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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특집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만해 한용운 잠든 망우공원 유택… 근현대역사박물관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15>
서울 중랑구 망우공원 한용운 묘지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7.1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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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과 그의 부인 유숙원의 묘가 합장돼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

망우리 공동묘지, 40년 공동묘지 1973년 3월 신입 매장 중단
묘역단지 사이 아스팔트 포장 울창한 숲공원 젊은이들에 인기
만해 한용운 묘소 2012년 등록문화재 제519호 문화재청 등록
만해, 심우장서 66세로 열반 미아리화장터 다비 망우공원 안치


서울 중랑구에 있는 ‘망우공원’은 우리에게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서울시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 사이에 걸쳐 있는 ‘망우산(忘憂山)’에 조성돼 있는 공동묘지이기에 붙은 명칭이다. 망우산은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사후에 묻힐 장지 위치를 ‘건원릉’에 정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이 산의 언덕에서 ‘이제 오랜 근심을 잊게 됐다(忘憂)’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인근 지역의 지명도 ‘망우리’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태조 임금과 관련 있는 사연이 깃들어 있는 이 곳이 어떻게 공동묘지로 조성돼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일까. 이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급격한 발전과정과 함께 우리 근현대사의 단면들이 고스란히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1930년대 당시 조선의 수도 ‘경성’은 전국으로부터 인구가 몰려들면서 도시 군데군데에서 재개발이 이뤄졌다. 당시까지 경성부(京城府, 지금의 서울시청)에서는 이태원·신사리·홍제리·아현리·미아리 등지에 공동묘지를 조성해 망인(亡人)들을 모시게 했다. 하지만 자본의 대부분이 경성에 몰려 있던 1930년대에 경성으로 밀려드는 인구의 주거 난을 해결하기 위해 경성부는 이태원 공동묘지를 재개발해 주택을 공급할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에 이미 수용의 한계를 넘어섰던 미아리 공동묘지를 대체하기 위해 망우산 일대 247만 9000㎡(75만평)를 공동묘지 부지로 매입하고, 이 중 171만 9000㎡(52만평)를 공동묘지로 활용토록 했다. 이 때가 1933년의 일이었다. 이후부터 경성 사람들은 죽은 이후에 대부분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게 됐으며, 이미 다른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망인들도 망우리로 이장이 이어지면서 대규모 공동묘지가 형성됐다고 한다. 광복 이후, 1960년대에 망우리 공동묘지의 수용 여력이 현저하게 떨어지자 서울시는 경기도 벽제리(현 고양시 덕양구), 용미리(현 파주시 광탄면), 언주리(현 서울시 서초구) 등지에 대체 공동묘지를 마련했지만 이미 친족들이 모셔져 있기도 하고 접근이 비교적 가까운 망우리 공동묘지로의 쏠림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한가로웠던 망우리도 서울의 급격한 확장 물결 속에 포함돼 도시계획과 조경의 관리를 위해 1973년 3월에 신입 매장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40년간의 공동묘지로서 확대되던 추세를 멈추게 됐다. 1973년 4만여 기에 이르렀던 분묘가, 서울시가 꾸준히 펼친 무연고묘 정비, 유족들의 자원 이장, 납골 등으로 2009년에는 1만5000기로 줄었으며 2015년 말에는 8000여 기가 존치돼 있는 것으로 집계된 바 있다.

망우리공원이 한국 공동묘지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장지로서 한창 시민들이 찾을 당시에는 멀리서도 봉분이 보였다고 한다. 계단식 묘역에 봉분이 봉긋봉긋 보이는 가운데 장례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세대들에게는 무척 우울하고 비통한 장소로 잔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매장이 이뤄지지 않은지 40여년을 넘어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동안 이장해 간 묘역에는 나무를 심고 묘역단지 사이에는 아스팔트 포장을 해 이제는 울창한 숲의 공원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다.

■ 만해 한용운 묘소 문화재청에 등록돼

서울 중랑구 망우공원의 만해 한용운 묘소 입구 표지석.

기성세대가 ‘망우리’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공동묘지’의 부정적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망우리 공원’으로 명칭을 바꿨다가 ‘망우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역사학자였던 호암 문일평(1888∼1939년),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1899∼1931년),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인 오긍선(1879∼1963년), 서예가이며 언론인이자 독립유공자인 오세창(1864∼1953년), 독립유공자이자 의학자인 유상규(1897∼1936년),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설산 장덕수(1895∼1947년), 죽산 조봉암(1899∼1959년), 만해 한용운(1879∼1944년) 등의 묘가 있다. 이 중에서 만해 한용운의 묘소는 지난 2012년 10월에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문화재청에 등록됐다. 애국지사 여덟 명(이준, 손병희, 이시영, 안창호, 김창숙, 한용운, 신익희, 여운형)의 유택(幽宅)을 지난 2012년 10월에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로 등록했는데, 여기에 만해 한용운의 묘소가 포함됐던 것이다. 지난 2004년 현장 확인조사의 자료에 힘입었음은 물론이다.

만해 한용운은 열네 살 때 전정숙과 결혼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여기저기 방황하며, 속리산 법주사와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르다가 열여덟 살 때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당시는 신분이 처사이므로 절의 허드렛일을 하며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선(禪)을 닦았다. 그러다가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와 처가에서 2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 때 아내가 임신해 1904년 아들 보국이 태어났다. 26세 되던 해(1905년) 다시 집을 나와 설악산 백담사에 출가했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스님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와 교토 등을 돌며 신문물을 시찰하다 도쿄 조동종대학(고마자와대학)에서 6개월간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했다. 1910년 귀국해서 32세 나이로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다. 1911년 일제는 조선사찰령을 만들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 했다. 이에 만해는 석전 박한영 등과 전국 31본사 승려대회를 개최, 이를 규탄하고 무효화시켰다. 이때부터 총독부의 요주의 인물이 됐던 것이다. 그러자 만해는 블라디보스톡,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이때 일본 밀정으로 오인 받아 교포로부터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1913년 귀국해 불교의 현대화에 노력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 바람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내며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만해는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었다. 1933년 55세 때, 21세의 연하인 간호사 출신의 노처녀 유숙원과 재혼해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 살면서 딸 영숙을 낳았다. 만해는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6월 29일(음력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오랫동안 앓던 중풍 등으로 1944년 6월 29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렀던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조그마한 화장터에서 조촐하게 다비를 엄수했다. 이때 모두 소골(燒骨)이 됐으나 오직 치아만이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만해의 화장한 유골은 타지 않은 치아와 함께 서울 망우리의 공동묘지에 안치됐으며, 옆에는 1965년 사망한 부인 유숙원의 묘가 합장돼 있다.

현재 홍성의 홍주고등학교 뒤편에는 만해 한용운의 부모와 친형 부부의 가족묘소가 철조망 안에 갇혀있다. 서울 망우공원의 만해 한용운 묘소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고향인 홍성으로의 이장문제도 논의가 되고 있다. 만해의 외아들인 한보국은 1904년 홍주에서 태어나 1953년 월북, 1976년 73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 딸들 다섯 명에게 “통일이 되면 이 아들 대신 너희들이 조부님 묘소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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