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인공연못 부여 궁남지의 ‘궁남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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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인공연못 부여 궁남지의 ‘궁남지 다리’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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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5)
부여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다. 포룡정으로 건너는 궁남지 다리는 돌기둥을 세우고 상판과 난간을 나무로 처리한 아름다운 목조다리로 꼽힌다.

궁남지는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 별궁연못, 백제 무왕 때 만들어
궁남지 섬에는 정자가 있고, 정자 가기 위해 돌기둥에 목조다리 놔
궁남지 다리, 돌기둥 세우고 상판·난간 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다리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도성’ 있던 곳, 궁원지 유적 남아


부여 ‘궁남지(宮南池)’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연못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 35년(634년)조에 “3월에는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나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여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부여 ‘궁남지’를 두고 말한 것이다. 부여 궁남지는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하나 있다. 당시의 귀족과 최고 권력자들의 유흥장으로 이용됐던 곳이다. 다리 주위 연못가에는 버드나무가 한가롭게 가지를 휘늘어지도록 길게 늘어트리고 있다. 연못 동쪽에서 주춧돌이 발견되고 기와 조각이 흩어져 나와 이곳 궁남지가 궁성의 이궁에 따르는 원지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주춧돌이 별궁 건물의 흔적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따라서 궁남지는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현재 ‘궁남지(宮南池)’ 연못 주변에는 별궁(別宮)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몇 개의 초석이 남아 있고, 연못 안에는 ‘포룡정’이라는 정자와 목조다리가 남아 있으나 퇴락해 복원하는 바람에 옛 모습은 많이 잃었다.


■ 궁남지 다리, 돌기둥에 상판·난간 나무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됐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해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으며, 연못 안에는 섬이 하나 있다. 이 섬에는 ‘포룡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으며, 이곳으로 가기 위해 ‘돌기둥 위에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아름다운 궁남지의 경치에 알맞은 목교를 가설함으로써 섬은 더욱 가까이 왔다. 섬 중앙의 누각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겹처마 건물로 정면과 후면의 중간 칸을 제외하고 난간을 둘렀다. 누각 포룡정(抱龍亭)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의 글이다. 누각에는 “薯童謠;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편액과 1973년에 부여군수 정찬경(鄭燦璟)이 쓴 ‘포룡정기’ 편액이 걸려 있다.

궁남지는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복원공사를 하면서 실제 크기의 3분의 1(1만 3772평)로 축소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0년에서 1993년, 1995년에 재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옛 백제의 흔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궁남지 내부와 주변에 나무가 자라다 고사된 나무의 흔적과 점질층으로 만들어진 집수시설, 물을 끌어들였던 수로, 건물터가 조사되면서 궁남지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집수시설은 동서 길이 11.65m, 남북 너비 3.13m인데, 가장자리에 통나무를 이중으로 박아 벽체를 만들고, 집수시설 안의 서쪽 부분은 6.3m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고, 동쪽 부분에는 수로에서 유입된 물을 흘러 보낼 수 있도록 얕은 ‘∪’자형 홈이 나 있다.

집수시설과 가까운 동쪽 바깥쪽에는 수로가 남~북 방향으로 나 있음을 확인했다. 수로는 자연수로와 인공수로가 나누어지며, 자연수로에서 물이 들어올 수 있게 말목을 촘촘히 박아 인공 수로를 만들어 물이 궁남지를 채웠다.

‘궁남지 다리’와 누각은 1971년에 복원했다. 궁남지를 복원하면서 섬의 누각과 다리가 함께 만들어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궁남지 다리’는 돌기둥을 세우고 상판과 난간을 나무로 처리한 아름다운 목조다리다. 사적 제135호이다.

궁남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목조다리’를 건너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 정자에는 신비한 전설이 하나 내려오고 있으니 역시, 백제 무왕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 옛날, 서동의 어머니가 한밤중에 쉬이 잠을 못 이뤄 연못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그때 마침,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후에 서동을 낳았다는 내용인데 즉, 용과 정을 통했다는 의미에서 ‘포룡정’이라 불린다. 무왕은 연못에서 배를 띄웠다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물을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여 주위 물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속에 섬을 쌓아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사람들은 이것을 ‘뜬 섬’이라고 불렀다. 아쉽게도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수로와 물가, 섬이 어떤 생김새로 생겼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현재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1만 평 정도에 이르는 지금의 궁남지는 1965년에 복원한 것인데, “원래 규모의 3분의 1쯤 된다”고 전한다. 우리에게 선화공주와의 사랑으로 잘 알려진 무왕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처럼 원래의 궁남지는 뱃놀이를 할 정도로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사비시대 궁원지(宮苑池)유적 ‘궁남지’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도성’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이곳 시가지 남쪽에는 사비시대(538~660)의 궁원지(宮苑池) 유적으로 추정되는 ‘궁남지(宮南池)’가 남아있다. 1995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이곳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다. 그런데 발굴 중에 사비도성의 공간구조와 백제지배층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출토됐다. 이 유물은 길이 35cm, 폭 4.5cm, 두께 1cm 정도의 공들여 다듬은 나무판이다. 13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디며,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 가느다란 나무판에는 방금 쓴 것 같은 백제인의 묵서(墨書; 먹물로 쓴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나무판은 고대사회에서 종이가 일반화되기 이전에 서사재료(書寫材料)로 널리 사용되었던 ‘목간(木簡;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죽간(竹簡)과 함께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목편(木片), 목독(木牘) 또는 목첩(木牒)이라고도 함)’이다. 사비시대에는 이미 종이가 보급됐지만, 나무의 경제성과 내구성 때문에 목간도 함께 병용됐던 시기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무왕 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다시 39년조(年條)에는 “3월에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근거로 볼 때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궁남지와 관련해 주목되는 또 다른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보이는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라는 기록이다. 망해루(望海樓)나 망해정(望海亭)을 대지(宮南池)에서 바라보면 바다와 같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터이고, 이렇게 바다와 같이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드는 것이 백제가 처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라의 경우 문무왕대(文武王代)에 안압지(雁鴨池)를 만들고, 그 안에 삼신도(三神島)를 조성, 주변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백제의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백제의 조원(造苑)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의 조원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연못은 백제의 조경수준을 엿볼 수 있는 사적으로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경의 원류가 됐다고 전하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부여 궁남지 연못에는 가시연꽃, 빅토리아연꽃 등 50여 종의 연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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