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개띠, 1960년생들, 그리고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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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개띠, 1960년생들, 그리고 2010년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0.06.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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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의 세상렌즈, 오목렌즈]

베이비부머 1960년생인 아무개 씨, 전쟁 후 출산 붐을 타고 태어나 고도의 경제성장과 인구구조의 대변화 속에 살아오고 있다. 농촌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무개 씨,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도 미래를 꿈꾸며 학교를 다녔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무개 씨의 초등학교 시절, 한 학급 인원은 64.8명으로 콩나물 교실이었고, 대부분의 담임선생님은 남자선생님이어서 여자선생님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1960년대 당시 출생아 수는 지금보다 2.3배 많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에 베이비부머 세대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아무개 씨의 학창시절은 1969년 도입된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로 <뺑뺑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서울 등 대도시는 1974년 고교평준화로 인하여 뺑뺑이 세대로 지금의 학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기였다. 당시 홍성지역의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렀다. 1973년 당시 2746개에 불과했던 학원 수는 현재 7만2242개로 무려 26.3배 증가했다. 당시 대학에 입학한 아무개 씨는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대학생 교복에 뱃지, 모자 등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많은 추억을 기억으로 남기고 있다. 부모님이 소까지 팔아 등록금을 마련해 준 덕분에 아무개 씨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부분 대졸 학력인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생소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말인 1979년 당시 남녀 각각 29.2%, 20.7%였던 대학진학률은 현재 81.6%, 82.4%로 증가했다. 대학생이 되어 과 친구들과 미팅을 하게 된 아무개 씨, 빵집에서 만나 빵을 먹고 다방에서 커피를 마신 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드는 비용을 현재와 비교해보면, 물가지수로 본 빵 가격은 3.9배(1980년 31.4→2009년 121.8), 커피(외식)값은 10.6배(1980년 10.7→2009년 112.5), 영화관람료는 6.3배(1980년 17.4→2009년 110.1) 상승했다. 옛날엔 자장면이 200원이었다는 농담 같던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이 현실이다.

또한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열심히 일한 아무개 씨는 급격한 변화 속에 다사다난한 30~40대를 보낸다. 대학 졸업을 앞둔 아무개 씨, 건설업, 도소매업 쪽으로 취직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제조업체로 가는 친구들도 많고, 향후 수출입도 증가할 것 같다며 무역회사를 추천하는 선배도 있고 고민이다. 1986년 당시 광공업 25.9%,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서비스업 50.5%였던 산업별 취업자는 2009년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서비스업 비중이 76.6%로 급격히 증대하면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했다.

아무개 씨의 나이 서른 살, 집안에서는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후배들은 노총각노처녀로 부르는 눈치였고, 실제 그랬다. 1990년 남자의 평균 초혼연령 27.8세 여자 24.8세였으나, 2009년 남자 31.6세, 여자 28,7세로 결혼하는 시기가 점차 늦춰지고 있다. 아무개 씨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주위에 4남매, 5남매인 친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이도 다들 1명씩만 낳으려는 경향이다. 어느덧 40대가 된 아무개 씨, 전체 연령대 중 아무개 씨가 속한 연령대(40~50세)의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경향을 보인 반면, 흑자율은 많은 소비지출로 인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소비지출 규모도 아무개 씨가 속한 연령대가 가장 크며, 높은 소비지출은 주로 자녀양육을 위한 교육비에 쓰인다. 그야말로 자녀교육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쓰는 세대가 바로 베이비부머 세대다. 40대 초반의 아무개 씨는 무엇보다 일이 우선이었는데, 현재는 주5일제의 확대로 근로시간이 단축돼 여가활동에 조금 더 관심을 갖는다. 2000년 40~44세 남자의 월평균 근로시간은 208.8시간이었으나, 2008년에는 189.3시간으로 19.5시간 단축됐다. 반면 40대가 되어 부쩍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었지만, 주위에는 뇌졸중이나 암으로 쓰러진 친구들의 소식이 종종 들려와 걱정이 태산이다. 은퇴시기도 다가오고, 노후에 대한 대비도 부족한 상황에 이제 50대가 된 아무개 씨, 그에겐 현재와 앞으로의 일들이 더욱 걱정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58년 개띠들에게 들어봐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흔히 농담이 오고가는 자리에서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단어가 '58년 개띠'라는 말일 것이다. 몇 살이냐고 물어볼 때 몇 살이라고 답을 하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58년 개띠야?"다. 또는 "내가 58 개띠인데"라든지 "네가 58년 개띠냐"는 등의 말들이다. 이렇듯 '58년 개띠'란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붙은 이시대의 대명사가 됐다. 이 말을 수십, 수백 번씩 사용하면서도 왜 하필 '57년 닭띠'나 '59년 돼지띠'도 아니고, 또는 '46년 개띠'나 '70년 개띠'도 아닌 '58년 개띠'만을 특정해서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그 해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아서 일까?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58년에 대략 80여만 명 정도가 태어났는데, 이는 1957년이나 1959년에 태어난 숫자와도 비슷하다. 단순히 숫자가 많아서 특정집단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58년 개띠인가'의 문제다. 일단 58년 개띠들에겐 이들을 동지의식으로 묶어주는 키워드가 있다. 소위 58년 개띠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키워드들은 이를테면 콩나물교실, 옥수수 죽, 국민교육헌장, 중학교 무시험, 유신헌법, 고교평준화, 경제개발, 긴급조치, 장발머리 등등이다. 1950~53년의 한국전쟁 통에 흩어졌다가 자리를 잡는데 3~4년 걸렸을 것이고, 정착이 시작돼 애를 낳으면서 베이비붐을 이루기 시작해 아마 1958년에 절정에 달했던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애들이 많긴 많았다. 한 반에 70명 가까이 공부하였으니 말이다. 국민교육헌장이 5학년 때인가 발표됐는데, 말뜻도 모르고 그거 외우느라 끙끙대던 기억이다. 또 중학교 때는 유신헌법이 제정돼 고교 입시공부에 맞추느라 애먹었던 기억도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고 했던가. 아침이면 동네 스피커에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노래가 힘차게 울렸다. 그때는 학교 등하굣길에 어김없이 온 동네 아이들이 군인들의 행군행렬처럼 줄을 서서 다녀야 했다.

하지만 취직걱정은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경제가 나날이 발전했고 훈련된 사람은 여기저기에서 태반 부족했으니, 취직걱정이라기 보다는 잘살고 못사는 자들의 틈이 그때부터 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인지, 이전에는 덜하던 사회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외도 컸고 좌절도 깊었다. 거리에서는 늘 최루가스 냄새가 났고, 긴급조치에 야간통행금지, 장발단속 등등. 무엇엔가 눌리고 쫓기고, 그랬다. 꿈을 잃은 우리를 환호하게 만들었던 노래가 있었는데 <고래사냥>이다. 고래 잡으러 가자고 대낮에도 밤에도 고래고래 노래 부르게 만들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가난'이었다. 낡은 교과서를 보따리에 싸맨 채 밑창 달아난 기차표니, 진짜표니, 검정고무신을 신고 십여 리, 이십여 리 길을 걸어 등교했던 유년의 체험이나, 원조용 옥수수 빵과 분유가루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이들을 묶어주고 있는 것이다. 가난 이외에도 이들이 자라며 함께 겪은 사회문화적 체험은 또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반공소년 이승복을 매개로 한 무조건적인 반공교육, 달달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갈수도 없었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시작해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 프로레슬러 김일의 호쾌한 박치기 장면을 흑백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몰려가 눈치를 보면서 시청했던 세대, 헝그리 복서 홍수환의 눈물겨운 4전5기 신화를 목격했던 다소 서글픈 세대일망정 이러한 동일한 기억과 체험의 공유는 이들에게 결속감을 부여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듯하다.

특히 '58년 개띠' 중에는 무시험 전형과 고교평준화 정책이 추진된 배경의 이면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58년 개띠)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시험을 쳐서 들어온 게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뺑뺑이 돌려 입학한 놈들은 후배가 아니야'라는 선배들의 힐난과 조소를 접할 때마다 당시 열일곱이던 58년 개띠들 중 모범생은 속으로 박지만을 욕했다고 한다. 당시 홍성과 광천에서도 처음으로 중학교 배정을 뺑뺑이를 돌려 1번과 3번은 홍성중학교와 광천중학교, 2번은 처음 설립된 홍주중학교와 광흥중학교로 각각 배정했다.

하늘과 세상의 이치를 미루어 짐작한다

결과적으로 유신정권과 5공 정권이 이들 󰡐58년 개띠󰡑들을 훗날의 6월 항쟁에서는 넥타이부대로 길렀던 것이다. 까까머리에 새까만 교복을 입고 청춘의 빛나는 한 때를 속박과 부자유 속에서 보내야 했기에 그 반발심으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팝송에 빠져들고, 히피처럼 머리칼을 길게 길러 경찰의 장발단속에 골목길로 줄행랑치던 경험도 58년 개띠들의 동지의식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전두환이 주도한 5공화국의 공포정치도 58년 개띠들에게 절망보다 더 큰 결속감을 심어줬다. 유신 말기에 대학에 들어가 18년 군사독재정권이 부하의 총탄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목격했고, 1980년 오월 광주민중항쟁을 직접 지켜보고 경험했으며, 5공화국의 탄생과정과 전횡까지 겪으며 20대 초반을 보냈기에 어떤 세대들보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다고 본다. 이러한 열망은 58년 개띠들이 서른 살이 되던 1987년 '6월 항쟁'에서 제대로 한번 발휘되는데 당시 도심으로 쏟아져 나와 학생들을 격려하며 함께 구호를 외쳤던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선봉이었던 58년 개띠들에게 서른이란 잔치는 끝나는 나이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나이였다. 대부분이 77학번으로 대학에 입학인 '58년 개띠'들은 이미 유신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서울의 봄을 맞이했으나 곧바로 이어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과정에서 '58년 개띠'들 중 상당수는 졸지에 수배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자유와 민주를 요구했던 뜨거웠던 1980년 '58년 개띠'들은 민주화 운동에 나서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압군이 되기도 했던 역사적 아이러니를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른바 '낀 세대'인지라 위로부터는 눌리고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오는 진퇴양난의 입장에 선 58년 개띠들의 오늘을 생각하면 이 시대가 주는 울림은 더 크다. 이제 '하늘과 세상의 이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50줄에 접어든 '지천명'. 지금도 '58년 개띠'들의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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