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수호신 미륵 섬기며 화합 이루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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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수호신 미륵 섬기며 화합 이루는 마을
  • 이은성 기자
  • 승인 2010.08.0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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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홍북면 용산리

▲용갈산마을 전경

홍성읍 대교사거리에서 홍주의사총을 경유해 금마천을 따라 6km가다보면 용산리의 입구를 알리는 용산교와 돌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용산리는 용두와 용갈산 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전면에 금마천이 흐르고 넓은 농경지를 형성하고 있다. 뒤편엔 낮은 야산의 산줄기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그 산세가 마치 용과 같다 하여 용머리 자리는 용두리라 불리며 용의 꼬리는 용갈미, 용갈산 이라 하였다. 용산리의 생활권은 산세를 중심으로 소구릉지상의 집촌취락과 산촌취락으로 크게 나뉘어져 집촌취락의 주 농경지는 논농사, 밭농사, 목축, 딸기재배가 동시에 행해지고 산촉취락의 주 농경지는 논, 밭, 과수원, 인삼밭, 목장 등 다양한 농경지로 이뤄진다. 또 용의 머리 형국으로 금마천 방향으로 튀어나와 있는 산등성이를 경계로 용두와 용갈산 마을이 구분된다.

▲용두마을 전경



용두와 용갈산 마을의 경계에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만큼 오래된 미륵이 하나 있는데 특징으로 허리 부분에 이어붙인 흔적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때 벼락을 맞아 몸퉁이가 부러져 논바닥에 뒹굴었는데 무게 때문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을 노인의 꿈에 백마 한 마리가 나타나 미륵의 몸을 다시 이어 붙여달라 부탁을 하여 동네사람들이 얘기를 전해듣고 힘을 합쳐 회를 이용해 다시 붙였다고 전해진다. 또 30여년 전 개인별로 명절에 미륵제를 올리는 식으로 바뀐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우연이었는지 젊은 사람들이 사고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마을 어른들이 모여 회의한 끝에 미륵을 용산리의 수호신으로 생각하는게 좋다하여 다시 마을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1989년 8월 14일에는 미륵을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지만 무사히 되찾았다. 현재 칠석에는 용갈산, 백중에는 용두에서 미륵제가 열리며 그렇게 두 마을 사람들은 만나고 함께 즐기며 용산리의 자랑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륵을 중심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측길가엔 효자 정용해(鄭龍海)의 정려가 있다. 정용해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어 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한 겨울에도 잉어를 잡아 드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 수명을 연장시키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해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결국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엎친데 덮친격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비탄에 빠져 3년상을 치른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홍주 유림이 추천하고 관찰사가 상신하여 효자명정을 받게 되어 1983년(고종30)에 그의 고향 용산리에 정려가 건립하게 됐다. 정려옆에는 굵기가 세아름이나 되는 고목이 한그루 있었으나 얼마전 고사했다.

▲미륵


미륵을 거쳐 용두마을에 들어서면 용두회관을 중심으로 정면 마을 들판에 큰 정자나무 한그루가 있다. 정자나무는 용두마을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백중날 미륵제와 더불어 간단히 고사와 마을 잔치를 벌이는 곳이다.

▲용두마을 모정


용산리의 전통으로 용두마을 동계와 용갈산 두레가 전해져 온다. 용두마을 동계는 이장이 동계장이 되는데 그 시초는 알 수 없으나 동네 어른들이 어린 시절부터 전해져 왔다 하여 예전에는 이장과 함께 '구서기'라 부르는 글자 잘 아는 사람이 보조를 했다. 6?25 한국전쟁 이전엔 계칙이 엄격하여 불효자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이장댁 사랑방에 데려와 호되게 야단을 치며 때리기도 해 이른바 '동네볼기'라 하였다. 이사오는 사람은 '추입조' 벼두말을 내고 계원이 되었지만 지금은 신입례 자체가 사라졌다. 현재는 매년 연말에 마을 회관에 모여 예결산을 하는 총회를 열고 회식을 하며 1년을 마무리하는 행사를 갖는다.
▲효자 정해용 정려


용갈산마을 두레는 미륵제와 더불어 이뤄졌다. 6ㆍ25 한국전쟁 전에 이미 두레는 사라졌지만, 그 시절 강성했던 용갈산 두레의 주민들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같은 날 옆동네에서도 두레가 나면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불쾌한 싸움이 아닌 힘겨루기의 차원이었으며, 용두마을 사람들과 쥐불싸움을 할때엔 질세라 열심이었지만, 면 차원으로 체육대회가 열리면 한 팀이 되어 한마음으로 응원했다. 두레는 어려운 세대부터 찾아가 모를 심고 논을 메줬으며, 칠석날이 되면 미륵제를 올리고 용대기를 들고 하루종일 풍장치고 먹고 놀았다. 인심 좋던 시절이라 동네 주민이 모두 동원되어 일을 하는 '부역'이 있을 때에도 아픈사람이나 70세 이상 노인은 제외해 주었으며 멀쩡한 사람이 일을 못할 때에만 돈을 내도록 했다.

▲용산교

용산리는 현제 92세대 2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 큰천이 흐르고 있어 농사짓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삽교천 제방을 쌓기 전에는 물이 마을까지 들어와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다른 지역이 가뭄에 고생할 때에도 용산리는 물 걱정 없이 땅이 비옥하였다. 주소득원이 벼농사고 최근에는 보리, 사과, 복숭아, 배 등을 키우는 가구가 생겼고, 부업으로 냉이를 재배해 수익을 얻기도 한다. 교육열이 높았던 용갈산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대학생이 많이 있었고 마을출신들이 사회에 진출해 잘 산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출향민으로는 이사관출신 김돈수 씨, 금융감독원 최한무 씨, 현재 교편을 잡고 있는 홍동중학교 이정로 교장이 있다.
▲용갈산마을회관


현재 용산리는 정택원(64) 용갈산 이장을 비롯해, 이병근(79) 용갈산 노인회장, 김순자(59) 용갈산 부녀회장과 정찬희(61) 용두마을 이장, 박영수(74) 용두마을 노인회장, 이은미(43) 용두마을 부녀회장등 마을의 대소사를 돌보며 마을 발전과 어르신들을 위해 노심초사 하고 있다. 정택원 용갈산이장은 "용갈산의 경우 마을 용수로 둑이 흙으로 이뤄져 비나 두더쥐에 의해 새는등 용수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며"마을에 설치된 물탱크또한 산촌취락지역 집들에 비해 저지대에 위치해 이런 경우 수압이 낮아 원활한 공급이 어려워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용두마을회관


용산리에는 두 개의 마을회관이 마련돼 있는데 용두마을의 경우 마을회관에 어르신들을 위한 탁구대와 운동기구가 마련되어 있지만 공간이 비좁아 어르신들이 편하게 운동을 하지 못한다며 정택원 용갈산마을이장 과 정찬희 용두마을이장은 "마을에 대부분인 어르신들을 위한 넓은 마을회관 증축과 실질적인 운동기구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이병근 용갈산노인회장은 "농촌의 고령화로 인해 농업을 이끄는 젊은층에 해당하는 평균연령이 50ㆍ60대들이다"며 "용갈산 경로당의 경우 남17명, 여28명으로 노인회가 이뤄졌는데 이중 15세대가 독거노인들이라 주민과 면의 관심이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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