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미내다리, 조선시대 전라·충청도 잇는 중요 교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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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미내다리, 조선시대 전라·충청도 잇는 중요 교통로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7.0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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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2>
충남 논산시 채운면 강경천변에 있는 돌다리인 강경미내다리.

조선시대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도로상에 놓였던 돌다리
본래 평교(平橋)였던 것 3개의 홍예가 있는 돌다리로 다시 세워
하천을 미하(渼河)라 부르면서 다리이름 미내다리(渼奈橋)라 불려
“추석날 다리 일곱 번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 인연·사랑의 가교


강경미내다리는 논산시 채운면 삼거리 인근 강경천변에 설치돼 있다. 강경천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천변을 따라 1㎞쯤 올라가다 보면 뚝방 옆에 ‘미내다리’가 나온다. 이 미내다리는 조선시대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도로상에 놓였던 돌다리이다. 미내다리는 길이 30m, 너비 2.8m, 높이 4.5m로 건설 당시 삼남 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다리였다고 전해진다. 3개의 홍예(虹霓)는 가운데가 크고 남북 쪽이 약간 작으며, 받침은 긴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에 홍예석을 둘렀다. 가운데 홍예의 종석(宗石)은 다리 난간 쪽으로 돌출시켜 호랑이머리 모양을 조각했고, 북쪽 홍예의 정상에는 용머리를 새겼으나, 남쪽 정상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예전에 미내다리 앞에 있다가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진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에 의하면, 강경미내다리는 비문에 의하면 1731년(영조 7) 강경촌(강경·황산·여산)에 살던 석설산(石雪山)송만운(宋萬雲) 등이 주동이 돼 황산사람 유승업(柳承業)·중경원 설우(雪遇)·청원(淸元) 세 사람과 여산사람 강명달과 강지평 등이 공사에 진력해 공사를 시작한 지 1년이 못돼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본래 평교(平橋)였던 것을 3개의 홍예가 있는 돌다리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됐다.
 

충남 논산시 채운면 강경천변에 있는 돌다리인 강경미내다리.

■ 미내다리, 치석(治石)이 정교한 것 특징
미내다리가 놓여 있는 하천을 미하(渼河)라고 부른 데서 다리이름을 미내다리(渼奈橋)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미내’라는 승려가 시주를 받아서 만들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연유했다는 기록도 비문에 남아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전에 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고 해서 조암교(潮巖橋) 또는 미교(渼橋)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다리는 석재(돌)만을 사용한 3개의 아치형인 홍예(虹霓: 무지개모양)로 된 돌다리인데, 가운데 홍예가 가장 크고 남북 쪽의 것이 작은 것이 특징이다.

교량건축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교량은 평교였으나 수학적 계산과 역학적 구성, 예술적 토목 건축술의 종합적 공법으로 건설됐다”는 설명이다. 받침을 긴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에 홍예석을 둘렀으며, 가운데 홍예의 종석은 다리난간 쪽으로 돌출시켜 호랑이머리를 조각했다. 북쪽 홍예는 용머리를 새긴 종석이 있고 난간 경계석에는 여러 가지 꽃무늬를 새긴 듯하나 마멸이 심해 분간하기가 어렵다.

미내다리의 구조는 “3개의 홍예로써 가운데 부분이 제일 높고 크며 양쪽 홍예는 조금 작고 낮은 전형적인 홍예교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는 설명이다. 받침은 긴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돌려 만들었는데, 크기는 40cm×50cm×110cm 내외의 장대석이다. 홍예와 홍예사이의 간지에는 양쪽 보이는 면으로 35cm×150cm 정도의 장대석으로 잘 조화시켜 쌓았다. 다리 윗면에는 턱진 장대석을 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턱에 보도와의 경계석을 끼우도록 했다. 또한 미내다리는 치석(治石)이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다리 앞에는 커다란 암반이 있는데 여기에 원래 화강암제의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가 있었으나 파손이 심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미내다리는 조선시대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로서 그 의의가 있는 다리다.

■ 미내다리에 전해지는 슬픈 전설과 역사

충남 논산시 채운면 강경천변에 있는 돌다리인 강경미내다리.

호남선 철교 밑으로 길게 뻗어 있는 강경천 뚝방 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내다리는 자태를 드러낸다. 강경천 왼편으로 펼쳐진 광활한 평야(논)와 오른편으로 보이는 강경천이 넓고 길게 펼쳐져 있다. 마치 다리를 재건해서 보존해 놓은 것처럼 전혀 손상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미내다리 주변은 잔디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다. 미내다리 근처 강경천에는 목조다리가 놓여 져 있어 과거 미내다리의 역할과 기능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축조 연대와 축조자의 이름이 비문에 새겨져 있지만 이 다리를 두고 전해지는 슬픈 전설은 그 나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미내다리(유형문화재 제11호)의 전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미내다리는 강경의 대표적인 역사유적으로, 이 지역의 명물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강경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반영하듯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옛날 미내다리 부근의 개울에 다리가 없어 늘 아쉬움을 느끼던 이곳 사람들이 돈을 걷어 마을의 두 청년에게 다리를 놓게 시켰다. 다리를 다 놓고 보니 경비로 쓰고 남은 엽전이 얼마가량 남았다.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두 청년은 나중에 다리를 보수할 때 쓰기로 하고 남은 엽전을 모두 다리 밑에 묻어두었다. 그리고서 얼마 후에 한 사람이 우연히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지만 병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심해져만 갔다. 그러자 그의 다른 친구가 전에 묻어 두었던 엽전이 있음을 생각하고는 이것을 파내 친구의 병 치료에 쓰려고 다리 밑을 파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땅을 파도 엽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병든 친구는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만 갔고,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구렁이로 변했다. 그리고 집을 나온 구렁이는 미내다리 밑으로 스스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로부터 이상하게 이 다리는 점점 토사에 묻히게 되고 통행하는 사람들도 적어졌다. 그러고서 다시 상당한 세월이 지나게 되면서 미내다리는 거의 폐교(廢橋)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일부 주민들은 다리 돌을 마음대로 빼다가 집으로 가져가려고 까지 했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이 쳤다. 이에 겁에 질린 주민들이 다시 돌을 갖다 놓자 천둥이 그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미내다리 돌은 구렁이돌이라 하여 누구든 함부로 손을 대거나 훼손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정월 보름날 이 다리를 자기 나이만큼 왕래하면 그 해의 액운이 소멸된다고 하며, 추석날 이 다리를 일곱 번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미내다리는 이렇듯 인연과 사랑의 가교로 그려지고 있다. 계룡산과 대둔산의 품에 안겨 넓은 들을 가지고 있는 충남 논산은 백제 계백의 혼이 황산벌을 달리고 선비정신이 도도히 흐르는 충절과 예절의 고장으로 꼽힌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선비도 이 다리를 건넜을 것이고, 한양에서 유배를 당해 호남으로 떠나는 선비도 건넜을 것이다. 이렇듯 강경미내다리는 호남과 한양(서울)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명성을 간직하고 있다. 예로부터 강경지역은 강경천을 이용한 수로 교역으로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큰 냇가로 바다와 통하려면 강을 건너 배를 타야만 했는데,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 마을에서 돈을 거둬 자금을 마련하고, 두 청년에게 다리 공사를 맡겨 이 다리를 축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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