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읍성, 고려시대 토성… 조선시대 석성으로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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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읍성, 고려시대 토성… 조선시대 석성으로 쌓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2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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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11>
보령 읍성 성벽의 모습.

보령이라는 지명, 고려시대 보령현부터 1000여 년의 세월 이어져
고려 말 왜구 침입 대비해 쌓아… 임진왜란 거치며 대부분 파손돼
보령읍성이 있는 보령시 주포면이 행정의 중심지, 대천으로 이전
세종 12년 10월 축조시작 세종 12년 12월 완료한 것으로 나타나


서해바다를 향해 오서산(791m)의 산세가 고개 숙이며 달려가다가 잠시 하늘로 솟구치면서 진당산(351m)을 이루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고을과 주포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질재를 내어준 뒤 꿈틀거리며 배재산(250m)을 지나 서해바다 쪽으로 향한다. 풍수상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 명당자리로 일컫는 땅을 혹자는 음현리의 선유골이라 해 한때는 그곳에 조상의 묘 자리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기도 했다고 한다. 혹자는 소양리 소릿골이 명당이라 해 그곳에 택지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질재의 보령정에 올라 보령리의 펼쳐진 전경을 바라보니 이 마을사람들이 오성지간(烏聖之間)의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라고 자부할만한 형세인 것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보령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왕이 직접 하사한 ‘성주’라는 지명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보령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의 보령현에서 출발한 것으로 1000여 년의 세월동안 이어져 왔기에 ‘만세보령’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 군사요충지, 행정중심지로 역할
서해안은 삼한시대 이래 왜구의 침략이 빈번해 늘 불안한 곳이었다. 그래서 서해안 쪽에는 주민보호를 위한 수영도 세워지고 읍성도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은 곳이 많은데 보령읍성도 그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보령시의 중심이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이 있는 대천이지만 옛날에는 보령읍성이 자리하고 있는 보령시 주포면이 보령의 행정중심지였다. 보령읍성은 고려시대에 토성으로 처음 쌓고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석성이 쌓이고 그 안에 관아가 들어서면서 군사요충지로서, 행정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현재 보령읍성이 있는 보령리는 조선시대 보령군을 거쳐서 일제강점기 남포, 오천군과 보령군이 통합돼 잠시 이곳 보령에 군청이 소재하다가 대천으로 이전을 하면서 읍내의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비록 보령리라는 지명으로 그 예전 화려했던 읍성의 면모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 흔적들이 전설과 유적으로 남아 후손들에게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보령읍성’은 1430년(세종 12년) 순찰사 최윤덕이 현재의 위치에 터를 잡고 보령현감 박효성, 서산군수 박눌생 등이 힘을 합해 완성한 석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성내에는 3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적대 8개소, 성문 3개소, 옹성 2개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성 돌에는 천안, 단양, 제천 등의 충청도 군현 명칭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축성 당시 여러 지역의 인력이 동원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보령읍성의 정문인 ‘해산루’의 현판은 보령출신으로 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로 전해진다.

보령읍성의 규모는 둘레 630m, 높이 3.5m이고, 성에는 적대(성에 달라붙은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던 곳) 8개소, 성문(남·북·동문)3개소, 우물 3개소 등이 있었다. 1432년에 제민당·공아·병기고 등 140여 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 성벽 약 70여m와 북쪽 성벽 360여m정도가 복원돼 보존되고 있다. 지금은 해산루가 주포초등학교와 보령중학교의 정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보령시의 계획에 따라 해산루를 비롯한 성곽 등의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작은 사진은 현재 해체보수공사가 진행중인 보령읍성 정문인 해산루.

■ 출입문인 남문, 보령관아의 관아문
보령읍성의 주 출입문인 남문 문루 건물은 보령관아의 관아문으로 현재는 해체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1층은 양편의 기둥을 성벽 위에 걸쳐 세워 성곽의 일반 문루처럼 가운데 1칸만 통행하도록 돼 있다. 기둥과 같이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웠으며, 2층은 누각을 설치하고 간단한 난간을 사방에 둘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본래 신촌현인데 신라시대에 신읍현으로 고쳐 결성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시대에 보령현으로 고쳐 현종 9년에 운주(運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에 12년 9월 임술조(壬戌條)에 의하면 도순찰사 최윤덕이 아뢰기를 “충청도 비인과 보령은 해적들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지대인데, 비인읍성은 평지에 위치해 있고, 보령읍성은 높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모두 성(城)터로 맞지 않고, 또 잡석(雜石)을 흙과 섞어서 축조했기 때문에 보잘 것이 없는데다 우물과 샘마저 없으니 오래 보전할 땅이 아니다”라고 했고, “보령현 고읍 지내리의 새 터는 삼면이 험준한 산을 의지하고 있는데다 그 내면도 넓고 샘물도 풍족해 읍성을 설치하기에 마땅할 뿐 아니라 본현(本懸)과의 거리도 불과 1리 밖에 되지 않아 옮겨가고 폐단도 없을 터이니 새 터에 벼농사가 잘된 각 고을에 적당히 척수(尺數)를 안배해 줘 10월부터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감사와 도절도사로 하여금 그 축조를 감독하게 하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어 보령읍성이 세종 12년 10월부터 축조하기 시작해 세종 12년 12월 29일에 완료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불과 2달 만에 보령읍성을 완료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또 읍성의 축조와 관계된 기록이 ‘정대동헌기’에 보이고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왜구 때문에 그 침입을 받을 두려움이 있어 1400년에 봉당성을 쌓았으나 성이 좁고 지세가 얕으며 산세의 험준함과 샘과 우물이 없어, 1430년(세종 12년) 가을에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 병사 이흥발이 다시 성터를 살펴 봉당성의 동쪽 1리쯤에 있는 지내동의 당산 남쪽으로 터를 잡고, 서산군수 박눌생과 보령현감 박효성이 완성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현감 박효성의 뒤를 이은 정대가 1431년 겨울에 부임해 다음 해인 1432년에 객관을 비롯한 성 내의 건축을 400여 간 완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벽의 문지 좌우는 내외협축이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내탁했다. 크기 1m 이상의 폭과 두께가 70㎝ 정도의 커다란 석괴를 쌓고, 이 큰 석괴의 틈 사이에는 작은 쐐기돌을 끼우거나 얹어서 조선시대의 전반기에 쌓은 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은 남문이라고 하는 해서루가 있는 주통로와 북문지, 동문지라고 부르는 동북각부, 동벽의 중앙에 있는 동문지 등 모두 4개 처가 남아 있다. 기록에 보이는 적대 8처는 성벽이 굽어진 부분이 7처이고 북벽의 거의 중간부에 무너진 석축의 돌 더미가 있는 곳이 있어서 8처가 된다. 즉 성벽이 직선으로 달리다가 바깥쪽으로 휘면서 꺾인 지점 7처에 각루처럼 적대가 시설되었던 듯하며, 북벽은 길게 뻗은 벽의 중앙부에 따로 적대를 축조했던 것이다. 기록에는 140칸 이상의 관아와 공공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읍성 안에는 보령중학교와 주포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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