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주민들이 생활하는 ‘낙안읍성’
상태바
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주민들이 생활하는 ‘낙안읍성’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12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9>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에는 20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며 생활하고 있다.

낙안읍성, 성곽 길이 1410m, 면적 6만 7000평 평지에 쌓은 평지성
산을 배경 관아 형성, 관아 앞으로 백성들의 살림집 조선시대 고을
3개 마을 200여호 800여명 살아, 현재 80여호 주민 200여명 거주
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한 낙토민안, 초가집·돌담장 모습 평화로워


전남 순천시 낙안에 대한 기록은 1500년 전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안읍성(樂安邑城)은 조선 초에 세워졌으며, 백제 때는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렸고 고려 태조 23년(940)부터 ‘낙안(樂安)’이라 불렸다. 읍성을 둘러싼 성곽은 조선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김빈길 장군이 부민들과 함께 토성으로 쌓았다가, 세종 6년(1424) 석성으로 개축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정유재란 때 성곽 일부와 해자(垓子)·적대(敵臺) 등이 훼손됐는데, 인조 4년(1626)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보수·증축했다. 낙안읍성의 성곽 길이는 1410m, 면적은 6만 7000여 평으로 평지에 쌓은 평지성이다. 성문은 세 곳인데 낙풍루(樂豐樓; 동문)·쌍청루(雙淸樓; 남문)·낙추문(樂秋門; 서문) 등이다.

낙안읍성은 옛 읍성으로 성벽이라는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도시이자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도시였다. 일반적으로 읍성은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산등성이에 축성하는 것이 보통인데 낙안읍성은 평지에 축성된 야성, 또는 평지성이다. 낙안은 평야가 많아 고려 시대 말엽 이후 왜구들의 침략이 매우 극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600여 년 세월 역사와 삶의 사연 감싸
낙안읍성은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성내에 98세대 200여 명이 거주하며 생활하고 있다. 또한 전국의 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기도 하다. 낙안읍성은 진산인 금전산(667.9m)을 북에 두고, 동쪽의 오봉산(591.5m)을 우 청룡으로, 서쪽의 백이산(584.3m)을 좌 백호로 삼았다. 또 남쪽엔 제석산(563.3m)과 안산인 옥산(97m)이 있다. 특징적인 것은 낙안읍성의 성벽은 사다리꼴에 가깝게 축성했다는 점이다. 길이가 남쪽은 약 460m, 북쪽은 340m, 동쪽과 서쪽이 모두 약 310m이며 성벽의 둘레는 1410m가량이라고 한다. 성곽 서북쪽에 조그만 구릉과 대숲이 있어 서북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높이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략 4∼5m정도가 된다. 이처럼 낙안읍성은 600여년 세월 역사와 삶의 사연을 겹겹이 감싸 돌면서 옛날의 그때로 다시 돌아가 있다.

낙안읍성은 동문으로 들어가 객사와 동헌을 둘러보고 낙민관자료전시관을 거쳐 읍성에 거주하는 일반 주민들이 이용하는 서문 쪽에서 석성에 올라 성벽 위의 좁은 길을 따라 남문까지 걸어본 뒤 마을로 내려와 고샅길을 걸으며 중요민속자료 가옥을 둘러보고 짚 꼬기와 길쌈 등을 체험하면 제대로 읍성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일반 읍성이 남문을 이용한 데 반해 낙안읍성은 지리적 여건상 낙풍루(樂豊樓)라고 부르는 동문이 정문 격이다. 문루는 2층 다락으로 돼 있고 드나드는 문은 삼문으로 돼 있다. 동문 앞에는 조그마한 석구(石狗·삽살개) 3기가 세워져 있고, 일종의 방어시설인 해자와 평석교가 놓여 있다.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평석교 위에 걸터앉아 놀기도 하고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면 나이 숫자대로 다리 건너기를 하는데 이를 다리 밟기(탑교놀이)라고 한다.

동문을 들어서면 읍성 안길이 서문 쪽으로 널찍하게 일직선으로 나 있고 길 오른편으로 관아, 왼편으로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낙안읍성은 산을 배경으로 그 앞에 관아가 형성되고, 관아 앞으로 백성들의 살림집이 들어서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고을 경관이다. 낙풍루에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임경업 군수 선정비가 있다. 비각은 팔작지붕의 대문을 갖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귀신, 비신, 이수의 격식을 갖춘 비석에서 임경업 장군에 대한 백성의 흠모를 느낄 수 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 사이에 쌓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1397년 낙안 출신의 수군절제사 김빈길이 주민을 동원해 토성을 축조했다. 그 뒤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1626∼1628)로 봉직하면서 토성을 석성으로 중수하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선정비 바로 앞에는 객사로 들어가는 홍살문이 설치돼 있다. 객사 입구에 홍살문을 세워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도록 하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도 있으며 하마비가 있어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도록 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 자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闕)’ 자가 새겨진 두 개의 나무패를 모셔 두고, 군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여기에 대고 배례를 올렸다. 또한 중앙에서 관리가 출장을 오면 이곳에서 거처했다. 요즘의 영빈관과 같은 곳이다. 객사를 나와 광장을 거쳐 동헌까지 발길을 옮겼다. 조형물 포졸들이 지키고 있는 동헌에 들어가면 앞마당 양쪽에는 형틀과 곤장을 때리는 장면의 모형이 설치돼 있다.

동헌 사무당(使無堂)은 군수, 현령 등 지방관이 주재하며 향리를 거느리고 공무를 보던 지방관아 건물이다. 뒤로는 진산인 금전산 자락에 안긴 듯하고 남쪽으로 안산인 옥산을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동헌 앞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낙민루(樂民樓)가 있다. 이 누각은 낙안의 군수였던 민중헌(1845~1847년 재임)이 지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불탔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문인 낙풍루.

■ 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한 곳 낙안읍성
낙안읍성 서문 계단으로 올라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대나무 숲을 거쳐 곧바로 최고의 조망 지점에 닿는다. 발아래로 뭉게구름처럼 흩어져 있는 초가집과 관아, 장터 등 마을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 밖으로는 너른 들판이 아득하다.

낙안읍성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이장과 문화관광해설사를 역임하고 지금도 낙안읍성에 관한 자료수집과 문화해설을 하고 있는 낙안읍성 송갑득(73) 명예별감은 “1970년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작된 새마을운동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던 때 이장을 맡았다”며 “그런데 우리 마을은 대부분 조선시대 지은 낡은 초가집이었는데,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나 기와를 올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을 헐고 새로 지을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그러던 중 1983년  정부에서 ‘옛 고을문화를 복원·보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며 낙안읍성을 사적 제302호로 지정했다. 당시 낙안읍성은 동내리·남내리·서내리 3개 마을로 200여 호 800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사적으로 지정된 후 일부 현대식 가옥을 강제 철거·이주시켰고, 현재는 108가구 중 80여 호에 주민 2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주 과정에서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철거예정 가옥 주민들은 ‘보상과 이주 대책이 부실하다’며 버스를 대절해 서울 국회와 정부 청사를 찾아가 시위를 했고, 전통 초가집에 살고 있던 보존대상 가옥 주민들 역시 ‘주민의 생활대책 없는 보존은 안 된다’며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며 행정에서는 마을이장을 맡고 있으니 주민들을 설득해달라고 요구하고, 주민들은 이장이 주민들 편에 서서 시위에 적극 나서라고 닦달해 중간에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민속마을보존회가 구성되고, 군 당국에서 민속마을이 되면 마을생활체험장 운영과 난전식당 운영에 주민을 참여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민원은 잦아들었다고 전했다.

읍성 주변에는 아직도 195기의 고인돌이 남아있으며, 인근 지역에서는 패총무덤과 선사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낙안은 동편제의 대가인 국창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가야금병창을 집대성한 오태석 명인의 고향이다. 생가가 모두 낙안읍성 내에 있다.

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하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 ‘낙안(樂安)’처럼 이곳에서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듯 초가집과 돌담장 등의 모습이 참으로 평화롭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