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강진 병영·도룡마을, 네덜란드 하멜식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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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강진 병영·도룡마을, 네덜란드 하멜식 돌담길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한지윤·이정아 기자
  • 승인 2019.08.0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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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담길의 재발견<8>
전남 강진의 병영·도룡마을 돌담은 네덜란드인 하멜이 가르쳐준 하멜식 담쌓기로 돌과 흙을 반죽해 번갈아 쌓은 토석담으로 15도 정도 눕혀 엇갈려 쌓은 빗살무늬 형식의 돌담이다.

돌담 틈으로 땀과 노고의 흔적이 보이고 삶의 애환이 묻어 나와
병영마을 한골목 중심 사방팔방 곧게 뻗어있는 마을 안길 돌담길
납작한 돌 골라 15도 정도 눕혀 촘촘히 쌓고 반죽된 흙으로 고정
빗살무늬 토기와 같이 돌과 흙을 물반죽으로 번갈아 쌓은 토석담


돌담은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며 우리의 역사와 함께해 자연스레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됐다.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나고 울퉁불퉁 제각각인 돌들은 흙과 뒤엉켜 서로 모자란 부분은 채워주며 차곡차곡 덧쌓인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닮은 역사가 된다.

이 땅의 모든 자연이 그러하듯 해묵은 돌담들은 쌓은 사람들의 심성을 간직한 채 우리와 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법이다. 돌담길은 금이고 경계이며 울타리다. 또한 집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소통로이자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다.

이렇듯 돌담은 시간에 따라,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추억에 따라 모두 달리 보인다.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그 돌 틈으로 땀과 노고의 흔적이 보이고 삶의 애환이 묻어 나온다. 묻어두었던 전설이 생각나고 어릴 적 고향이 저절로 생각나게 만든다. 돌은 돌로써 담은 담으로써 제 역할을 다하면서도 묘한 어울림을 갖는 특징이 있다.

■ 하멜의 흔적이 가득한 병영마을
병영마을은 전남 강진에 있다. 마을 이름은 병마절도사의 영(營)이 있던 곳이란 뜻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낙안읍성이 적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성(城)을 쌓고 그 안에 백성들이 살았던 곳임에 비해 이곳 병영마을은 전라도의 군수권을 통괄했던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병영성이 있던 곳으로 성 안에는 백성이 아닌 군사들이 머물렀다. 그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전라병영성지와 병영마을의 돌담들이다. 병영마을과 이웃한 도룡마을은 돌담을 비롯해 네덜란드 사람인 하멜과 관련된 장소들이 유난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Hamel hendrik ?~1692)은 선원 33명과 함께 효종 7년(1656)에 이곳 병영마을로 압송된다. 현종 4년(1663)까지 있었으니 8년 정도 병영마을에 머물렀던 셈이다. 몇몇은 결혼해 살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고 춤판을 벌여 삯을 얹기도 했다. 마을 중앙에는 800년 묵은 거대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385호)가 있는데 하멜 일행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수인산성을 바라보며 고향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한쪽으로는 제법 큰 개울이 지나는 데 적벽청류라 새겨진 바위벽 아래에서 천렵을 즐겼다한다. 하멜이 여수로 떠날 당시 22명이 생존 했으니, 나머지 11명은 이곳 병영 땅에 뼈를 묻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네덜란드로 돌아가 쓴 ‘하멜표류기’에는 이곳 병영에서의 생활이 상당 부분 기록돼 있다.

이 마을의 특징은 전라병영성지와 함께 하멜 일행이 살면서 마을에 쌓은 돌담이 마을의 골목을 감싸고 있다. 이러한 마을의 골목은 골목이 크고 길다고 해 ‘한골목(골목이 크고 넓으며 길다는 의미)’이라 부르고 있다. 병영의 골목들은 병마도사나 군관들이 말을 타고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골목의 폭이 6~7m로 보통 골목보다는 넓으며 당시 조성된 마을길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당시 계획에 의해 마을의 골목이 조성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골목’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곧게 뻗어있는 사이 골목도 2~3m에 달하며 마을 안길이 직선형으로 조성돼 있어 담장이 한층 정연해 보이는 특징이 있다. 또 하나 이 마을 돌담길을 걷다가 보면 담장이 검게 변한 곳이 가끔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불이 탄 흔적이니 500여 년이 넘는 장고한 세월의 역사가 돌담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 하멜이 가르쳐 준 네덜란드 식 ‘담쌓기’
병영마을의 자랑인 돌담은 하멜이 가르쳐줘 쌓은 네덜란드 식이라고 한다. 맨 밑에는 가능한 납작한 돌을 골라 15도 정도로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반죽된 흙으로 고정시킨 후, 바로 위층은 반대 방향으로 15도 정도를 눕혀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의 돌담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쌓는 담쌓기를 하멜 일행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전수한 것이라서 ‘하멜식 담쌓기’라 부른다. 이러한 방식으로 담을 쌓으면 마치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무늬가 된다. 이 돌담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을 물 반죽으로 번갈아 쌓은 토석담이다.

돌담의 아랫단은 비교적 큰 화강석을, 위로는 주먹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해 쌓아 올렸으며, 담 위에는 기와로 마감해 지붕을 얹었다. 돌담 위에는 기와를 얹거나 구들장처럼 넓고 납작한 돌로 마무리를 했다. 담장역할을 하는 부속채도 담장과 같은 높이와 방식으로 축조돼 서로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병영에 머무는 시기 동안에 네덜란드 건축 방식으로 당시 조선의 민중들과 같이 돌담을 쌓았다 해서 이곳에서는 ‘하멜식 담쌓기’로 쌓은 ‘돌담’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곳 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곳의 담장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약 2m 정도로 높은 편인데, 이는 병영마을이라는 성격상 병사들이 말을 타고 순시를 돌 때 담이 낮으면 말 위로 집안이 환히 보이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집 안이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돌담을 높이 쌓았다”는 설명이다.
 


■ 돌담과 문학이 어우러진 도룡마을
도룡마을은 병영마을에 비해 골목들이 작고 아기자기해 돌아보는 맛이 또 다르다. 도룡리는 뒤편 매봉산과 별락산 사이 도로변 마을이 도룡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금강천이 흐르고 있으며, 이제는 30여 가구의 마을주민들만이 남아 있다. 병영마을과 같이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도룡마을 길모퉁이 곳곳에 전라도 사투리를 적은 나무판을 달아놓아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모란이 피기까지~’의 생생한 흔적이 있는 ‘김영랑 생가’를 둘러보고 영랑이 글공부를 하던 ‘금서당(琴書堂)’에 들러 남도의 들녘을 내려 보는 것도 좋다.

이곳 도룡마을은 하멜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강진 병영에서 지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하멜의 흔적은 도룡마을에 다다르기 직전, 병영마을의 커다란 풍차를 만나며 시작된다. 지난 2007년 12월 만들어진 하멜기념관에는 하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입구에는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에서 기증한 하멜의 동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실에는 하멜과 네덜란드에 대한 소개, 조선과의 인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도룡마을은 지난 2006년 처음으로 농협-팜스테이 체험마을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할 수 있는 96㎡의 체험관을 비롯해 5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 165㎡ 크기의 물놀이장 등을 설치해 도시민 유치에 나서고 있다. 마을주민들의 노력으로 2007년과 2008년에는 농어촌체험 휴양마을로도 지정 받았다. 또 2010년에는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농촌사업으로 지정돼 숙박시설 등 관련시설을 새롭게 재정비했다. 도룡마을의 ‘와보랑께 박물관’에는 2500여점의 민속품과 생활용품 등의 전시물과 전라도 사투리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2011년 개관한 ‘사랑방 작은 도서관’에서는 각종 도서와 비디오 등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언제나 누구나 구경하고 쉬어 갈 수 있는 도룡마을의 대표적인 작은 문화공간으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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