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 순간에 깨달음 얻고 오도송 남긴 오세암
상태바
만해, 한 순간에 깨달음 얻고 오도송 남긴 오세암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9.11 09: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22>
만해 한용운이 십현담 주석서와 님의침묵을 썼으며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남긴 설악의 오세암 전경.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五歲庵)은 만해 정신의 고향과 다름없는 곳
오세암, 님과 나의 이별과 만남 주제로 ‘님의 침묵’을 집필한 장소
만해,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 순간에 깨달음 얻어
설악산 백담사와 오도처인 오세암은 만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곳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돌연 바랑을 꾸려 백담사(百潭寺)로 향한다. 1897년 열아홉 살의 한용운이 의병의 실패로 고향인 홍주를 떠나 처음 몸을 피했던 곳이고,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1905년 1월 26일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그리고 ‘님의 침묵(沈默)’ 등과 같은 명저들의 산실이니,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五歲庵)은 만해 정신의 고향과 다름없다.

오세암(五歲庵)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만경대(萬景臺)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에 속하는 백담사(百潭寺)의 부속 암자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율사(慈藏律師)창건해 관음암(觀音庵)이라 했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선사(普雨禪師)가 중건했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대사가 중건한 다음부터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대사는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됐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물치장에서 월동준비를 마치고 신흥사에 도착한 스님은 그날 밤 사람 키를 넘는 폭설로 인해 발이 묶이고 만다. 어린조카를 첩첩산중에 홀로 남겨둔 스님은 당장이라도 눈을 헤치고 암자로 가고 싶었지만 눈앞에 나타난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어린 조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살아있기만을 애타게 바라면서 눈이 녹기를 기다린 스님은 이듬해 3월에야 겨우 암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살아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와 싸늘하게 죽어 있을 어린 조카의 모습을 상상하며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암자에 도착한 스님 앞에 벌어진 광경은 목탁소리와 가늘게 들리는 ‘관세음보살’ 염불소리였다고 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했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 1888년(고종 25)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했다. 당시 법당을 2층으로 짓고 박달나무로 기둥을 세웠는데, 매끄럽기가 부드러운 명주옷으로 문질러도 결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 절은 수선도량(修禪道場)인 동시에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손꼽힌다. 아늑한 맛으로는 설악산의 사찰들 중에서 제일이며,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곳이 ‘오세암’이기도 하다.

■ 만해 오세암서 견성, 십현담 주석서 써
설악산은 지리산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산이다. 지리산이 웅장하다면 설악산은 화려하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명산론(名山論)에서 장엄함과 빼어남의 두 가지 잣대를 이용해 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도 했다. 설악의 오세암은 산경이 수려하고 기암절벽은 낱낱이 불보살의 형상을 했으며, 백두산 정맥으로 부터 금강산 줄기를 따라 반도 명산의 정기가 한 곳에 어우러진 곳이다. 설악의 오세암은 백담사에서 외설악으로 넘어가는 마등령 고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금강산을 찾았던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선사가 수도하기도 했던 곳이다. 또한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다. 설잠 김시습과 만해 한용운이 이곳 오세암에 머물면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은 매우 유명하다. 오세암은 만해 한용운이 88편의 시를 통해 ‘님과 나의 이별과 만남’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내용으로 긴밀하게 구성돼 있는 ‘님의 침묵’을 집필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오세암은 6·25한국전쟁으로 소실된 이후 중건하기 시작해 대웅전에 해당하는 ‘천진관음보전’과 요사채가 사맥을 잇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승방·객사, 새로 지은 산신각이 있다. 또한 이런 사연 때문인지 동자를 위한 동자전을 별도로 두고 있으며, 옛 절터가 근처에 남아 있다. 천진관음보전 계단 앞에는 오세암의 창건과 중창을 도운 소와 말을 새긴 석물(石物) 등이 앙증맞게 앉아 암자를 찾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만해 한용운은 금강산 건봉사에서 첫 수선안거 이후 지속적인 참선 수행을 해왔다. 공식적으로 출가한지 10년이 되던 1917년 12월 3일 밤10시 경 오세암에서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만해는 그때의 심정을 읊은 오도송을 남긴다. ‘男兒到處是故鄕(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속에 오래 젖어 있었나), 一聲喝破三千界(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트리니), 雪裡桃花片片紅(눈 속에 핀 복사꽃이 송이송이 붉구나)’ 이 심오한 깨우침은 ‘오랜 나그네의 시름 속에 갇혀 있다가 이를 문득 벗어남으로 가는 곳마다 모두 고향임을 깨달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진리는 덧없는 피안의 세계가 아닌 눈보라 몰아치는 모진 현실 속에서 붉은 꽃과도 같은 굳은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이리라. 

오세암에서 견성한 이듬해인 1918년 만해는 서울로 올라와 월간지 ‘유심(唯心)’을 창간해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된다. 문학인으로서 창작 열정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 대중불교와 생활 속의 참선이 화두
그렇다면 만해는 불교의 수행법인 참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는 만해가 만년에 기술한 ‘조선불교의 개혁안’이나 ‘선과 인생’ 등의 저술들을 통해 참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불교의 대상은 물론 일체 중생이다. 이것이 불교의 이상이므로 불교는 일체 중생의 불교요, 산간에 있는 사찰의 불교가 아니며, 계행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승려만의 불교가 아니다. …중략… ‘산문에서 가두로, 승려로서 대중에게’가 현금 조선불교의 슬로건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참선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선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선은 마음을 닦는 즉 정신수양의 대명사이다.’ -증보 한용운 전집 2(1979, 신구문화사)에서-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만해 한용운은 ‘대중불교’와 ‘생활 속의 참선’을 강조한 것이다. 김광식 동국대 교수는 ‘한용운의 대중불교·생활선과 구제주의·입니입수’라는 제하의 논문을 통해 “산중 불교가 아니라 도회지로 나와야 하는 불교, 전 중생 및 대중을 위주로 하는 불교가 돼야 한다는 게 만해 스님의 지론”이라며 “이런 입론에서 스님은 선 수행을 하고 깨달은 이후에는 당연히 구세주의로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선의 관점에서 본 그의 삶은 대중불교, 입니입수하는 구제주의의 실천의 다름이 아니었다”면서 “이는 만해가 지적한 깨달음 이후에는 반드시 대중불교로 나가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현실을 여의지 않고, 번뇌 중에 보리를 얻고 그를 실천해야 한다는 대중불교의 실천행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공식적인 출가지인 설악산 백담사와 오도처인 오세암은 만해 한용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서 불교를 접하고 수계를 받았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혼란한 세상으로 나아가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지금도 백담사를 찾으면 만해의 흉상과 시비, 기념관 등을 통해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문학정신을 접할 수 있다.

개혁가이면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민족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만해 한용운의 가장 깊은 심상에는 ‘불법(佛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해가 제시한 ‘대중불교’와 ‘생활 속의 참선’이라는 두 가지 화두는 지금도 유의미한 이유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500병상 종합병원 건립
  • 광천역·기존 노선, 그대로
  • 문재인 대통령, 충남혁신도시 선물줄까?
  • 그대, 가을에 취하겠는가!
  •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며
  • 실종된 박모 소방사 “소방관이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