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나무 세 그루와 만해 항일독립의 본산 사천 다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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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나무 세 그루와 만해 항일독립의 본산 사천 다솔사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7.2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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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단체 ‘만당’조직한 사천 다솔사

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17>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주역들, 뒷줄 우측 두 번째 부터 차례로 최범술·김법린·허영호. 앞줄 우측 첫 번째가 김상호이고, 네 번째가 강유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만당의 주요 구성원은 총 24명이지만 전체 당원은 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중앙에 본부를 두고 주요 지방에 지부를 뒀으며, 동경에 특수 지구를 뒀다고 한다. 초기 만당의 결성은 3차례에 걸쳐서 이뤄졌다. 1930년 5월경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이용조 등의 1차 결사가 있었고, 이들의 검증을 거쳐 2차로 입당한 승려는 조은택, 박창두, 강재호, 최봉수였으며, 3차로 박영희, 박윤진, 강유문, 박근섭, 한성훈, 김해윤 등이 합류했다. 사진출처= 법보신문

사천 다솔사 안심료 앞 편백나무 세 그루, 만해의 회갑기념으로 심어
1930년 만든 항일독립 지하조직 만당(卍黨),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서
만해, 다솔사에 만당 조직 불교청년동맹 통해 독립운동·불교개혁 주도
만당 해외에도 조직 대중운동 전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이 역할 맡아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2019년에 찾은 경남 사천의 다솔사는 고즈넉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를 지향한 근대시민정부의 구성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적 뿌리다. 3·1 독립운동의 주인공인 만해 한용운은 1918년 ‘유심’을 창간하고 다양한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선언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도모한다. 평소 친분이 있던 천주교의 최린,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접촉하고 불교대표로 용성스님을 모신다. 독립선언서를 직접 작성하려 했으나 최린의 권유로 최남선에게 맡기지만 최남선이 유약하게 독립의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점에 불만을 품은 만해는 공약삼장 마지막 부분을 직접 작성했다. 태화관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고 옥고를 치렀으니 3·1독립운동의 주도자이자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고 세상을 떠난 만해 한용운이다.

만해는 독립운동 전날 그가 기거하던 유심사에 효당 최범술, 김법린, 김상호 등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의 제자들을 불러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할 것을 지시하고 독립선언서를 들려 보낸다. 이들은 스승의 뜻에 따라 동래, 합천, 진주 등 각처에서 3·1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옥살이를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이어갔다. 그 중심지가 경남 사천의 다솔사였던 것이다.

■ 안심료에서 1930년 독립단체 ‘만당’ 조직
사천 다솔사 앞에는 우뚝 서있는 대양루가 천년 고찰 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양루 옆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안심료(安心寮)가 나온다. 이 건물만 놓고 보면 절이라기 보다는 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옛 기와집처럼 친근하다. 대대적인 불사를 하기 전 우리 사찰에서 흔히 보던 그런 건물이다. 안심료 툇마루에 앉으면 세 그루의 편백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만해가 1939년 회갑을 맞아 기념으로 심은 열다섯 그루 중 세 그루만 남은 나무다. 안심료는 만해가 짓고 기거했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이 곳에서 만해와 그 제자들이 독립운동을 모의했던 곳이다. 6·25 한국전쟁 때 불에 타지 않고 용케 버텨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이곳에서 만해 한용운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민족 계몽과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나눠져 있던 좌우 인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일제는 그러나 1930년대 들어서면서 만주를 침략하고 조선을 무력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는다. 만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의지를 꺾지 않았다. 1930년 만든 지하조직 ‘만당(卍黨)’도 그 일환이었다. 

만해 한용운을 당수로 1930년 5월 조직된 만당은, 1933년 4월 해산되기까지 약 3년 간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불교 단체다. 만당은 ‘목숨 걸고 비밀을 지키고(密限死嚴守), 당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黨議絶對服從)’는 서약을 받아 결성된 조직으로,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음은 물론 선언이나 강령 일체를 ‘암송(暗誦)’으로 전수했던 비밀결사 단체다. 따라서 조직의 기구나 명단, 구성은 물론 구체적 활동 내용에 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경남 사천의 다솔사 안심료 앞마당에 있는 편백나무 세 그루. 1939년 만해 한용운의 회갑기념으로 심은 열 다섯 그루 중 남아 있는 세 그루 편백나무는 80년이 됐다.

■ 한용운 만당(卍黨)의 당수, 정신적 지주
하지만 감춰져 있던 만당(卍黨)의 내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8월 30일. 만당을 주도했던 이용조(李龍祚·전 동국대 교수·작고)씨가 ‘대한불교’에 ‘내가 아는 만자당(卍字黨) 사건’ 이란 글을 기고, 만당 성립에 얽힌 전모와 뒷얘기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비밀에 묻혔던 만당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던 순간이다. 그는 1964년 8월 30일자 불교신문 (당시 대한불교)기고에서 만당의 설립 과정과 활동 과정 해산 등에 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조학유·김상호·김법린 3씨와 자주 교우하면서 불교계 현실에 대하여 개탄과 울분을 터뜨리곤 하였다. (중략) 이러한 정세 하에 합법운동으로 소기의 실과(實果)를 거두기는 지난한 환경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우리 4인은 여러 차례 상의 끝에 순국정신을 가진 동지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930년 5월경에 우선 4인이 불전(佛前)에 서맹(誓盟)하고 결사를 한 후, 2차로 조은택(趙殷澤)·박창두(朴昌斗)·강재호(姜在浩)·최봉수(崔鳳守) 제씨를 포섭하였으며, 다음 불전(佛專·현재의 동국대) 재학 중인 박영희(朴暎熙)·박윤진(朴允進)·강유문(姜裕文)·박근섭(朴根燮)·한성훈(韓性勳)·김해윤(金海潤) 제씨도 입당시켜 주비리(柱裡)에 창당 선서를 하고 당명을 만당(卍黨)이라 했다.”

만당은 해외에도 조직을 둘 정도였다. 이용조 교수는 당시 기고에서 “동경을 위시해 국내 특수지구에 지부를 조직했으며, 제1차 동경지부는 김법린 동지가 책임지고 조직하였다”고 회고했다. ‘만당’의 강령은 ①정교분립(政敎分立) ②교정확립(敎政確立) ③불교대중화 세 가지였다. 강령만 보면 불교 개혁에 비중을 두고 있는 듯 보이지만 참여자 면면을 볼 때 독립운동에 주안점을 뒀다. 만해·박영희·김법린·김상호 등이 모두 3·1독립운동의 주도자들이다.

이용조 교수 기고에 의하면 “1932년 봄에는 김법린·허영호·장도환 동지들이 귀국하고 당무도 확장되어 상당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으며, 전체 당원수가 근 80명에 달하기까지 되고 교정(敎政) 운영에도 상당한 잠재력을 갖게 돼, 교무원은 이사를 위시하여 중요 간부들까지도 당의(黨議)로 누구를 내세우자 하면 그대로 성공되기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4~5명으로 출발한 ‘만당’의 규모가 80여명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만당은 지하조직에 머물지 않고 대중운동을 전개할 조직을 만들었는데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이 그 역할을 맡았다고 이 교수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만해가 실질적인 배후로 지하조직 만당을 다솔사에 조직하고 대중조직인 불교청년동맹을 통해 독립운동과 불교 개혁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만당은 내부 이견으로 인해 분열 해체 되고 만해는 1937년 배후자로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 됐다가 석방됐다. 서울, 사천, 진주, 합천, 해남, 양산 등지에서 6차례에 걸친 경찰의 검거 선풍으로 김법린·장도환·최범술·박근섭·박영희·김범부 등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 면면들이 모두 불교는 물론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학자요, 대문호이며 예술가들이다. 물론 그 모두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던 애국자들이다. 그중에 효당은 만해와 더불어 근현대 다솔사에서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효당은 1916년 13세에 사천 다솔사로 출가, 1917년 4월초 해인사 지방 학림에 입학해 환경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효당은 1919년 3·1독립운동 전날, 만해가 불러 모은 중앙학림 제자 중 하나로 이 거사에 깊이 참여하고 해인사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동국대 김광식 교수는 ‘한국불교청년총동맹과 만당’이란 논문을 통해 “후일 만당이 노출돼 일제에 피체(被逮)됐을 당시, 불교청년들이 만당 당수를 당시 입적한 조학유라고 진술해 한용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며 “당원들이 한용운을 당수로 여기긴 했지만, 만해는 실질적인 당수라기보다 정신적 지주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는 결사가 노출될 경우에 대비, 한용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며 “만당은 매달 셋째 일요일에 정기모임을 가졌고 당원들은 주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용운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말했다.

경남 사천의 천년고찰 다솔사(多率寺)는 서기 504년 지증왕 5년에 인도의 연기조사가 세운 절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선덕여왕 때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으로 ‘다솔사(多率寺)로 이름 지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신라 화랑도의 훈련장, 임진왜란 당시 승군 집결지, 일제강점기에는 ‘만당(卍黨)’이 조직돼 독립운동을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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