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사상 선양의 열정이 담긴 곳,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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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사상 선양의 열정이 담긴 곳,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7.2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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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16>
만해기념관에 전시된 한용운의 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자료들.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1980년 성북구 심우장에 설치된 자료관에서 출발
소화(昭和) 글자 불태우고 “소화(昭和)를 소화(消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일제 황민화정책·창씨개명운동·조선인 학병출정 반대했던 북향집 심우장
만해 한용운의 호칭, ‘선사’로 통일해야 한다는 불교계의 입장이 정해져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유품과 자료가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남한산성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이다. 이곳은 ‘만해 사상 선양’이라는 전보삼 관장의 필생 원력이 담겨 있기도 하다. 만해기념관의 시작은 1980년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 설치된 자료관에서 출발한다. 전 관장은 당시 한양공고 야간부 교사로 재직하며 낮에는 만해 연구와 자료관 관리를, 밤에는 교편을 잡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으면서 전 관장은 만해 정신을 선양하는데 심우장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관광지로 이목이 집중되던 남한산성에 지금의 기념관을 지었다. 1990년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경기도의 남한산성으로 자리를 옮긴 자료관은 1997년 완공돼 기념관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갖추게 됐다. 이에 앞서 1995년에는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이 개관했고, 2006년에는 만해 한용운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도 만해 문학체험관이 문을 열었다. 전국 세 곳의 기념관에는 모두 전보삼 관장이 제공한 자료와 콘텐츠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만해기념관’이 있는 남한산성은 유서 깊은 곳이다. 백제 시조 온조대왕이 남한산성 위쪽 땅 하남 위례성에 새 도읍을 정했다. 지금도 남한산성에는 온조대왕 위패를 모신 사당 숭렬전이 있다. 이후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백제를 웅진으로 밀어내고 ‘중원’의 패권을 잡았다. 신라의 진흥왕도 세력을 키워 이곳을 영토 삼았으니, 남한산성은 예부터 역사의 굴곡과 인연이 깊은 땅이다.

■ 만해기념관에는 만해의 삶과 자료 소장
만해기념관의 연표에는 부친 한응준(韓應俊)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고향땅 홍주(충남 홍성)에서 한학에 정진하던 신동 한용운은 근대사 격랑의 소용돌이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돼 피나는 정진과 철저한 수련을 쌓았다. 스승 김연곡 스님의 도움으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을 읽고 세계정세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세계일주 여행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가 일진회로 오인을 받아 나라 없는 통안과 설움을 안고 고국 땅으로 돌아온다. 이후 일본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인간정신의 유신을 위해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탈고한다. 또한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방문 격려하는가 하면, 임제종운동을 통해 한·일불교조약을 분쇄한다. 한편 ‘한문독본(1912)’과 ‘불교대전(1914)’을 비롯해 ‘정선강의 채근담(1917)’을 차례로 내놓으면서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깨달음의 경지(悟道)를 체험하고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한용운은 ‘유심;惟心(1918)’이란 종합잡지를 창간했는데, 이것이 3·1독립운동의 전위지였다. 기미년 3·1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해 연설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자유, 평등, 평화의 대강령을 밝힌 장문의 독립선언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옥중에서 집필했다. 옥중에서는 투쟁 3대원칙(△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치 말 것)을 정해 몸소 실천에 옮기면서 애끊는 호곡(號哭)의 옥중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만해는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는 생사를 초월한 정신으로, 자신이 직접 추가한 공약삼장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굳세게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3·1독립운동으로 3년의 옥고를 치른 후 철창철학, 육바라밀 등의 강연을 하여 청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했다, 한편 지금까지의 투쟁 방향의 전환을 시도한 새로운 민족운동의 형태로 민족자주자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물산장려운동을 펴서 “조선인은 조선의 것으로”라는 국산품 애용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2000만의 피와 정성을 모아 민립대학 설립을 주장했고, 법보회를 조직해 불교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불교청년총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불타정신의 체험, 합리종정의 확립, 대중불교의 실현이라는 3대 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면서 일제의 조선사찰령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불교의 자주적 역량을 위해 민족 종교로서의 역할과 불교의 시대정신을 일깨워갔다.

만해 한용운은 대표 시 ‘님의 침묵(1926)’을 남긴 이후 1927년 신간회를 발기해 중앙집행위원과 서울(당시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돼 활동했다. 하루는 신간회 봉투 뒷면에 쓰인 일본 연호 소화(昭和)란 글자를 보자, 이것을 몽땅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 버렸다. 한용운은 가슴이 탁 트이는 후련한 마음으로 “소화(昭和)를 소화(消火)해 버리니 시원하군!”이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를 민중대회로 지원하는가 하면, ‘여성의 자각’, ‘전문지식을 갖추자’, ‘소작농민의 자각’, ‘자립 역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글들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범민족적 표현단체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는 등 대사회(對社會)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요시찰 인물이 돼 떠돌이의 신세를 면치 못하던 만해 한용운은 나이 55세가 돼서야 비로소 서울 성북동 언덕배기에 집 한 칸을 마련하게 됐다. 이 집을 지을 때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자 “그건 안 돼, 날더러 총독부를 바라보라는 모양인데 차라리 북향하는 것이 났겠어”라며 북향집 심우장을 지었다. 이곳 심우장은 일제 강점기동안에도 민족의 혼을 간직한 조선의 땅이었다. 손수 지은 택호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만해는 비밀 결사인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고 단채 신채호 선생의 애국지사 묘비명을 썼으며, 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업어다 장례를 치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곳이기도 했다. 일제의 황민화정책, 창씨개명운동, 조선인 학병 출정 등을 반대했던 북향집 심우장에는 이제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오늘도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남한산성에 위치한 만해기념관 전경.

■ 만해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공간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 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66세를 일기로 심우장에서 입적(1944년 6월 29일)했다. 학병·징병을 거부하고 일제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로 만해의 육신은 민족의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영원히 잠들었다. 민족의 갈망을 절실히 노래했던 시인,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투사, 가혹한 고난과 탄압에도 의연함을 보이며 불굴의 투지로 겨레를 이끌었던 만해 한용운.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내부에는 만해가 평소 즐겨 보았던 수택본들과 ‘님의 침묵’ 초간본을 비롯해 100여종의 판본, 만해 관련 학술 논문 600편이 소장돼 있다. 만해의 유품을 비롯해 편지글, 유묵, 저술 등 원전자료와 각종 연구자료 등 전 교수가 수집한 600여 점의 만해 관련 자료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만해의 항일 투쟁과 문학 활동, 일생, 구한말 불교계의 상황 등을 조망할 수 있는 각종 자료와 심우장 모형 등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에는 또 대한민국 건국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은 물론 기념주화도 있다. 한국조폐공사 한국의 인물로 선정돼 만들어진 메달은 초상을 기초로 제작됐고, 뒷면은 1917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남긴 친필 오도송이 눈에 들어온다. 2층은 영상자료실, 서고, 회의실, 강의실 등 만해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공간으로 마련됐다.

끝으로 만해 한용운의 호칭에 대해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은 “1980년 초반에 조계종 젊은 승려들이 만해를 선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잠시 주장을 했다가 1990년대에 들어 다시 선사로 통일하는 작업이 이뤄졌다”며 “지금도 일부에서는 선사와 선생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미 ‘선사’로 통일해야 한다는 불교계의 입장이 정해졌기에 ‘선사’로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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