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 조령(鳥嶺) '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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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 조령(鳥嶺) '새재'
  • 유태헌 서울본부장
  • 승인 2010.11.1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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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19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11월 6일~7일
구 간 : 이화령-조령산-신성암봉-깃대봉-조령제3관문-마패봉-부봉-탄항산-하늘재
도상거리 : 18.36km
산행시간 : 10시간 30분 소요 

 

 



우리조상은 한반도의 굳건한 뼈대인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줄기에 수많은 고갯길을 만들어 세력 확장을 위하여 싸우고, 때로는 화합을 위해 문물과 정을 교류했다 . 남한 땅만 해도 대관령, 추풍령, 여원재, 하늘재, 이화령 등 백두대간은 지리, 역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큰 고개를 거느리고 있다. 이 가운데 새재는 조선시대에서 가장 큰 고개로 명성을 드높였고, 하늘재는 백두대간에서 기록상 가장 먼저 열린 고개다. 인적 뜸한 이화령(梨花嶺 548m), ' 대동여지도' 에는 지금의 한자로 쓰인 배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화현 (伊火峴)'이라 기록 되어있다. 문경과 연풍을 잇는 이화령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 고개는 아니었다. 그러다 일제 때인 1925년 현재 3번 국도의 모체인 신작로가 뚤리면서 통행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지나면서 호젓한 편이다. 이화령 고갯마루 서쪽에는 연풍고을 이다. 연풍 고을에서는 단원 김홍도(金弘道)를 떠올리게 된다. 46세의 나이로 그의 마지막 벼슬살이인 연풍고을 원님(1791-1795)시절 매 사냥을 좋아했던 단원의 자화상격인 '호귀응렵도' 는 연풍 현감 시절에 줄긴 매 사냥 장면을 그린 것이다. 미술학자들은 단원의 그림 분위기가 연풍고을 원님을 거치면서 화원풍에서 사대부들의 문인화풍으로 바뀌었다고 진단 한다.

새벽 3시경 이화령을 출발한다. 이화령 표지석을 뒤로하고 산불 감시초소를 지나 능선 오른쪽 사면으로 올라 주능선에 접속 20여분 치고 오르니 헬기장이다. 잠시 쉬었다 올라가니 또 헬기장 또 헬기장... 여원재-봉화산 구간은 묘지가 많던데 이곳은 헬기장 천지다. 잠시 후 조령샘에 도착하여 목을 축이고 움푹 패인 나무계단을 오른다. 우측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은 전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조령산(1017m)이다(04시30분).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선상에 자리 잡은 명산인 조령산은 전체적으로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우로져 마치 한 폭의 산수화와 같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성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 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가는 조령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개인 문경새재를 품에 안고 있으며, 산세가 우람한 주흘산과 마주 하고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접했다. 특히 정상에서 깃대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설악산 공륭능선의 축소판으로 뛰어난 경관미와 위험을 도사리고 있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흘산의 주봉(1075m)과 영봉(1106m) 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북동쪽으로는 거대한 바위봉인 부봉(935m)이 육체미 선발대회에 출전한 선수의 힘살처럼 불끈불끈한 근육을 과시하고 있으며, 그 뒤로 월악산의 영봉(1094m) 이 손에 잡힐 듯 조망되지만 아직은 새벽이라서 아쉽다.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급경사 내리막길을 지나 안부에 도착하니 4거리 갈림길이다. 왼쪽은 상암사 터, 오른쪽은 조령 제1관문(주흘관) 가는 길이다. 직직하면 오늘 대간 중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로프를 잡고 오르내리기를 수십 번, 드디어 직벽의 로프를 잡고 오르니 신성암봉(937m) 이다. 조령산 종주구간의 중간에 위치한 암봉으로 조망이 좋고 오르내리는 코스도 다양해 단독 등산으로도 좋은 산이다. 계속되는 너럭바위와 노송 숲을 지나 바위지대를 만나고 여기를 통과하면 절골의 중앙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조금 지나면 공기바위에 도착 한다. 여기서 뒤돌아보면 신성암봉의 바위슬랩과 조령산 정상으로 뻗은 백두대간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이구간은 남과 북으로 이화령과 새재라는 고갯길이 없다면 날아다니는 새들과 하얀구름 이외엔 이 분수령을 넘나들지 못했을 것이다. 겨울에는 경험 많은 등산인이라 해도 쉽게 넘어 설수 없는 구간이기도하다. 이렇게 암봉과 암봉을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어느듯 조령관이 있는 새재마루(642m)에 도착한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 이곳까지 오다보니 그동안 후미가 도착해야 아침식사를 하던 관례를 깨고 먼저 식사를 했다.

조령관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문경새재 고갯마루 한쪽엔 시원하고 맛좋은 조령 약수가 샘솟는다. 샘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성벽에 올라선다. 낙동강 문화권과 남한강 문화권을 연결하는 중요한길목인 새재는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까지 이어진 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컸다. 영남에서 거둬들인 세곡이나 궁궐에 바칠 진상품은 물론,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나선 영남의 선비들도 대부분 이 고개를 넘었다. 새재는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라는 유래가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조령(鳥嶺)은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또 옛 문헌에 기록된 초점(草岾)에서 '억새꽃이 우거진 고개'라고도 해석한다. 그리고 순 우리말 지명에서 '새'를 '사이'로 풀면 새재는 이우리재(이화령)과 계립령(하늘재) 사이의 고개가 되고, '새로운'으로 이해하면 계립령 대신에 '새(新)로 개척한 고개'로 해석할 수 있다. 새재는 조선 태종 때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발굴조사 때 조령관 터에서 훨씬 이전의 토기류가 출토되면서 고려시대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고개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엔 한양과 영남을 잇는 길의 중심관문으로서 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활을 감내 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북진할 때 신립(1546-1592)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이 새재를 지키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유키나가의 군대를 맞아 싸우다 전멸되기도 했던 사연이 있다. 함경도 변방에서 용맹을 떨쳤던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인 기마병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왔다. 작전회의에서 문경새재에 진을 치자는 의견과 협소한 새재에선 기마병이 힘을 못 쓸것이라는 의견이 갈렸다. 기마병을 믿었던 신립은 새재 대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널찍한 평지에서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선택한 지형은 저습지였다. 게다가 전날 비가 내려 말은커녕 보병도 기동이 힘든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땅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조선의 기마병들은 왜군이 가진 소총에 속수무책이었다. 신립이 새재를 막지 못하고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자 선조는 결국 피난길에 오를수 밖에 없었고, 호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새재는 그만큼 한반도 방어에 중요한 고개였던 것이다. 이렇듯 영욕의 세월을 보낸 새재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추풍령과 이화령 등에 밀리면서 점차 잊힌 길이 되어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새재의 유적지를 복원하자 사람들은 조선시대 한반도의 대표고개로 명성을 떨쳤던 문경새재의 실체를 확인하러 찾아들기 시작했다. 복원할 때 도로를 비포장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운치가 한껏 넘친다.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인 조령관, 그리고 경상 감사가 직인을 주고받았던 교구정 터, 객사가 있던 조령원 터 등을 살펴보며 걷는 역사의 맛은 오르지 문경 새재에서만 누릴 수 있다. 한글 고어로 '산불됴심'이라 쓰여 있는 조선시대 돌비석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며 요즘 같은 단풍철엔 조령천과 어우러진 붉은 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성위로 난길을 따르면 완만한 능선이 끝나고 가파른 암릉이 나타난다. 바로 마패봉(927m)정상이다. 마패봉이라하는 유래는 "어사 박문수가 이곳에 마패를 걸고 쉬었다"해서 마패봉이며 일명 마역봉이라고도 한다. 대간 길은 마패봉에서 동쪽으로 꺾인다. 가파른 길을 내려서면 북암문이 나오고 계속해서 성터를 왼쪽에 끼고 작은 봉우리 몇 개 넘으면 능선은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잠시 동암문을 지나 가파른 능선을 오르면 남성의 근육질 같은 부봉(935m)이 반긴다. 부봉 갈림길에서 959봉까지 가는 길에 바위지대가 잇지만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어려움이나 큰 위험은 없다. 959봉에서 대간 길은 좌측으로 90도 방향 전환을 하면서 아래로 급경사를 이룬다. 직진하면 주흘산 영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정상까지는 약1시간정도 소요된다. 잠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평천재를 지나고 곧이어 탄항산에(856m)에 도착한다. 탄항산은 월암삼봉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것 같다. 첫 번째 봉우리가 나타나길래 정상인줄 알았으나 앞쪽으로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두개가 더 있고, 그 중에서 마지막 봉우리가 정상이다. 봉우리 세 개가 있다고 해서 월암삼봉이라고 부른다. 탄한산에서 굴바위로 내려가는 우측방향으로 도토매기 고개가 보이고 그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주흘산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어지는 굴바위를 통과하면 마침내 하늘재로 내려서는 길이고 눈앞에 새하얀 바위를 포근히 안고 있는 다음 대간길인 포암산이 빼어난 자태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드디어 등산객들 이외엔 오가는 행인이 거의 없는 옛 고개 하늘재(525m)에 도착한다.

 

 

 



하늘재는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으로 문헌상 이름은 계립령(鷄立嶺),대원령,마목현,지름재. 겨릅산, 한훤령 등으로 불려졌다. 하늘재라는 현재의 지명은 한훤령(寒暄嶺)에서 왔을 성싶은데, 어느 때부터인지 계립령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계립령을 처음 연 나라는 신라다. '삼국사기ㆍ에는 이사금3년(156년)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신라는 계립령을 개척함으로서 비로 한강 이북으로 향하는 숨통을 열수 있었고, 이를 삼국통일의 디딤돌로 삼았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는 출사표를 던졌고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를 넘었으며,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도 이 고개에서 쉬어 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1414년 태종(14년)이 계립령에서 멀지 않은 남쪽 분수령에 새재 가 개척되면서 계립령은 잊혀진 길이 되었다.

하늘재를 중심으로 충주족의 '미륵'과 문경 쪽의 '관음'이라는 지명에서도 말해주듯이 고갯마루 양쪽엔 제법 큰 도량이 있었다. 충주 쪽으로 걸어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미륵리에는 미륵사지(사적 제317호)가 있다.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사원으로 '미륵대원지'라고도 한다. 유물로는 미륵대불(보물 제96호),5층석탑(보물 제95호), 귀부,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창건당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가람은 몽골군 침입 때 대부분 불타버린 탓에 창건에 관해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또한 마을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사기그릇을 굽는 마을이었다. 미륵리의 '점말'과 관음리의 '사점'마을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는 도자기 제작에 꼭 필요한 3대 요건인 흙, 불, 물의 뛰어난 자연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경의 도지기 문화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전후 본격 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도 불이 꺼지지 않던 가마였지만, 한국전쟁 뒤에 생활 용기의 재료가 양은, 플라스틱, 스테인레스 등으로 바뀌면서 문경의 도자기는 큰 타격에 빠졌다. 사기그릇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불을 지피지 않는 가마가 하나 둘 늘어났다. 이런 가마에 불길을 다시 지피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조선 도자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본인들이 문경을 찾아오면서 부터다. 일본인들이 최고품으로 취급하는 이도다완의 기술적, 정신적 뿌리를 문경에서 발견하였다. 임진왜란 때 강탈해간 조선 서민들의 차사발인 이도다완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명품이다. 여하튼, 이도다완의 아름다움을 미의 극치로까지 추앙 하는 일본인들은 관음리를 찾아와 이도다완 재현을 부탁했고 도공들은 첫 사발을 빚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신정희, 천황봉, 서선길, 김정옥 도공 등이 이도다완 재현에 매달릴지 수 십년 ,이곳에서 제작된 찻 사발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이 최근에 국보급 문화재를 1000여점 반환 하였으나, 아직도 30 여만 점이나 남아 있다니 하루 속히 정부가 힘써 반환해 빛나는 유산을 다시한번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여 정상들에게 자랑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붉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니, 조태일 님의 '단풍을 보면서'가 스친다. 

" 내장산 이 아니어도 좋아라. 설악산 이 아니어도 좋아라. 야트막한 산이거나 높은 산이거나. 무명산 이거나 유명산 이거나. 거기 박힌 대로 버티면서. 제 생긴 대로 붉었다. 제 성미대로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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