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과 진부령이 367.325km, 백두대간 중간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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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과 진부령이 367.325km, 백두대간 중간지점
  • 유태헌 서울본부장
  • 승인 2010.12.03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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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20구간

산행일자 : 2010년 11월 20일~21일
구 간 : 하늘재 - 포암산 - 관음재-부리기재 - 대미산 - 새목재-작은차갓재-차갓재-생달리
도상거리 : 19.69km
산행시간 : 9시간 30분 소요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ㆍ홍성고 20회ㆍ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잠실을 출발한 버스는 02시 20분경 하늘재에 도착했다. 오늘 대간길은 하늘재에서 포암산과 대미산을 넘어 차갓재 까지 가는 동으로 뻗은 약 19 km 의 산길이다. 지리산에서 부터 북쪽 방향으로 뻗어 오르던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지나며 동쪽 방향으로 틀어 흐른다. 대미산과 황장산, 벌재와 저수령을 거쳐 도슬봉에 올랐다가 죽령을 넘어 비로봉과 국망봉에서 가슴 쓸어내리고 고치령과 박달령을 건너 구룡산을 마음에 품고 태백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은 동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러다 태백산에서 낙동정맥을 만난 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어깨 나란히 하고 첩첩한 산줄기 풀어 놓으며 장대한 줄기를 북으로 뻗고 있다.

 

 

 



하늘재에서 바라보는 둥근 보름달과 새벽 별들이 하늘 가득 반짝인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하늘재는 관음리와 미륵리를 이어주는 해발 525m 고개로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신라 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전략적 거점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었지만, 조선 태종14년(1414년)에 지금의 문경새재인 조령이 개통되면서 군사적 요충지와 사통팔달의 아성을 조령에게 넘겨 준채 계립령유허비만 쓸쓸하게 서있다. 하늘재를 뒤로하고 대간 길은 계단 길을 올라 산길은 좌측으로 틀어지며, 교통로 옆으로 이어지고 산성길 같은 돌길로 접어든다. 그러다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며 산길은 바위도 오르고 돌길도 오르며, 선답자의 족적과 간간히 걸려있는 리본을 따라 오르니 이제 하늘재에서 500m 왔다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로프에 의지해 암릉을 오른 후 숲길을 조금 더 오르니, 공터에 돌탑과 표지석이 세워져있는 포암산(961.8m) 정상에 오른다.(04:00)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을 있는 잇는 백두대간이 북에서 벋어 내려오다가, 명산 월악산을 빚어내고 그 여력을 몰아 솟구쳐낸 산이다. 포암산이라는 이름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정상의 모습이 마치 베로 덮어 놓은듯 하다는데서 유래했다한다. 또 흰바위가 우뚝 솟은 모습이 껍질을 벗겨놓은 삼대 같다하여 마골산(麻骨山)이라고도 불렀다. 계립산(鷄立山)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이름은 모두 하늘재의 옛 이름인 계립령(鷄立嶺), 마목현(麻木峴)등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에서 북쪽능선으로는 월악산이, 남쪽으로는 주흘산과 조령산이 이웃하고 있으며, 멀리 충주호와 선착장도 보인다. 북쪽능선으로는 만수봉이 있고, 왼쪽으로 깎아진 내리막길로 들면 수량이 풍부한 만 계곡을 만난다. 계곡에는 기암괴석과 넓은 반석들이 즐비하며, 주위에는 세계사 석불입상(보물96호)이 있다. 높이 10.6m 의 이석불입상은 마의 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머물렀다는 전설을 담고 있어 마의태자 자화상으로도 불린다. 백두대간 분수령은 관음재와 마치골 사이에서 북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에 달빛 풍광이 좋은 월악산을 빚어놓고 동쪽으로 내 달린다. 유난히 빛나는 보름달과 월악산이 오늘따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후로는 부드러운 파도처럼 적당한 높낮이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관음리 도공들의 불을 지피며 도자기 굽는 광경을 지켜봤을 꼭두바위를 지나 부리기재에 도착 아침식사를 한다. (07:20)

대미산(大美山), 문경 산들의 조종(祖宗)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파른 경사 길을 30여분 오르면 드디어 오늘 구간 중 가장 높은 대미산(大美山, 1115m) 정상이다. 경북 문경 중평리와 관음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문경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문경지역 모든 산의 주맥(主脈)이다. '크고 아름다운 산'이라! 허나 대미산은 날카로운 골산이 아닌 아름다운 여인네의 몸처럼 자못 부드럽다. [산경표]에는 '눈썹먹대(黛)'자에 '눈썹미(眉)' 자를 썼으니, '눈썹먹으로 그린 눈썹' 이다. 대(黛)자는 '여인의 눈썹'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두루 크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대미산(大彌山)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한자로만 풀어보면, 둥글둥글한 산세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는 산 이름이다. 허나 '여자의 그린 눈썹'이거나 '두루 큰 산'이거나, 어쨌든 대미산은 전통적으로 '문경 산들의 조종(祖宗)으로써 백두대간의 넉넉함을 알려주는 산이다. 원시림과 함께 족두리풀, 천마, 향유, 산부추, 삽주, 병품삼 등 특이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개자비나무 군락이 유명하여 식물학자들이 자주 찾는 산이기도 한다.

크고 아름다운 산이라는 대미산(大美山)이라는 이름은 1926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 퇴계 이황 선생이 지은 것이라 한다. 정상은 억새밭 이어서 부드러운 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며, 멀리 소백산부터 주흘산, 조령산, 백화산, 희양산, 속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리기재 방향 여우목 마을이 잘 보이는 바위에 잠시 걸터앉아 마을 쪽을 내려다본다. 여우목은 성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서치보 요셉 박사의 안드리아 가정 등이 들어와 신앙을 지키며 살다 박해로 숨져간 흔적이 배어있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이들이 여우목에 들어와 살 당시 봄이면 산나물을 뜯고, 여름 가을이면 어름이며 머루, 다래, 개복숭아를 땄을 골짜기가 눈 아래 아득히 펼쳐진다. 오르지 신앙하나 붙들기 위해 피붙이 하나 없는 산중에 숨어살다 결국 죽음으로 지켜내야 했던 이들의 유순하면서도 굳건한 신앙심도, 조용히 자신을 지켜온 대미산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신앙을 위해 삶을 건 이들의 흔적은 성지의 비석과 묘비에만 남아있을 뿐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대미산 정상을 지나 얼마쯤 내려서면 대간 길손들이 생명수라 여기는 소중한샘이 하나 있으니, 이름도 예쁜 '눈물샘'이다. 대간길에서 가장 가까운 70m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샘으로 누군가 '검푸른 눈썹산'이란 대미산(黛眉山)의 유래에서 착안해 지었을 성싶은데,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다. 이 샘물은 정말 이산의 눈물이 아닐까. 어디하나 모난데 없이 두리 뭉실한 이 산이 생명 품어 안기 위해 흘린 눈물이 아닐까. 그 눈물로 인해 수많은 꽃들과 숲들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백두대간 734.65km, 중간지점을 지나다
대미산에서 산줄기하나 남쪽으로 갈라지다가 여우목고개를 지나면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서쪽의 운달산(1097m)엔 김룡사가 있고, 동쪽의 공덕산(913m)엔 대승사가 있다. 서남쪽으로 흐르는 운달계곡으로 들어서면 수림으로 둘러싸인 고찰이 문득 나타난다. 김룡사(金龍寺)다. 일주문의 이름은 '붉는 노을문' 이라는 뜻의 홍하문(紅霞門).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꿰뚫는다'는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에서 따왔는데, 이는 성철 스님이 평소 즐겨 하시던 말씀으로 용맹정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말한다. 김룡사는 신라 588년(진평왕10년), 운달조사가 창건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몇 번이나 화재로 대부분 불에 탔고 중창을 거듭 했으나 1997년에 다시 큰불이나 대웅전을 제외한 많은 불전이 화마에 사라졌다. 따라서 대웅전 주변의 전각과 당우들은 최근 다시 지은 탓에 예스러운 맛이 좀 떨어진다. 언덕의 약사여래석불 앞에 앉으면 금강송에 둘러싸인 아늑한 선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수가들에 따르면 김룡사의 가람은 소가 누운 형국인 와우형(臥牛形)이다. 그래서 지맥의 흐름에 따라 약사여래석불을 세우고 탑 을 두었다고 한다. 이런 지세에선 큰일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성철, 서암, 서웅, 그리고 법전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고 밖으로 나가 큰 이름을 떨쳤다. 고승들은 모두 소의 눈에 해당하는 동쪽 계곡 너머의 명부전에 머물렀다고 한다.

한편, 공덕산의 다른 이름은 사불산(四佛山)이다. 공덕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대승사(大乘寺)는 587년 (신라 진평왕9년)에 창건한 절로써, 사불산 산마루엔 사면(四面)석불이 있는데, [삼국유사]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587년(신라 진평왕9년) 커다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사면석불이 공덕봉 중턱에 떨어졌는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4불암 이었다. 왕이 소문을 듣고 그곳에 와서 예배하고 절을 짓게 하고 대승사라고 사액하였다. 망명비구(亡明比究)에게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고, 망명비구가 죽고 난 뒤 무덤에서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산 이름을 사불산 또는 역덕산(亦德山)이라 하였다. 이 절엔 금동보살좌상(보물제991호), 대승사목각탱부 관계문서(보물제575호)등이 남아있다. 반야암은 1415년 기화(己和)가 [금강반야경우가 해설의]를 지은 곳으로 유명하다. 숲길을 내려가다가 작은 돌탑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곳이 말로만 듣던 남한구간의 중간 지점인 곳이다. 경기 평택여산회 백두대간종주대에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원래 2004년 5월 11일 만든 것인데, 기록표지판이 훼손되어 20007년 9월 14일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734.65km 가운데 지리산 천왕봉과 진부령의 거리가 각각 367.325km인 지점이다. 대간 거리는 포항 셀파산장 실측거리 참고라고 되어 있다. 대간 길에서 중간지점을 확인한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까 생각되지만, 그래도 중간지점을 의식하는 것은 대간종주에 나선 각자의 마음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한다. 이제 습관처럼 나서고 있지만 백두대간 종주를 결심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많은 거리를 걷고 또 걸어야하기 때문에 체력이 견딜 수 있어야하며, 시간의 구속과 날씨에 대한 염려도 있게 된다. 그래서 백두대간 길의 반을 마친 것이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차갓재에 도착하니 남한구간의 절반 표지석과 백두대장군(북쪽),백두여장군(남쪽)장승이 서있는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한백주양조장이 있는 생달리에 도착하여 오미자술 한 잔에 여독을 풀고 백두대간 중간 통과를 자축하면서 다음구간인 황장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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