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공비토벌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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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공비토벌작전
  • 황규창<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장>
  • 승인 2010.06.2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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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창의 내가 겪은 6.25 ②

<황규창 약력> △1929년 구항면 공리 출생, 1943년 갈산초등학교 졸업, 1949년 군 입대(보병 제9연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기습 남침으로 1연대에 편입 전투 참가, 10월 18일 함경도 원산지구 전투에서 부상, 10월 30일 부산3육군 병원 후송 입원 △1951년 2월 20일 태백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해 완전 소탕 후 북진, 4월 30일 38선 최전방(금화지구) 배치, 1951년 6월 천불산전투. 734(모택동고지), 633(김일성고지), 424(무명고지) 전투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저격능선전투ㆍ오송산전투ㆍ백마고지전투ㆍ방송고지전투ㆍ화살촉고지전투 등 수많은 전투 참가 △1956년 4월 18일 보병30사단 91연대에서 특무상사로 명예 전역 △1974년~1982년 마을이장 및 면정화위원 역임 △2007년~2008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장 역임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

우리군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하여 반격을 개시 도주하는 적의 뒤를 쫓아 경북 청송을 거쳐 강원도 평창을 경유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진격 대접전 없이 양양까지 적의 패잔병을 수 없이 포로로 잡으며 진격하니 양양군민들이 국방군 만세 소리를 외치면서 환영해 주었다. 우리가 진격하는 동안 퇴각하는 인민군은 피난민속에 섞여 주간에는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아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밤에는 적군으로 숨겨온 무기로 아군을 공격 하는 등 북진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는 계속 되었다. 이때 포로로 잡힌 인민군중 남한에서 지원한 의용군도 다수 있었다. 수많은 포로를 인계하고 우리부대는 계속 진격하여 속초를 거쳐 고성까지 큰 접전 없이 진격하는 동안 투항하는 패잔병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우리부대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재정비 한 후 명에 의거 38선 이북 땅으로 진격하여 해금강을 거쳐 계속 산중으로 북진하니 신고산 시가지가 보였다. 때는 늦은 가을이라 과수원에는 사과가 빨갛게 익어 오래간만에 사과를 따서 먹고 신고산을 지나 함경도 원산으로 가는 험난한 산을 넘는 동안 적군의 수차례 기습 공격을 받았으나 사기가 떨어진 적군은 도주하기에 바빴다. 원산 시내를 눈앞에 두고 최후로 발악하는 적군을 퇴각시키고 원산을 함락하여 점령군이 되고 보니 승리의 감격이야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원산 시내를 돌아보니 유엔군의 공중 폭격으로 거의가 파괴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였다. 우리 부대는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함흥방면으로 북진 중 후퇴하던 적군의 기습공격으로 적과 치열한 전투 중 나는 대퇴부 좌우에 4발의 관통상의 부상을 입고 원산 국군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때가 1950년 10월 20일로 당시 계급이 일등중사였다.

나는 약1주일동안 치료 후 함께 후송되었던 부상병과 함께 야간을 이용하여 원산항에서 미군화물선에 우리를 승선시켜 부산 제3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원 시설이래야 부산 토성국민학교를 사용했기 때문에 병실도 없고 마루 바닥에 모포 1장을 깔고 1장은 덥고 난로도 없이 겨울철을 보내고 있는 환자들의 환경은 말 할 수 없이 열악하였다. 주간에는 조용하다가 야간에는 중상자의 고통 신음소리가 교실 전체를 울리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때는 동절기라 감기환자와 동상환자까지 늘고 있어 말이 후송병원이지 집단 수용소나 다름이 없었다. 병원생활 2개월 정도 지나니 상처도 어느 정도 완치가 되었으나 계속 후송되어 오는 병사들의 말에 의하면 중공군이 개입되었다는 소식과 전방의 아군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며칠 후 상부에서 완치된 병사를 원복 시켜 전선에 재투입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나와 함께 거동이 가능한 병사들은 무조건 퇴원시켜 대구보충대에서 대기 7일 만에 집결된 병사와 함께 화물열차에 실려 경북영주를 거쳐 의성역에 하차하여 모 고등학교에 집결하였다. 나는 부산에서 훈련받고 온 신병과 함께 보병 2사단 32연대에 보충 편입되었으나 부대편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1개 중대에 장교는 중위 1명과 소위2명 하사관은 본인 포함(일등중사)3명이고 분대장 및 향도도 부산에서 4~5일간 훈련 받은 신병들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신병들을 교육시키고 동료 하사관과 장교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여러가지로 노력을 하였다.

이때의 전황은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었고 미처 도주하지 못한 인민군은 지역 주민을 선동하여 빨치산으로 활동 아군의 후방 부대를 괴롭히고 있었다. 당시 우리 부대는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비를 토벌하는 임무였다.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으로 다양한 전술이 요구되는 작전으로 부대원의 사기와 전투 능력 질서유지, 명령, 복종 등이 매우 중요하였다.

 

 

 

 

 

 

 


공비토벌 작전

우리부대는 경북 의성을 출발하여 예천. 점촌. 감촌 지역의 공비를 완전히 소탕하고 다시 대구 팔공산. 군위일대 작전에 투입되어 팔공산 동북방향 의흥.하수둥 모고지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 패잔병 부대가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리는 중이였다. 그때가 51년 2월말로 기억이 된다. 밤이 되니 계곡의 눈이 녹지 않아 은세계로 변하여 전방시야가 유리하게 확보되었다.

나는 의흥에서 대구를 통하는 도로변 약7~80m 거리를 둔 능선에 경기관총 2문과 화기분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공비들의 눈 밟는 소리가 와삭와삭 들려오며 검은 그림자도 보이기 시작했다. 공비들 속에서 여자의 음성도 들리고 점점 다가오는 공비는 몇 십 명이 아니라 도로를 따라 꼬리를 물고 수백 명이 되어 보였다. 나는 잠시 긴장하여 상황을 파악해 보니 공비들의 이동방향이 아군진지 전방 30m지점 계곡을 통하여 팔공산 고지를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격 명령과 동시 에 예광탄을 공비를 향하여 발사했다. 경기관총의 집중사격과 화기소대에서 박격포 공격을 퍼부으니 공비들은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혼비백산 도주하였으며 약 30분가량 교전 후 고지에서 총성과 함께 함성소리가 요란히 나더니 잠잠하였다. 악몽의 괴로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진지전방을 살펴보니 수많은 공비의 시체와 아직도 부상을 입고 살아 있는 공비를 생포하여 진지로 끌고 왔다. 벌벌 떨고 있는 공비를 문초하니 그는 인민군소위였다. 중대전황이 궁금하여 연락병을 보내 보았더니 돌아와서 하는 말이 1소대장 및 화기소대 선임하사가 전사하고 병사들도 많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우리소대는 최전방에 배치되어 적과 최초로 교전하였으나 한명의 부상자도 없이 무사했다. 인민군 포로를 데리고 8km를 행군하여 대대 집결 장소에 도착하였다. 집결장소에 도착해 지난밤 상황을 들어보니 아군의 피해가 너무 많아 연대장 및 대대장이 중대장을 문책 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연대장 및 대대장이 도착하여 중대장에게 지난밤 공비 소탕작전에 실패한 결과를 묻더니 전과는 내가 생포한 인민군 소위1명과 공비 수백명중 수십 명 사살과 아군 피해는 중대의 1/3이상 병역이 손실되었다는 말과 함께 정확한 정보와 유리한 위치에서 오히려 적에게 반격을 받았느냐 지휘관으로써 책임을 묻겠다며 총살을 명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대장 및 중대장이 연대장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며 애원하는데 이를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의 마음은 어떠하였는지 전장에서는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신념을 우리 소대원은 그날 밤 전투를 통하여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되었다.

우리부대는 경북 풍기지역에서 잠시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인원점검 및 무기를 보충 받고 도주하는 공비를 추격하여 영주 단양 소백산맥 일대를 포위하여 완전히 소탕하고 충북 제천을 경유하여 원주에 도착하니 민간인은 보기 드물고 중공군 시체만 널려 있었다. 우리부대는 원주시내 모 초등학교에 주둔하여 중공군 시체 치우기와 부대 재편성 훈련을 약1주일간하고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하여 명에 의거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투태세에 임하였다. 당시 계급은 이등상사로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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