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돌담의 아름다움 고스란히 품은 산골의 지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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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담의 아름다움 고스란히 품은 산골의 지전마을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한지윤·이정아 기자
  • 승인 2019.08.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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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담길의 재발견<10>
전북 무주의 산골마을인 지전마을 돌담은 둥글둥글한 강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석담으로 흙과 자연석을 혼용해 평쌓기를 한 것이 특징이다.

무주 지전마을, 마을 이름은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에서 유래해
옛 돌담, 노거수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품은 한적한 시골 산간마을
소백산 줄기 이어지고 마을의 뒷산에서 남대천 발원해 경관을 뽐내
무주구천동, 나제통문~덕유산 향적봉 25km 계곡·물길이 빚는 풍광


덕유산과 금강을 끼고 있는 전북 무주는 예부터 휴양과 레저도시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사계절 넉넉한 자연이 펼쳐지는 무주에서는 다양한 풍경과 만날 수 있다. 덕유산(1614m)은 무주의 진산이다.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을 모두 품고 있는 덕유산은 이름만큼이나 넉넉한 품새와 육중한 앉음새를 지녔다. 왜군에 쫓겨 산속으로 숨어든 백성과 의병들은 덕유산을 은신처로 삼기도 했다. 역사의 굽이마다 너그러운 품을 내주던 덕유산은 이제 아름다운 계곡과 시원한 물줄기를 품고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주변에는 문화유적도 많다.

특히 옛 돌담마을로 불리는 지전마을은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에 있다. 무주구천동 계곡을 따라 설천면 쪽으로 가다보면 지전마을 이정표가 나온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산간마을로 깊숙한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주변의 풍광이 그 어느 곳보다 빼어나다. 마을 이름은 예전부터 이곳에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남대천변에는 300여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풍상을 딛고 서있다. 마을의 촌로들에 따르면 느티나무는 마을을 보호하는 당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남대천이 마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 아래에 식재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하천가에는 수백 년이 넘은 느티나무 숲이 여름철 그늘막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감나무가 넘쳐나 돌담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 흙과 자연석을 혼용해 평쌓기한 담장
지전마을은 옛 돌담(등록문화재 제262호)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품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쌓여 있어 산골마을의 전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담장의 높이 또한 사람의 가슴 높이에 불과해 친근감마저 주고 있다. 조바심을 버리고, 돌담길을 여유 있게 걷다보면 심란했던 마음이 평정될 듯도 싶다. 하지만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집들이 많고, 허물어진 담장이 곳곳에 보이는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전이라는 이름은 이 곳이 예전부터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해 붙여졌다고 하는데,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을 옆을 흐르는 남대천가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짐작케 해준다. 마을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돌담이 이어져 미로를 만들어낸다. 둥글둥글한 강돌과 흙을 섞어 담을 쌓았는데, 담에 지붕을 만들어 비에 덜 젖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담에 박힌 돌 하나 흙 한 줌이 달려온 삶의 시간을 토닥여준다. 마을 뒤로는 소백산 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마을 뒷산에서 발원해 마을의 좌측을 지나는 남대천은 여름철 관광지로서의 경관을 뽐내고 있다. 마을은 크게 4개의 군락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의 공간구조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개량 기와집 형태의 가옥들이 주를 이루는 전형적인 농가 주택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장은 본래 기능인 주택의 경계역할을 하는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마을 대부분의 담장은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담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석담은 흙과 자연석을 혼용해 평쌓기를 한 것으로 이어진 담장은 시각적 연속성을 주고 있다. 담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로 처리돼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체적으로 전통 가옥, 남대천, 노거수와 더불어 마을 전체에 식재돼 있는 감나무는 한 폭의 풍경화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또 이들과 함께 어우러진 담장 또한 산골 마을의 전형적이고 아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담장의 형태는 길이가 700~1000m 정도가 될 것이며, 담장의 높이는 사람의 키를 크게 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전형적인 돌담과 토석담이 주를 이루며, 시기는 대략 17세기 후반 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사찰들도 많아
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덕유산은 사계절 다른 풍경을 펼쳐 보인다. 흔히 눈부신 은빛세계가 열리는 겨울철을 첫손에 꼽지만, 진분홍빛 철쭉 물결이 산에 화원을 이루는 봄이나, 산줄기마다 오색단풍이 시선을 빼앗는 가을도 그에 못지않은 자태를 뽐낸다. 특히 초록으로 감싸인 채 맑고 시원한 물길이 장쾌한 여름철의 덕유산은, 구천동 계곡이 품은 명소를 하나씩 발견해가는 재미도 여간 아니라고 한다. 무주구천동은 나제통문에서 덕유산 향적봉에 이르는 25km의 계곡으로, 물길이 빚어낸 33경의 풍광을 안고 있다. ‘구천동’이라는 이름은 ‘9000명의 스님이 머물렀다’는 뜻의 ‘구천둔(九千屯)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계곡의 굽이가 9000개에 달해 그렇게 불리게 됐다는 설도 있다. 33경 가운데서도 나제통문(1경)과 일사대(6경), 파회(11경)·수심대(12경)는 구천동 3대 명승지로 꼽힌다. 구천동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인 나제통문은 무주 설천면과 무풍면을 가로막은 암벽을 뚫어 만든 석문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라 ‘나제통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물자 수송을 위해 뚫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나제통문에서 무주읍을 향하다 보면 세계 태권도의 성지, 태권도원을 만난다. 태권도원은 태권도의 모든 것을 한자리에 모은 일종의 테마파크다. 태권도원에서 2km정도 떨어진 반디랜드는 곤충박물관, 반디별천문과학관, 환경테마공원, 통나무집, 청소년 야영장 등이 모여 있는 생태체험공원이다.

무주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이곳에 기대고 있는 사찰들도 많이 남아 있다.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숨어 살던 곳으로, 830년(흥덕왕 5)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전성기 때는 14개의 사암이 있어 ‘9000명의 승려들이 도를 닦던 곳이어서 구천동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 부용, 부휴, 정관, 벽암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이 선풍을 일으켰던 불교성지로 한때는 ‘구천동사’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됐다가 무주구천동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복원이 시작돼, 1967년 무주읍내에 있던 조선시대 무주부(府)의 관아인 동헌(東軒) 건물을 옮겨와 요사 문향헌(聞香軒)으로 사용했다. 당우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보제루, 천왕문, 일주문, 범종각 등이 현존한다. 또 안국사(安國寺)는 1277년(충렬왕 3)에 월인(月印)이 창건했다는 설과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복지(卜地)인 적상산에 성을 쌓고 절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 5) 사찰을 중수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둬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했다. 이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다고 전해진다.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했고, 1990년 초에 양수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해 1993년에 지금의 위치로 완전히 옮겼다. 경내에는 극락전, 천불보전, 청하루, 지장전, 삼성각, 범종각 등이 남아 있다. 한편 북고사(北固寺)는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경월사(慶月寺)’라는 본래의 이름을 ‘북고사’로 바꿨다는 설화가 전해지므로 늦어도 고려 말에는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392년(조선 태조 1)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자초가 새 도읍지를 찾아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이 절이 있는 곳에 이르러 “무주의 지세가 복지(卜地)이나 북쪽 능선이 약하다”라며 “고을 현감에게 절에 탑을 세우고 절 이름을 북고사로 바꾸면 장차 큰 고을이 될 것”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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