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진주의 역사를 지키고 증언해 온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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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진주의 역사를 지키고 증언해 온 상징이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10.1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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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15>
경남 진주 남강변의 진주읍성 전경.

진주성 복원은 잊혀진 역사의 복원, 진주의 긍지와 자부심·정체성
토성이던 진주성, 왜구의 침입 대비 1379년 석성으로 고쳐 쌓아
임진왜란 직전 1591년 외성 쌓아, 흔적 없고 현재 내성만 복원돼
진주성, 일제강점기 훼손 해방 이후 1969년, 1978년에 복원·정화


경남 진주를 S자로 흐르는 남강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계천이다. 진양호에서 덕천강과 합친 뒤 동북동으로 유로를 바꿔 창녕군 남지읍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남강을 따라가면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충절 등 유서 깊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펼쳐진다. 진주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가장 근본적인 성격은 역사도시다. 진주는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중세, 근세, 근대, 현대까지 모든 문화유산을 함께 소유 하고 있다. 진주는 같은 크기의 신흥도시가 갖지 못한 역사적 자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를 지키고 증언해 온 상징이다. 현재 진주성은 조사와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고증이 부족해 졸속으로 복원이 이뤄졌다. 성벽의 성돌과 여장은 현대적 장비로 돌을 잘라 가공도 하지 않고 쌓았으며 촉석문과 공북문도 고증 없이 축조됐다. 내성 동북쪽 성벽 역시 축소해 원형이 훼손됐다. 내성 내부의 공원화도 문제다. 전국 대부분의 성지 복원사업이 마찬가지이지만 진주성도 예외 없이 잔디밭 정원만 있는 공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주성 복원은 잊혀진 역사의 복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곧 진주 사람들의 긍지와 자부심, 진주의 정체성이 될 것이다.

■ 진주성, 항쟁과 순절의 아픈 역사 서려
진주 남강변에 ‘진주 8경’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이 있다. 축성 연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토성이었던 것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1379년(고려 우왕 5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외성을 쌓았으나 흔적이 없고 현재 내성만 복원돼 있다. 내성 둘레는 1760여m, 외성 둘레는 4㎞가량이다. 1972년 촉석문에 이어 1975년에는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 일부와 내성 성곽을, 79년 성 안팎에 있던 민가를 철거하고 2002년 공북문을 복원했다. 1963년 사적 제118호로 지정됐다. 1592년 10월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이 벌어졌던 곳이다.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3800여 명의 군사로 왜군 2만여 명을 물리친 승리의 역사와 이듬해 6월 왜군과 2차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민·관·군 7만여 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순절한 아픈 역사가 함께 서려 있다.

진주성의 대표적인 명소는 촉석루(矗石樓)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누대로 남강변 경치가 빼어난 절벽 위에 솟아 있다. 남장대나 장원루라고도 부른다. 전쟁 때 지휘본부, 평화 시절에는 관리들의 놀이터와 과거시험장으로 사용됐다. 1241년(고려 고종 28년)에 목사 김지대가 처음 지은 뒤 8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1948년 국보 제276호로 지정됐으나 6·25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돼 1960년 다시 지어졌다.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형태로 사방에 벽이 없이 뚫려 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청풍명월’ 구조다. 누각 돌기둥은 창원시 촉석산에서, 대들보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왔다고 한다. 북쪽 현판 글씨는 영조 때 송하 조윤형이 썼다. 남쪽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것이었으나 민주당이 집권한 뒤에 판을 깎고 유당 정현복의 글씨로 바꿨다.

촉석루 아래 남강 가장자리에 의암(義巖)이 있다. 윗면은 가로 3.65m, 세로 3.3m로 편평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1593년 6월 29일 의기 논개가 촉석루에서 벌어진 연회에 참석해 왜장을 이 바위로 유인한 뒤 두 팔로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순국했다. 왜장을 껴안은 손가락이 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10개 손가락에 가락지를 꼈다고 전해진다. 1629년(인조 7년) 정대륭이 바위벽에 ‘의암’이란 글씨를 새겼다. 2001년 9월 27일 경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됐다. 의암 바로 위 ‘의기논개지문’이라 쓴 비각 안에 의암사적비가 있다.

촉석루 옆에 의기사(義妓祠)가 있다. 내부에 논개 초상이 걸려 있고, 처마 아래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과 당대를 풍미했던 진주 기생 산홍(山紅)의 시판이 걸려 있다. 촉석문 앞에는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를 읊은 변영로의 ‘논개’ 시비가 남강을 바라보고 있다.
 

진주성 외성의 성벽이 발굴돼 복원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핵심 유적지 원형 복원 중심 돼야
진주성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 해방 이후 1969년, 1978년에 걸쳐 두 차례 진주성 복원과 정화작업이 이뤄졌다. 오늘날 진주성은 모습을 갖추긴 했지만 조선시대 원형은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금의 진주성은 조선 후기 진주성의 내성 부분만 복원한 것인데,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를 회상하면 현재의 진주성을 전제로 해선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주성은 보다 정확한 역사를 반영하는 형태로 복원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진주성 복원은 진주성 성곽 전체의 복원과 성내 일부 시설의 복원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주성은 조선 초기, 임진왜란 때, 조선후기 등 각 시기마다 성곽 전체의 모습이 달라지고 또 내부의 시설들도 다르게 배치됐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조선 초기 진주성은 모습이 가장 불분명해 복원도 쉽지 않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광장 발굴 과정에서 이 시기의 성곽이나 주위 해자의 흔적이 나오면 성의 흔적과 남문 터를 광장 바닥에 표시하면 될 것이라고 본다. 또 성 내부의 시설도 복원해야 하는데, 당시 진주성 내에 어떤 건물이 배치되고 그 규모나 모양 등이 어떠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조선후기 진주성에 대해서는 현재 20종정도의 진주성도와 여러 관련 자료들이 남아 있어 복원하기가 유리하다”고 말하고 “조선 후기 진주성은 당시 진주 도심 경관과 연결해 당시의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데에는 매우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외성 북쪽을 두르던 대사지도 복원 돼야 의미가 있다. 아쉽지만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외성의 일부는 바닥에 그 흔적을 표시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복원해야 할 시설은 경상 우병영 관아(관아·부속건물)이다. 이 시설은 구한말 이후 경상남도 감영, 일제시대 경상남도 도청과 경남사범학교로 사용되기도 해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우병사를 보좌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우후(虞候·종3품)의 관아인 중영도 복원할 수 있으면 복원해야 한다. 진주성도와 발굴에 기초해 해당 건물의 위치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촉석루도 조선전기의 화려했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6세기 촉석루에는 이 건물 이외에 부속건물이 양 날개처럼 동서로 배치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외성과 관련하여 성곽 전체를 복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외동장대의 복원도 필요하다. 임진왜란과 관련해 무엇보다도 복원이 시급한 시설은 동문과 이를 둘러싼 옹성 부분이다. 이곳은 제 1, 2차 진주성전투 때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설명했다.

원시가지에는 진주성 이외에 진주목 관아 구역(객사도 포함), 진주진 영장관아 구역이 있었다. 또 농민항쟁과 관련된 진주읍장 구역이 있고 형평사 창립과 관련된 장소, 봉양초등학교 구역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이와 관련된 핵심 유적지의 종합적인 경관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됐다는 지적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인 장단기 계획을 수립해 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 고고학, 고건축 등 관련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며, 기관을 통한 교육과 홍보, 시민의 참여 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진주성을 장소 마케팅 차원에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인 요소를 상품화해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원도심 재생사업이 지속가능한 도시 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역사문화도시로 재생되는 단초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이유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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