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정상 금정수 깎아지른 백척 절벽사이로 황금 물빛 솟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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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 정상 금정수 깎아지른 백척 절벽사이로 황금 물빛 솟아나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1.01.1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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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의 전국 100대 명산 산행기 청계산

홍주신문은 국토의 등뼈를 밟아가는 산꾼 유태헌(홍주신문 서울총괄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손전화 010-3764-3344)의 전국의 100대 명산 산행기를 연재하고 있다. 홍주신문 독자들과 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1년 1월 10일
구 간 : 서울대공원-매봉(과천)-헬기장-이수봉-석기봉-망경대-혈읍재-매봉-옥녀봉-양재 화물 터미널
산행거리 : 12.3km
산행시간 : 5시간 30분 소요

 

 

 

 


이름이 같은 청계산이 4개나 된다. 서울에 청계산(618m), 중앙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양평의 청계산(658m). 포천의 청계산(849m), 상주의 청계산(877m)이 그것이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과 경기도 과천, 의왕, 성남시에 걸쳐 있는 청계산은 서울 주변에서 숲과 계곡, 절, 공원 등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중심으로 펼쳐진 산세가 수려하고 숲 또한 울창하며 계곡이 깊고 아늑하다.

과천의 서울대공원에서 바라보면 대공원 뒤로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바위로 되어 있는 정상인 만경대가 우뚝 솟아 있다. 북한산이나 관악산처럼 바위가 많이 솟아 있지 않아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악산들이 위압감을 주는 고층 아파트라면, 이산은 정감 있고 포근한 초가집이라고 할까. 부담감이 전혀 없다. 서울대공원에 푸른 숲과 맑은 공기를 자랑하는 청계산 기슭의 산림욕장이 1998년 6월에 개장 되었다. 7.38km 길이의 산림욕장에는 얼음골, 숲 등 8만1500 평방미터 면적에 11곳의 휴식공간과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산책로로도 각광 받고 있다.

백두대간이 힘차게 남하하다가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떨어뜨려 놓으며, 한남금북정맥은 안성의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분기한다. 금북정맥은 태안의 안흥 에서 바다 속으로 스며들고 한남정맥은 강화도 문수산까지 이어지는데 문수산으로 이어 가는 한남정맥의 마루금에 놓여 있는 산이 광교산과 백운산이다. 청계산은 백운산을 모산으로 분기한 바라산이 청계산을 거느리고 관악산에서 삼성산을 지나 호암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 중에 속해 있다.

과천관아의 진산은 관악산이다. 관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左靑龍)이 청계산(淸溪山)이고 우백호(右白虎)가 수리산(修理山)이다. 청룡산이라 불리던 것이 푸른 숲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산이라 하여 청계산(淸溪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청계산에 가기 위해 서울대공원역에 내리니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산인해다. 등산 인구가 천만을 넘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공원 동물원 곰이 탈출해 청계산이 출입통제 되더니 이번에는 구제역 때문에 서울대공원 출입이 통제되어 할 수 없이 옆길을 따라 능선으로 향했다. 계속되는 한파에도 구제역이 기승을 부려 전국을 강타하니 안타깝다. 그래도 고향 홍성은 아직까지 괜찮다니 다행이다. 구제역 방제를 위하여 밤낮으로 수고하시는 모든 분에게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눈 덮인 등산로를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한 시간여 만에 매봉(369.3m.응봉)에 올랐다. 매봉에서 바라보는 관악산의 설경이 한 폭의 산수화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수봉을 향하는 등산길은 완만한 오르내리막이다. 헬기장을 지나면 절 고개를 만난다. 우측으로 조금 가면 절에 갈 때 넘는 고개라는 뜻의 '절넘이' 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절래미 고개가 나온다. 고개를 넘으면 청계사(淸溪寺)가 있다.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충렬왕 10년에 중창한 사찰로, 조선 숙종15년(1689년)에 세운 청계사적비가 있고 조선 후기 건물로 보이는 극락보전도 있다.

그밖에도 숙종27년(1701년)에 제작된 조선후기의 범종인 청계사 동종(보물제11-7호), 청계사의 모판(경기유형문화재제135호), 광해군14년(1622년)에 판각한 묘법연화경이 213판 있으며 청계사 와불 또한 유명하다. 청계사는 경기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수봉을 향해 가파른 길을 오르니 찬바람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솟는다. 정상 능선에서 아름다운 소나무와 함께 정상석이 서 있는 이수봉(517m.貳壽峰)을 만난다. 일두 정여창(鄭汝昌)선생이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청계산에서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貳)번 넘겼다고 해서 후학인 정규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곳 이수봉에서 옛골까지 펼쳐지는 3.7km의 철쭉 길도 유명하다.

이수봉을 뒤로하고 넓은 헬기장을 지나 석기봉(石基峰)을 오른다. 청계산의 여러 봉우리 중 가장 조망이 좋은 곳으로 그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원래는 신선대였는데, 미군들에 의해 영문 낙서로'yankee rock'(미국사람바위)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바위'(石)와 '양키'(yankee)에 '기'를 합하여 석기봉으로 개명했다한다.

석기봉 바위를 릿지하듯 오르내리면, 청계산 정상인 망경대(618m)에 도착한다. 정상에 오르면 눈 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 데서 만경대라 하였으나, 고려의 수절신(守節臣)으로 알려진 송산(松山) 조견(趙犬.조윤 1351-1425)이 청계산에 은거하면서 상봉인 만경대에 자주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슬퍼하였다 하여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게 되었다 전해진다.

이태조는 옛 친구인 조윤을 못 잊어 망경대에 초막을 짓고 비를 피하게 하였으나 조윤은 고려에 충신으로 살기위해 조선에서는 개처럼 살겠다며 이름도 조견(趙犬)으로 바꾸고 청계산을 떠나 양주 깊은 산골에 은둔생활을 했다.

 

 

 

 

 

 

 


이처럼 만경대 주변은 조견, 정여창 등 후학들이 권력의 비정함과 세월의 허망함을 달래며 은거했던 곳이어서 지금도 주변 금정샘터, 마왕샘터 등에는 집터와 다량의 와편이 발견된다. 망경대 정상에서면 서북쪽으로 펼쳐진 계곡아래 과천시와 관악산이 웅장하게 서 있고,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는 서울대공원, 각종놀이기구가 있는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경마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망경대 정상부근 군부대를 끼고 내려서면 혈읍재(血泣峙)를 만난다. 조선 연산군 때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 선생이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소식에 은거지인 금정수로 가기 위해 피(血)와 눈물을 흘리며(泣) 넘어 다녔다는 고개다.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조선전기 문신 겸 학자이자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으며, 김종직의 문인으로 1498년(연산군4년)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 되었다가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한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조선전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영남학파의 종주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어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했다.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제19대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조선 연산군4년(1498년)에 유자광등의 훈구파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를 숙청시킨 사화이며, 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10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尹氏)의 복위 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로 윤씨 복위에 반대한 선비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가족까지도 처벌하였다. 부관참시란 죽은 뒤라도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極刑)을 추시(追施)하던 일로, 특히 연산군 때 성행하여 김종직, 송흠, 한명회, 정여창, 남효은 등 많은 사람이 이 형을 받았다.

혈읍재를 지나면 정여창이 머물던 금정수(金井水.하늘샘)를 만난다. 높은 산 아래 가까이 있다하여 하늘샘으로도 불리는 금정수는 과천 현신읍지에 "청계산 정상에 금정수가 있는데 깎아지른 백 척 절벽 사이로 맑은 물이 솟아나며 물빛은 황금색을 이룬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이 이곳에서 은거하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후 사약을 받고 함경도 종성에서 부관참시를 당하자 이곳의 샘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 후에 억울함이 밝혀져 복권이 결정되자 다시 황금빛이 되었다고 한다.

하늘샘을 지나 매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봄이면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매가 하늘을 비상하는 형태를 한 매바위에 서면 북한산과 도봉산 그리고 맞은편의 수락산 및 불암산이 한눈에 잡히고, 이산들의 계곡물을 받아 서해로 나르는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도 시원스럽게 보인다. 서울의 강남과 경부고속도로에는 수많은 자동차가 달리고 남한산성 밑으로 성남과 분당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매바위가 있어 매봉(582.5m)이라 이름 지어진 매봉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오른쪽으로 가면 원터골 입구이고 직진하면 옥녀봉 가는 길이다.

세 번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돌 바위를 세 바퀴 돌고, "아무것도 빌 것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소원을 말한 후 좌측으로 비켜 있는 충혼탑에 들린다. 30여 년 전 훈련도중 비행기 사고로 숨진 53명의 젊은 용사들을 위해 세워진 충혼탑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부터 나무계단 길은 스토리가 있는 길이어서 인상적이다. 관내 주민이나 단체 및 업체로부터 기증을 받아 계단을 설치한 서초구청의 아이디어가 신선했고, 계단에 새겨진 기증자의 촌철살인의 한마디가 어느 명구보다 훨씬 감동적이다. 특히 '자유-아버지, 평등-엄마, 박애-딸' 의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는다. 1번 기증자의 '프랑스는 알프스, 서초구는 청계산', 1132번 끝번 기증자의 '나의동반자 창순 씨, 사랑하는 딸 수아야! 영원히' 라고 새겨진 나무 계단이 인상적이다.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여 옥녀봉(375m) 이라고 이름 붙여진 옥녀봉 아래 주암동 돌무개에는 과지초당(瓜地草堂)과 독우물이 있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부친인 김노경이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내던 때인 1824년에 마련한 별서로 추사가 북경 유배에서 해제된 뒤 생을 마감한 곳이다. 추사가 4년 동안 과지초당에 머물면서 집 앞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기 때문에 이 우물을 독우물(항아리로 만든 우물)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청계산에는 정일당강씨(靜一堂姜氏)사당도 있다. 정일당강씨(1722-1832)는 조선후기의 여류시인이며 서화가이다. 시문, 서화에 능하고 성리학, 경술(經術)에도 밝았다. 글씨는 황운조의 필법을 이어받아 해서(楷書)를 잘 썼고 시에는 도가(道家)의 기풍이 담겨 있다.

한편 원지동에는 석불입상 및 석탑(서울시유형문화재제93호)이 있다. 고려 말, 조선초기의토속적인 양식으로 13평방미터의 미륵당과 3층 석탑이 있으며, 미륵당 안에는 높이2m 정도의 백색입상(白色立像)인 미륵불이 있고 장구, 목탁, 제기 등이 갖춰져 있다.

미륵불은 원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지성을 드리면 기원자의 길흉화복을 계시한다하여 사람들이 미륵불의 영험을 믿고 계속 밀려들자, 일제 때 일본인이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 냈는데 그 후부터는 미륵불은 영원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전해진다.

 

 

 

 

 

 

 


나무계단이 끝나면서부터는 부드러운 황토 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다. 하산 길 내내 빽빽한 소나무와, 사이사이 크고 작은 노간주나무, 낙엽송, 밤나무, 물박달나무도 눈에 띤다. 중간 중간에는 제1ㆍ2쉼터, 바람골쉼터, 청석골쉼터가 있어 조용히 쉬어 갈 수도 있고, 이름을 왜 그렇게 붙였는지 모르지만 입맞춤길, 임꺽정길도 재미있었다.

오늘산행은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기행과 산행을 같이한 의미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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