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학교 큰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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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학교 큰 운동회
  • 이은강 교사 (광성초등학교)
  • 승인 2010.10.1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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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강 교사
하늘 가득 산 그림자가 출렁이는 청명한 가을날, 오늘은 선생님께 며칠 전에 열린 이곳 작은 학교 운동회의 이야기 한 도막을 전할까 합니다.

「 "샘, 낼 비 오나요? " " 비 절대 안 옴. 낼 날씨 완전 맑음 " 」

운동회 전날 밤, 아이가 보내온 문자메시지에 호언장담 답문을 날리기는 했지만 저 역시 날씨 걱정에 잠을 설쳤지요. 낮에만 해도 운동장은 간밤에 내린 비로 흥건히 물이 고여 있었고 선생님들은 진종일 물을 퍼냈거든요. 운동장을 빙 둘러 물빠짐 길을 내느라 허리가 뻐근하도록 삽질을 한 교감 선생님, 바짓단을 걷어 부치고 바가지로 물을 퍼낸 새내기 여선생님들, 근사한 체육관은 고사하고 모래라도 몇 트럭 깔아주지 못한 걸 내내 자신의 잘못인양 미안스러워하시던 교장 선생님…. 그 분들 모습도 눈에 선했고요.

마침내 날은 밝았고 운동회 날씨 완전 맑음!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 전교생 서른 여섯 명의 운동회가 펼쳐질 참입니다. 대도시에서는 한 분 학부모라도 빠질세라 촉각을 세우지만, 이곳 선생님들은 태풍 곤파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데다가 하루 일손이 바쁜 학부모들에게 행여 부담이 될까 순전히 아이들만의 운동회를 열기로 계획했지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필요와 취향에 맞춰 상품을 고르고, 간식을 준비하고, 체격과 능력을 고려해서 경기에 참가시키려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상상되시는지요? 지난 수 십 년 간 도시 학교 생활에만 물든 제게는 신선하다 못해 충격이며 감동이었습니다. 도시의 다인수 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하다 보면 내 반 아이조차도 하루 종일 이름 한 번 불러주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 아니었나요? 그런데 막상 학교 시설은 이를 데 없이 열악하답니다. 해묵은 시멘트 덩어리가 부슬부슬 떨어지는 실외 콘센트에 힘겹게 마이크를 꽂으며 교무부장 선생님이 너스레를 떠시더군요. 우리 학굔 있는 거 빼고 있을 거 다 없는 학교라고.

있는 거 빼고 다 없는 채로도 준비될 건 다 준비되더군요. 차일도 치고 풍선아취도 만들어 세우고 상품도 그득하게 쌓아놓고 고물 시디피에선 음악도 짱짱 울리고…. 변변한 마이크 시설 하나 없어도 귀한 아이들을 데려와 폐교직전의 학교를 살려낸 선생님들의 힘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옹골찬 광성. 시작 시간 한 시간도 전부터 아이들은 의형제별로 색깔 맞춰 해 입힌 티셔츠 가슴 한복판에 새긴 그 글귀처럼 옹골찬 모습으로 운동회를 기다렸습니다. 학교를 품어 안은 저 산의 넉넉함 때문인가. 시작까지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리며 서 있어도 아이들은 전혀 보채거나 불평하거나 흐트러지질 않았어요. 북적대는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서 잠시도 참지를 못하고 걸핏하면 짜증내며 폭발하는 도시의 아이들과는 정말 대비되는 모습이지요.

서른 여섯 명 작은 학교 아이들이 수 천 명 큰 학교 아이들의 운동회와 다름없는 종목을 차근차근 펼쳐나갔습니다. 유난히 몸집이 작은 아이 기현이가 달릴 때 담임 선생님은 목이 쉬도록 외치시더군요. 기현아 힘내/우리 기현이 참 잘 달린다. 우리 기현이. 그래요. 이 학교에서는 한 명 한 명 아이마다 선생님들의 참 소중한 󰡐우리 아무개󰡑랍니다. 칭찬이, 나눔이, 공경이…. 이름도 정겨운 의형제들의 경기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고 가슴이 따뜻해졌지요. 친형제보다 더 사이좋게 서로 묻고 알려주고 격려하며 경기에서 이기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동안 의형제 이름 그대로 서로 칭찬하고 나누며 베푸는 삶을 저절로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경기 도중에 간간히 운동장에 들른 학부모 몇 분은 멀리서 아이 얼굴 잠깐 찾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일터로 돌아가시더군요. 내 아이만 불러내서 음료수 건네며 트랙 안까지 들어와서 응원하는 학부모? 그런 사람 이곳엔 없습니다.

이리 데굴 저리 데굴 큰 공을 굴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으며 진심으로 아이들을 응원했더랍니다. 얘야, 큰 인물은 자고로 산 좋고 물 좋은 산간벽지에서 난단다. 부디 지구의 한 축을 힘껏 돌릴 훌륭한 인물로 자라나렴.

이곳 저곳 널린 쓰레기를 치우며 어수선한 파장을 맞던 도시의 운동회와는 달리 아이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너무도 상큼하고 예쁘게 마무리 체조를 하며 운동회를 끝냈습니다. 상품을 한아름 받아든 우리 반 서현이가 입이 귀에 걸려 종알대더군요. 와우, 참 좋은 운동회, 상품도 잔뜩 받은 진짜 큰 운동회라고. 아, 정말 그랬습니다. 작은 학교 큰 운동회, 있는 거 빼고 제대로 된 물건 하나 없어도 아이들 가슴이 이토록 충만하니 이보다 더 큰 운동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님, D시를 떠나 이곳 학교에서 단기간이나마 교사 노릇을 하며 저는 날마다 정화되고 축복받는 기분입니다. 제 어설픈 문장력으로는 이곳의 참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종종 샘물처럼 맑은 이 곳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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