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와 민간인이 공사비 모아 가설한 논산 원목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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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와 민간인이 공사비 모아 가설한 논산 원목다리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10.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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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10>
논산 원목다리는 원항천에 놓인 조선시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홍예석교다. 뒤로 호남선 철길다리가 보인다.

고종 광무 4년 홍수로 파괴, 승려와 민간인이 공사비 모아 재 가설
원목은 간이역원과 길목이 합쳐져 나그네의 휴게소·주막 이르는 말
다리 규모 길이 16m, 폭 2.4m, 높이 2.8m로 3칸의 홍예로 돼있어
성동면 원봉리 돌다리 1990년대까지 존재, 하천정비 하면서 사라져


사람이 지구상에 나타나면서 먹을 것을 찾아다닐 때 앞에 개울을 만나면 어떻게 건넜을까. 쉽게 자를 수 없는 나무를 걸쳐두고 건너는 것보다 주변에 큰 돌이 있으면 이것을 얕은 곳으로 하나둘씩 놓아가며 개울을 건넜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로 말하면 징검다리가 됐을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다리 형태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얕은 개울을 건널 때면 물에 잠기지 않을 정도의 돌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너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시의 다리가 지금은 전통문화의 다리로 불리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마을을 걷다보면 개울에 자연석이나 다듬은 돌을 놓아 건너다닐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징검다리에서 발전된 것이 나무와 석재를 이용해 좀 더 정교한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사람뿐만 아니라 우마차와 병기 등이 개울을 건널 수 있기까지 많은 발전을 거듭해 현대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다리가 건설될 수 있었을 것이다.

■ 화강암으로 만든 조선시대 홍예석교

논산 원목다리(원항교 돌다리)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충남 논산시 채운면 야화리 193-2에 있다. 원목다리는 물길을 가로질러 제 위치에 있지만 하천정비로 인해 하천의 폭이 넓어지면서 현재 다리로는 물이 들지 않고 옆으로 물이 흘러갈 뿐이다.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식량의 보고인 금강유역을 넘다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논산 강경의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자신보다 훨씬 키 큰 제방 아래에 웅크린 채 옛 영화를 추억할 뿐이다. 원목다리는 양끝을 처지게 하고 무지개처럼 가운데를 둥글고 높게 만든 조선시대의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중심 도로의 역할을 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에 놓인 돌다리이다.

논산~강경 간 국도변에서 원항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1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현재는 사용하지 않으나 과거에는 큰 다리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돌다리이다. 원목다리는 강경 미내다리에서 북쪽으로 논산~강경 국도인 도로에서 천변의 논길을 따라가다 보면 눈에 들어온다. 호남선 철도가 지나는 지점에서 조금 더 가 방축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 의자왕이 이곳에 화초를 심어 놀이터를 만들고 꽃철에 와서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들꽃미(뫼)라는 낮은 산의 서남쪽에 있다. ‘원목’(한자어로는 원항; 院項)이라는 이름은 간이역원과 길목의 뜻이 합쳐져서 나그네의 휴게소 겸 주막을 이르는 말인 만큼 이 다리 어귀에 그런 시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따온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공주에서 전주를 가는 길목에 놓인 만큼 당연히 붙음직한 이름이다. 다리의 칸은 홍예(虹霓)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홍예가 가장 높고 중앙 홍예의 정상부 종석 양쪽 끝에만 용머리를 새긴 것이 특징적이다. 홍예 사이의 바닥에는 치석재와 잡석을 섞어 채웠다. 윗부분은 석재를 두껍게 아랫부분은 가늘게 사다리꼴모양으로 끼워 맞춰서 아치형으로 튼튼한 돌다리를 만들었다, 밟을수록 튼튼해지는 원리를 이용해 쐐기를 박은 형상이다.
 

■ 충남유형문화재 제10호 지정된 돌다리  
원목다리는 미내다리에서 불과 2.7km 떨러진 거리에 있다. 백제 의자왕이 이곳에 화초를 심어 놀이터를 만들고 꽃이 피는 계절에 와서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들꽃미라고 불리는 낮은 산의 서남쪽 야화리마을 들판에 있다. 방축천(원항천)이라는 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원목다리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돌다리다. 미내다리와 전체 모양이 매우 흡사한 원목다리의 이름인 ‘원항(院項)’은 간이 역원과 길목의 뜻이 합쳐져서 나그네의 휴게소라고 불리는 주막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미내다리처럼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던 다리이며, 특히 은진현과 강경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던 것이다. 방축천에 자리하고 있는 이 다리는 지금의 물길 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길이가 짧지만, 들판을 농경지정리를 하면서 물길의 폭을 넓히고 물의 방향도 바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길의 흐르는 방향에 비해 약간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형태이므로 과거의 물줄기를 가름할 수 있다. 한자어로는 ‘원항교(院項橋)’라고 하며, 화강암 석재를 깎아 만들었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 16m, 폭 2.4m, 높이 2.8m로 3칸의 홍예로 돼있는데 가운데 칸이 조금 높고 양쪽이 약간 낮다. 정상부의 종석 양쪽 끝에는 용머리를 새겼고, 홍예 사이의 간지에는 치석재와 잡석을 섞어 채웠다. 통행로에는 턱이 있는 10개의 장대석을 바깥쪽으로 나오게 끼워 그 턱에 통행로 양쪽의 경계석을 꽂아 고정했다. 다리 옆에 세워 놓은 ‘원항교개건비(院項橋改建碑)’에 의하면, 애초 원목다리의 축조 연대는 명기돼 있지 않고, ‘광무 4년(1900)에 홍수로 파괴된 다리를 관민이 협력해 4130량을 모금 개건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고 적고 있다. 상당한 세월이 지나 사용되지 않는 돌다리지만, 축조된 돌 하나 빠짐없이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다리를 유용하게 사용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다리 주변 사람들은 정월 보름날이면 이 다리를 자기 나이만큼 왕래하면 그해의 액운이 소멸되고, 추석날에는 이 다리를 일곱 번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고 믿어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강경 미내다리와 논산 원목다리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하고, 다시 한양으로 통하는 중요도로의 가교역할을 했던 다리지만 지금은 다리의 기능을 잃고, 옛 모습 그대로인 채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석재를 잘 짜 맞춘 균형 잡힌 홍예와 무사석의 배치를 종석에 용머리를 새김으로써 다리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까지 새겨 넣은 것은 그 시대의 축조기술을 가늠할 수 있다.

논산은 논산천을 비롯해 노성천·연산천·공주천 등의 수로가 금강에 합류하면서 비옥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포구가 있었으며, 그 포구를 드나들던 징표로 조선시대에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돌다리를 여러 개 가설했다. 수탕교·요강교·주교·저포천석교 등 족히 열 곳이나 됐지만 그 많았던 옛 돌다리는 일제시대 때 신작로 개설 등으로 대부분 멸실됐다. 지금은 미내다리와 원목다리, 수탕석교 등이 복원돼 옛 돌다리의 모습을 간직한 문화재로 남아 있다.

논산지역에서 가장 아쉬운 돌다리로는 1990년대까지 존재했던 논산 성동면 원봉리 들판의 개천에 있던 원봉리 돌다리다. 이 돌다리는 하천정비 과정에서 행정관청의 무관심으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 지역주민의 제보로 사진작가 최진연이 실측한 결과 길이 7.7m, 폭 2.3m, 높이 2m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기대 사학과 조병로 교수에 따르면 “영조시대에 만들어진 ‘여의도서’의 ‘석성현지도’에 기록된 ‘요강교’로 추정되는데, 문화재로써 가치가 높은 돌다리였다”고 밝히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농경지와 하천정비를 하면서 ‘돌다리의 석재들을 한곳에 묻었다’고 하는데 과연 어디에 묻혀 있을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들의 제보만을 기대해 볼 뿐이다. <끝>

1990년대 까지 존재하다가 하천정비로 멸실된 성동 원봉리 돌다리.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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