으며 성안에는 우물 두 곳이 있고, 본래 홍성천·월계천 등이 있어 해자(성 밖에 둘러 판 못)는 굳이 파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현종 때 한계수가 중수했고, 1824년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조양문·경의문·망화문·관영을 지었는데, 이중 조양문은 홍주읍성의 동문이며 홍주의 관문이었다.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 정면 3칸의 문루로서 흥선대원군이 편액 친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재의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된 것이다. 이렇듯 홍주읍성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이세영·채광묵·안병찬 등이 이듬해 5월 19일 1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홍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해 예산의 덕산으로 퇴각시키고 점령한 전투로 유명하다. 문종 때 성문이 4개 있었고,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성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남문이 최근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문지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 문루석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복원했다. 현재 남문은 ‘홍화문’이란 편액을 달았다. 홍주읍성은 구한말 고종 때 대대적인 수리를 한 성곽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읍 터로써의 큰 변동이 없었다. 홍주읍성은 조선시대 초 새로운 축성격식에 의한 축성성곽이라는 점에서도 연구와 보존의 가치가 크다 하겠다. 여기에 더해 홍주읍성과 홍주천주교 순교사, 홍주의병사, 동학 등은 오롯한 홍주의 정신이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홍주성의 역사와 문화는 곧 시대정신인 것이다. 여기에 홍주읍성 복원의 이유가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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