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읍성, 고려 우왕 때 축조… 남포현의 치소로 삼아
상태바
남포읍성, 고려 우왕 때 축조… 남포현의 치소로 삼아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19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10>
남포읍성은 고려 우왕 때 서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된 읍성이다.

세종 때 새로운 터 잡아 현재 위치에 남포읍성 축조해 치소로 삼아
기단석 10㎝정도 내밀게 놓고 부정형 할석으로 수직되게 외벽축조
16세기 마량진에 진성 축조, 남포읍성은 이차적 방어선 구실을 해
홍주의병, 5일간 남포읍성 치열한 전투 남포읍성 함락 홍주성 공격


충청도 남포현 지역은 백제의 사포현(沙浦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남포로 지명을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독립된 군현이었다. 1914년에 보령에 통합됐다.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의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 일대를 관할하던 군현이었다. 지금은 남포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포읍성은 남포면 읍내리 일대가 읍치(邑治)에 해당하는데, 현재의 남포초등학교 인근에서 옛 성곽과 관아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읍성 위에 있던 교궁(校宮)은 남포향교인데, 남포초등학교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남포면 옥동리에서 볼 수 있다. 고읍면(古邑面), 향교구기(鄕校舊基) 등을 통해 읍치를 이전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에 있는 남포읍성은 세종 때 치소가 옮겨지면서 축조된 읍성이다. 원래 남포현의 치소는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이었다. 여기에서는 고려시대의 어골문 와편 특히 관자명 와편과, 성문의 대형 문초석등이 수습되고 있다. 고려 말 왜구가 침입하자 진성을 설치하기도 했으나, 조선 세종 때 새로운 터를 잡아 현재의 위치에 남포읍성을 축조하고 남포현의 치소로 삼게 됐다.
 

■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 막기 위해 축성
남포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로 둘레가 900m, 지정면적이 1만1478㎡이며, 현재 동·서·남문과 적대(敵臺)·수구(水口)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남포읍성은 1451년(문종 1년) 둘레 2476척(약 900m), 높이 12척(약 4m)의 성벽에 높이 3척의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377개를 뒀으며,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성문이 세 곳이고 적대가 5개나 되는 규모로 축조됐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읍성들은 주로 내륙의 요충지와 해안지대에 쌓았는데, 남포읍성도 조선 초기에 쌓은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성벽은 높이 4~5m, 너비 3~4m이며 평지에 정방형에 가깝게 터를 잡아 바깥 면을 돌로 쌓았다. 아랫부분은 비교적 커다란 깬 돌로 쌓고 작은 쐐기돌로 틈을 메웠다. 석재는 성벽의 위로 오를수록 작아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성문은 동·서·남쪽의 세 곳에 세워졌고, 모두가 옹성을 갖추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동문 터의 옹성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잘 남아있다는 평가다. 이곳의 옹성 규모는 높이 3m정도, 폭은 4m 정도이다. 문지의 폭은 6m에 달하고, 문지의 좌우측 성벽의 높이는 4~5m 가량이며, 문지와 옹성부에 사용된 석재는 일반 성벽에 사용된 석재보다 큰 돌을 쌓고 군데군데 쐐기돌을 박아서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바깥으로 돌출된 모양의 치성(雉城)이 축조돼 있는데, 서북의 높이는 5m, 동북치성은 3m, 남동측 치성은 4m, 서남 치성은 3m 정도이다. 치성의 길이는 5m이고, 단부의 폭은 5m 내외로 축조 됐고, 남동쪽의 치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부가 파괴됐다. 동북치성과 동남치성은 복원된 상태이다. 5개의 적대 가운데 지금은 4개의 모서리에 치성(雉城;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확인되고 있다. 동북·동남·남서·북서의 모서리에 둘레 25m 정도의 바깥으로 돌출시킨 치(雉)는 조선 초기 읍성들 모두에 시설된 적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축조기법은 기단석을 10㎝ 정도 내밀게 놓은 다음 부정형의 할석으로 거의 수직이 되게 외벽을 축조 했으며, 성의 내측은 내탁의 방법을 사용했다.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의 높이는 5m 정도이고, 부정형의 할석 20~25단을 축조했다. 성벽의 하부기단 석축은 길이 1m 이상, 두께 70㎝ 정도의 큰 돌인데 잘 남아 있고, 이 큰 돌의 틈에 작은 부정형의 할석을 이용해 안정감을 추구하는 등 조선 전기에 쌓은 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포읍성 안에는 샘이 세 군데 있었고, 성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저수하도록 시설됐으나 지금은 서쪽 성벽에 수구(水口)가 하나 남아 있다. 서남쪽 모서리에서 서문 터 쪽으로 치우쳐 있는 가로 80㎝, 세로 60㎝ 가량의 네모꼴인 수구는 바닥과 천장을 판상장대석(板狀長大石)으로 깔고 덮은 것으로, 지금도 배수구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성안에는 동북쪽에 관아문과 진서루(鎭西樓)가 남아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이웃한 마량진(馬梁鎭)에 진성이 축조되면서 남포읍성은 이차적인 방어선 구실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포읍성을 처음 쌓은 것은 고려시대 우왕 때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축성됐다. 이후 1390년(공양왕 2)에 성을 완성,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군영(軍營)을 설치했다. 성의 길이는 900m, 높이 3.5m로 여장을 뒀으며 사방에 치를 둬 적의 침입에 대비했던 특징이 있다. 성문은 동·서·남쪽 세 곳에 있었고, 옹성 형태였지만 지금은 성벽 일부를 복원한 것 이외에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성벽 바깥쪽은 논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평탄면이 있고, 서남쪽 부분은 성벽보다 1.5m 정도 아래쪽에 평탄면이 조성돼 있어 해자가 아닌가 생각되지만 “남포읍성에 해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997년 이후 몇 차례의 보수, 복원공사로 인해 남벽 일부와 동벽, 북벽이 원형과 다른 모습이 돼 버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홍주의병 전투지, 남포초등학교 위치

현재 남포읍성 부지에는 남포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고종이 전국의 읍성과 관청 근처에 교육기관 설립을 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포초등학교는 남포읍성 안에 위치해 진서루, 외동헌, 옥산아문 등과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 학교를 제외한 건물들은 조선 후기 건축됐는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인 진서루는 옛 남포현의 출입문이다. 2층 건물에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다. 내삼문은 외동헌의 출입문으로, 정면 7칸·측면 1칸 규모다. 중앙 1칸은 출입문으로 대문을 달고 좌우 각 3칸은 남자 종이 머무르거나 창고로 쓰는 익실(翼室)로 구성됐다. 외동헌은 남포현의 공사를 관장하던 대청으로 정면 5칸·측면 3칸이다. 정면 중앙에 2칸의 툇간(退間)인 대청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며졌다. 이렇듯 읍성(邑城)은 고려 말~조선시대에 걸쳐 축조됐는데, 주민들과 국가 행정시설 등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행정 중심지에 설치한 방어시설이다. 조선 성종 때 전국 행정구역 330곳 중 읍성이 190곳에 설치됐다. 충청도 20곳, 경상도 45곳, 전라도 39곳 등 조선 8도 중 삼남에 집중 설치됐다. 이는 읍성이 주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해안고을에 집중적으로 축조됐기 때문이다.

한편 남포읍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홍주의병은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을사늑약 이후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서 재봉기 했으나 청양 합천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체포를 면한 민종식(閔宗植)은 전주의 친척집에서 은신했으며, 그의 처남인 이용규(李容珪)는 전북의 전주·진안·장수·무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해 1906년 5월 9일 부여의 지티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민종식은 지티에서 다시 대장에 추대돼 부대를 정비했다. 민종식은 선봉장에 박영두, 중군장에 정재호, 후군장에 정해두를 임명했다. 지티에서 재봉기한 홍주의병은 홍산 관아를 점령하고 5월 13일 서천 관아를 점령해 서천군수를 감금시키고 양총 70여 자루를 획득했다. 이어서 홍주의병은 비인을 함락하고 남포로 향했다. 남포읍성에서 5일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홍주의병은 남포읍성을 함락하고 남포군수를 감금시켰으며, 관군 30여 명을 의병에 귀순시켰다. 이때 남포의 유생 유준근을 비롯해 유회군 30여 명도 영입했다. 또 남포 부근의 용동에서 일본인 석공 2명을 체포해 그 중 한명을 총살했다. 그리고 홍주의병은 광천을 거쳐 5월 19일 홍주성을 공격해 진입에 성공했다.

남포읍성 진서루.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홍성군청사, 아픈 역사 101년 끝내나?
  • 통증이 주는 두려움과 안도감
  • “농사지으며 밥차에 건강한 먹거리 보내자는 꿈을 이뤘어요”
  • 뜨겁게 달아오르는 홍성군 청사이전 유치전
  • 재경홍성군민회, 임원 이사회 개최
  • 유통시장의 변화, 어떻게 살아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