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산 전투와 저격능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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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산 전투와 저격능선 전투
  • 황규창<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장>
  • 승인 2010.07.1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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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창의 내가 겪은 6.25 ④

<황규창 약력> △1929년 구항면 공리 출생, 1943년 갈산초등학교 졸업, 1949년 군 입대(보병 제9연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기습 남침으로 1연대에 편입 전투 참가, 10월 18일 함경도 원산지구 전투에서 부상, 10월 30일 부산3육군 병원 후송 입원 △1951년 2월 20일 태백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해 완전 소탕 후 북진, 4월 30일 38선 최전방(금화지구) 배치, 1951년 6월 천불산전투. 734(모택동고지), 633(김일성고지), 424(무명고지) 전투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저격능선전투ㆍ오송산전투ㆍ백마고지전투ㆍ방송고지전투ㆍ화살촉고지전투 등 수많은 전투 참가 △1956년 4월 18일 보병30사단 91연대에서 특무상사로 명예 전역 △1974년~1982년 마을이장 및 면정화위원 역임 △2007년~2008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장 역임 

 

 

 

 

 


우리 중대는 예비부대로 편입되어 최전선의 후방에서 병력보충 및 다음 전투를 위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작전명령을 받고 금성방면으로 이동, 연합군(콜롬비아군)과 진지교대 후 진지방어 및 수색 잠복근무, 전투정찰 등 작전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작전명령에 따라 금성방면 우측 무명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 중인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었다. 때는 51년 11월 하순으로 야간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다.

당일 0시를 기하여 공격 명령이 하달되어 일사천리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적은 견고한 진지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우리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어 자체 화력으로는 더 이상 공격이 어려웠다. 기갑부대 지원을 요청하여 오후 18:00시경 전차의 집중 포격으로 공격을 재개하여 고지를 탈환하였다. 중공군도 이 고지를 뺏기면 김화로부터 금성으로 가는 도로의 남쪽으로는 완전히 퇴각해야 했다.

퇴각하는 적을 따라 우리는 금성벌판과 강이 똑바로 보이는 424무명고지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 방어전을 계속하였다. 얼마 후 51년 12월 초순경으로 생각된다. 상급부대에서 전문이 하달되었는데 미8군사령관 벤푸리트 장군의 명으로 모든 전선(155마일)에 1주일간 총포 사격 금지령이 하달됐다. 천지가 진동하던 총성과 포성이 멈추고 비행기 공습도 중단하여 온 산천이 잠잠하였다. 이렇게 3개월 가까이 피아간의 신경전으로 수색 및 잠복근무, 전투정찰을 통한 적의 생포․사살 등 전과를 올리기 위한 미8군 사령관의 위장 철군 작전은 끝이 나고, 52년 2월경 금화방면으로 이동하여 인접 부대와 교대 후 진중 근무에 투입되었다.

얼마 후 우리 중대는 적의 전초기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적의 병력은 약 1개 소대로써 우리는 중대 병력으로 공격하기로 하고 새벽04시에 식사 후 출동 준비를 마쳤다. 우리 중대원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재배하고 적진으로 향하였다. 적의 전초기지를 포위, 적과의 거리는 불과 2~30미터. 적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가 잠복 초병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날이 밝기 시작하여 능선에 적군의 움직이는 모습과 토치카의 위치를 발견하고 공격 명령을 하달하던 차, 중공군이 우리를 발견하고 일제히 수류탄 공격을 해 왔다. 우리도 즉각 사격으로 응사하여 쌍방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적과 너무 가까워 소총사격은 불가했고, 수류탄으로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면서 육박전을 전개했다. 10시 조금 넘어서 무명고지를 점령하고 교동 호에 숨어있는 적을 사살하면서 살고 싶으면 투항하라고 했다. 몇 명은 반항하더니 바로 두 손을 들고 투항하였다. 우리는 기습 공격을 성공하고 철수명령을 받아 14시경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날 전과는 중공군 생포 6~7명, 1개 소대 20여명 사살, 적의 진지 완전 파괴로 성과는 좋은 편이였다. 아군의 피해는 부상 4명뿐이었다. 나는 이날 전투의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계급은 이등상사였고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1952년 3월로 기억된다.

우리 중대는 금화읍을 중심으로 동서남 북으로 돌면서 주저항선에서 약간 후방으로 이동하여 집결하라는 명을 받고 저녁식사 후 중대별로 야간이동이 시작되었다. 거리는 정확히 모르나 약 6~7시간 거리였다. 그날따라 억수같은 장맛비가 온종일 쏟아져 행군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집결지에 도착하니 다음날 04시경이었다.

중대별 정해진 천막으로 들어가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온종일 포식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다음날부터 부대별 장비점검 및 병사들의 건강점검, 손실된 장비보충과 계속된 전투로 부족한 병력을 보충 받아 매일같이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오송산 전투

계속 훈련을 하던 중 또 다시 부대 이동 명령을 받고 금화북방 오송산 계곡 서쪽 능선으로 미군부대와 진지교대를 하였다. 그 시기는 동년 6월 경으로 기억한다. 우리 서쪽으로 598고지는 우리 진지보다 150~200미터 높고 거리는 약 300미터 직사화기 유효사거리 이내였다. 적군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598고지와 연계된 능선 봉우리는 미국 7사단이 방어 중으로 적의 고지보다 약 50m 낮으며 적의 진지와도 약 100m 거리에 있었다. 미군들은 기갑부대 지원으로 598고지인 적의 진지에 전차포로 하루에도 20여 발씩 발사하며 자기네 진지를 보호하고 있었다. 우리 중대 우측으로는 대대오피(OP)와 타 중대가 연계된 능선은 스탈린고지로써 오송산계곡 능선, 일명 저격 능선이라 한다. 저격능선의 높이는 약 400고지 정도이며 아군진지보다 5~60미터 높고 주저항선과의 거리가 약 300미터로 진지보수 및 아군의 일거수 행동에도 매우 위험했다. 주간에는 머리털하나 노출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능선 좌측에 우리 진지와 일직선으로 되어있는 돌 바위로 형성된 적의 진지와 아군진지와의 거리가 약100m정도 밖에 되지 않아, 적의 저격수가 매복하여 아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노출만 되면 총에 조준경이 부착되어 있어 백발백중으로 명중됨으로 아군의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여 저격 능선이라 한다.

저격능선 전투

우리 중대는 계속 진지구축 및 야간 잠복근무를 하면서 3개월간의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소규모 기습 작전은 있었으나 전투가 다소 소강상태였다. 동년 10월초 아군 3대대가 31연대와 진지 교대후 후방으로 이동하여 약 1주간 주야로 맹훈련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간접적으로 3대대가 저격 능선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번에 대작전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동년 10월 13일 오후 15시에 각 소대장은 중대장 진지로 모이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중대장이 하는 말이 10월 14일 05시에 저격능선 공격을 개시한다는 명령과 함께 각 소대별 공격 위치를 지도상에 명시해 주었다. 드디어 10월 14일 새벽 02시경 식사를 하고 03시까지 공격대기 지점까지 도착하니 각 소대장과 중대장이 먼저 와 있었다. 04시 30분경 고지 정상에 각종 포사격으로 천지가 진동하더니 05시가 되니 포사격이 멈추고 일제 공격 개시 명령이 하달됐다. 캄캄한 밤이지만 적정을 살피면서 목표를 향해 적으로부터 발견될 때까지 조용히 고지를 향해 침투했다. 7부능선까지 진격하던 중 어느덧 날이 밝아 쌍방의 행동이 노출되어 피아간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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