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지방 왜구방어 축성, 결성읍성 원형 복원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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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지방 왜구방어 축성, 결성읍성 원형 복원 필요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6.0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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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2>
결성읍성의 성돌.

결성읍성 복원계획, 2008년 용역의뢰 10여년의 세월만 흘러
결성읍성 옹성, 치, 해자, 수로 등 읍성의 시설 고스란히 남아
1400년 석당산성으로 읍치 옮긴 후 51년만에 결성읍성 완축
“성은 석축으로 쌓았고 성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돼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산28-2 일원에 위치한 결성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서해안을 통해 침범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행정·교통의 중심지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홍성군은 조선시대 발간된 여지도, 해동지도 등 총 5개의 고지도와 고 문헌의 고증을 통해 확인된 결성읍성을 원형 복원할 계획을 밝힌바 있다. 이러한 계획은 지난 2008년부터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해 진행돼 왔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성(結城)’이란 명칭은 1172(명종 2)년에 개명됐는데 1397(태조 2)년에 결성면 금곡리 원금곡마을의 신금성으로 읍치를 이전했고, 1400(태종 1)년에는 석당산성으로 읍치를 이전 동헌과 객사 등을 창건했다. 결성읍성은 1451(문종 1)년에 축성을 마쳤다. 길이는 1550m로 양식은 포곡식 산성이며, 축조방법은 자연능선을 이용해 축조했다. 유적으로는 2개소의 문지, 5개소의 치성, 해자, 동헌, 책실, 형방청, 아문 등과 우물, 신당, 성황당, 회화나무 등이 있다. 면적은 16만3637㎡ 규모다. 결성읍성 복원은 토지 4만5333㎡와 민가 45동을 매입하고 결성초등학교와 결성주민자치센터 이전을 위한 보상을 하며, 성벽정비는 동문 복원과 옹성, 100m의 성벽복원, 서문 복원과 옹성, 50m의 성벽복원, 성벽 노출을 위한 잡목제거 등의 정비사업과 관아건물 정비와 편의시설 등을 갖춘다는 계획이다.

■ 문종 원년인 1451년 결성현성 축조돼
결성읍성을 알 수 있는 결성현에 대한 문헌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와 ‘문종실록’의 권10 문종원년 10월 갑오조에 ‘문종원년 10월 갑오일에 결성현성(結城縣城)’이 축조됐음이 기록돼 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등 제 지리지에 규모와 시설 등이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읍석성, 453보, 성안에 우물이 있으며 겨울과 여름에는 마른다”고 기록돼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은 석축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325척이며 성내에는 6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지’에도 “현의 성은 석축이며 3325척이고 성안에는 6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여지도서’에는 “둘레 3325척 8촌(寸), 높이 14척, 동서에 두 개의 문이 있고 서문에는 누각이 없다”고 했으며 ‘충청도읍지’나 ‘대동지지’ 등에도 “성은 석축으로 쌓았으며 성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읍성이 석축이며 성주(城周)가 453보였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이후의 지리지에는 모두 3325척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읍성(古邑城)인 석당산성(石堂山城)과 신금성(紳衿城)이 모두 토성(土城)임을 감안할 때 용척(用尺)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읍성을 다르게 표현한 듯하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1397년(태조 6년) 신금성으로 읍치(邑治)를 옮기고 1400년(태종즉위년)에 석당산성으로 읍치를 옮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신금성에서 3년 만에 바로 읍치를 산성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충청도읍지’의 기록에는 “둘레가 3325척 8촌으로 옛 산성을 도내(道內) 각 읍이 나눠 축성했다고 하고 있고, 산성을 개축해 읍성으로 삼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문종 원년인 1451년에 결성현성(結城縣城)이 축조됐다”고 한 것은 1400년에 석당산성으로 읍치를 옮긴 후 51년 만에 결성읍성이 완축(完築)됐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결성읍성의 둘레는 3325척, 높이는 9척, 우물 6개소이며 성문은 동문과 서문 2개의 문이 설치됐다. 동문의 문루는 1층이나 서문은 누각을 설치하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산성을 새로이 개축하면서 도내 각 읍이 나누어 축성할 때 구간마다 기각역축(記刻役築)해 나타냈다고 한다. 실제로 북쪽 성벽의 일부에 아산지역(牙山地域)의 축성구간을 표시한 기각(記刻)이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여지도서’에는 성체의 높이를 14척으로 기록하고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5척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여장 (女墻,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이 시설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볼 때 성체(城體)를 대대적으로 수리해 높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성읍성 고지도(1872).

■ 성곽 등 훼손 심해, 원형 복원해야
결성(結城)은 본래 백제의 결기현(結己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결성군(潔城郡)으로 고치고 신읍(新邑)ㆍ신량(新良) 등을 영현(領縣)으로 했다. 1018년(현종 9)운주(運州)에 속했고, 1172년(명종 2)결성(結城)으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뒀다. 1413년(태종 13) 현감을 뒀으며, 1733년(영조 9)보령(保寧)에 속했다가 1736년 복구해 현이 됐다. 1895년(고종 32) 홍주부 결성군, 1896년 충청남도 결성군이 됐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해 홍성군에 병합돼 홍성군 결성면이 됐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결성읍성은 옹성, 치, 해자, 수로 등 읍성의 대부분의 시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포곡식읍성의 해자는 발굴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산성에 해자가 제대로 남아 있는 사례는 거의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성읍성은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서해안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성곽이 위치한 석당산(높이 146m)은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고 험하지 않아 면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천수만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결성면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 역사적 중요 자료이다.

결성읍성은 결성면 읍내리에 주산인 석당산(石堂山, 146m)의 북쪽 기슭을 에워싼 포곡식 석축성으로, 1451년(조선 문종 1)에 완성하였다. 고려시기 결성현의 치소(治所)였던 석당산산성을 토대로 넓혀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둘레 1007m·안쪽 높이 2∼3m·바깥쪽 높이 3∼6m·아랫부분의 너비 약 4.5m이다. 산기슭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읍성의 동북벽은 파괴됐으나, 옹성 일부와 성벽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서쪽으로 배후산지를 두었기 때문에 동문이 정문인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았다. 성벽에서 13.5m 거리에 너비 6m 정도 되는 해자가 있다. 현재 성벽에는 남벽에 2개소, 서벽에 2개소, 그리고 동벽에 1개소의 치성이 있다. 이 중 서남쪽 모서리 암문 쪽의 사각형 치성은 옹성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쪽 성벽에는 옛 산성을 새로 개축할 때 각 읍에서 맡은 구간을 표시한 기록이 있다. 성벽의 바깥면 아래 부분은 해자(垓子)를 향해 경사지도록 흙을 덮었다. 축성 당시 성안에는 17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지방수령이 업무를 보던 결성동헌(충남문화재자료 306호), 치안을 담당하던 형방청, 문서를 보관하던 책실 등이 남았다. 현재 성 안에는 우물지가 6개소 있고, 조선시대의 기왓조각, 적갈색의 연질토기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이와 관련 홍성군의회 이선균 의원은 지난 2월 제257회 홍성군의회 임시회에서 5분 발언을 통해 “관리미비로 석재가 이탈되는 등 방치가 지속돼 성벽 관련 주요시설이 형태만 남고 훼손이 심각하다”며 우려를 표하면서 “결성읍성 성곽정비계획 수립은 결성면민에게 큰 자긍심”이라며 올바른 복안으로 △무너지고 훼손된 성곽을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 △결성읍성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토지소유권 정리 △결성읍성의 향후 운영방안의 로드맵 검토 △결성읍성 기초자료의 정확한 조사 등을 제시했다.

한편 신금성은 홍성군 결성면 금곡리에 있으며, 전체길이 645m, 높이 2~3m로 평지에 가깝게 축조됐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성의 길이 560m, 외성 235m이다. 지역집단을 통치하기 위해 만든 지방 읍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평지에만 쌓는 일은 드물고 대부분 산등성이를 뒤로 하고 평지를 바라보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삼국시대에는 읍성이 주로 산성(山城)의 형태를 띠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분지 형태의 평야에 사방으로 성을 쌓은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눈 읍성들이 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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