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겨울산행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미물인가' 깨닫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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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겨울산행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미물인가' 깨닫게 해
  • 유태헌 서울 본부장
  • 승인 2011.01.2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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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23구간

 

소백산 비로봉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ㆍ홍성고 20회ㆍ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1년 1월 15일~16일
구 간 : 죽령 - 제2연화봉 - 연화봉-제1연화봉 - 비로봉 - 국망봉-늦은맥이재 - 고치령
도상거리 : 24.9km
산행시간 : 9시간 30분 소요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동해로 치우쳐 흐르다가 태백 매봉산부터 내륙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빚은 소백산은 우리나라 으뜸의 육산이다. 여인의 육체처럼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대평원의 장쾌함은 어디서나 돋보인다. 특히 연화봉에서 비로봉, 국망봉에서 상월봉구간의 고원평원은 누구나 반할만한 경관을 자랑한다. 늦봄의 진달래와 철쭉, 겨울의 상고대와 설화의 명성은 이미 나라 안에서는 최고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관에 마음이 풀어지기도 하지만, 분수령을 넘나드는 칼바람은 웬만한 돌멩이는 모두 날려버릴 정도로 거세다. 이는 동북에서 서남방향으로 뻗어 내린 소백의 능선이 북풍을 맞받기 때문이다.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계속되는 강추위와 백두대간 중 바람이 가장 심하다는 소백산구간이다. 소백산 겨울 산행을 몇번 경험도 해봤지만, 그래도 겨울장비인 스패지, 방한모 등 몇 가지를 준비했다. 새벽 02시 20분 죽령에 도착, 밖을 내다보니 풍력발전기 돌아가는 바람개비가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바람이 강하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단단히 준비하고 밖에 나서니 예상했던 것보다 바람이 더욱더 강하다. 산행대장의 출발 신호에 따라 연화봉으로 오르는 포장된 도로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평상시보다 걸음이 늦어진다.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이 하늘 가득하고 서쪽에는 밝은 달이 환하게 눈길을 비춘다. 다행이 바람이 강하지 않아 땀방울이 맺힌다. 죽령을 출발한지 2시간여 만에 제2연화봉(1357.3m)에 오른다. (04시30분)

오른쪽으로 가면 희방사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643년)때 창건한 희방사는 국어학적으로 매우 소중한 [월인석보]와[훈민정음]으로 유명한 절이다. 월인석보는 세종이[석고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월인천강지곡]과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석보상절]을 합쳐1459년에(세조5년0에 간행한 불경 원해서. 1568년(선조1년)에 복각된 희방사본[월인석보] 권1, 권2의 판목이 보관돼 왔다. 그러나 6.25 전쟁중인 1951년 1월, 소백산 일대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 때 작전상 이유로 유엔군에 의해 모두 불타 버렸다. 다행히 [훈민정음]목판본만이 잿더미 속에서 온전한채로 발견 되었다.
잠시 후에 소백산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383m)에 오른다. 소백산 천문대는 1978년 연화봉에 61cm 반사 망원경을 가동하며 한국의 현대적인 광학천문학 연구의 막을 열었다고 한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죽령부터 포장도로가 이어진 천문대를 지나야 비로소 소백의 품으로 들었음을 느끼게 된다. 첩첩의 산줄기와 장쾌한 능선미를 즐기며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제 1연화봉(1394.4m)을 지나 비로봉 가는 길은 나무계단이다. 보드랍고 연한 산의 피부가 인간의 간섭에 상처를 심하게 입어서 내린 처방이다. 그러나 여기서 부터 추위와 칼바람에 사투는 시작된다. 바람을 막아줄 나무 한그루 없는 허허 벌판에 초속 30m의 강풍 앞에 몸이 술 취한 사람처럼 갈지자걸음이다. 몇 번이고 넘어지려는 것을 난간에 겨우 의지해 반보씩 오르는 계단은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시려온다. 새로 준비한 방한장갑의 효력이 여기가 한계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군락지가 있는 곳이지만 추위와 바람, 어둠에 사방이 꽁꽁 얼어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올라 왔는지, 얼마나 걸렸는지도 모른 채 정상인 비로봉(1439.5m)에 오른다.

 

 

 

국망봉에서 본 백두대간


소백산의 주봉으로, 비로(琵盧)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의 준말이다.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범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 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을 의미 한다. 특히 겨울 햇살에 비치는 무지개 빛 눈꽃과 백색 평원은 설경의 극치를 이루는 곳이다. 또한 아담한 돌탑과 표지석이 서 있는 정상의 전망은 일품이다. 동북으로는 가야할 국망봉에서 선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아득하고, 남으로는 지나온 연화봉, 도솔봉, 묘적봉이 산 물결을 이룬다. 석가의 진신(眞身)을 높여 부르는 칭호인 비로(琵盧)라는 최고봉의 이름이 결코 부끄럽지 않다.

비로자나부처님은 진리 그 자체이듯 비로봉 역시 소백산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조선시대 풍수 학자인 남사고(南師古)가 이 산을 보고는'사람을 살리는 산' 이라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했다는 이야기는 소백의 위상을 잘 드러낸 일화이다. 정상 표지석 뒤면엔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 백 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에 솟았네 /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 하늘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하며 소백산의 산세를 찬탄한 서거정의 노래가 적혀있다. 그러나 추위와 바람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국망봉을 향해 내려가는 나무계단은 오를 때 나무계단의 바람보다 더 칼바람이다. 발가락 손가락이 얼어붙고, 가려지지 않은 눈 부위가 마비되는 느낌이다. 영하 25도와 초속 30m이면 최감 온도는 영하55도나 된다. 살인적인 추위다. 20여년 산행을 했지만 가장 추운 날씨다. 눈(雪) 이 깊은 곳은 무릎까지 빠지는 곳도 많다. 평소보다 체력이 3배정도는 더 소모되는 힘든 길이다. 숨이 차고 다리가 쥐가 날 정도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멍해지곤 한다. 힘들게 국망봉(1421m. 國望峰)에 오른다. 비로봉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동쪽 기슭에는 부석사, 초암사, 석륜암 등이 있으며, 석천폭포가 있다.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이 은거 하던 중 정상에 올라 경주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더 이상 대간 길을 포기하고 처음으로 중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초암사 쪽으로 향하니 10여명이 따른다. 초암사 방향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니 바람 하나 없이 파란 하늘에 햇볕이 따뜻하다. 드디어 살것 같다. 온 몸이 서서히 녹는다.

계단 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면 돼지 바위와 석륜암 터에 이른다. 석륜암 터 뒤에는 봉 바위의 위용에 옛 절터의 영화를 그려본다. 봉 바위 안내문에는 옛날 석륜암 뒤 하늘을 날아갈 봉황의 형상인 높이 18m 바위를 봉 바위라고 전한다. 계곡을 따라 지루하게 이어지는 하산 길을 1시간30여분 내려오니 초암사(草庵寺)다. 초암사는 의상이 부석사 터를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거석 축대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임을 알 수 있다.

초암사를 뒤로하고 죽계구곡를 따라 내려온다. 죽계구곡(竹溪九曲)은 초암사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심괴정 근처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km에 걸쳐 소수서원을 감싸 안고 동남방향으로 흐르는데 금당반석위에 옥이 구르는 듯 기암괴석을 휘감아 떨어지면서 솟구치는 물방울이 마치 수정 구슬을 흩어 놓은 듯이 아홉 구비 절경을 이루는데 이를 죽계구곡이라 한다. 죽계구곡은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영주시 순흥면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죽계천의 상류 지역이다. 아홉 구비를 돌아 절경을 이루는 죽계구곡은 고려 축숙왕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근재 안축(安軸.1287-1348)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이고, 퇴계 이황도 그 비경에 취해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제1곡은 금당반석, 제2곡은 청운대, 제4곡은 용추비폭, 제9곡은 이화동이라 한다. 그중 제4곡은 한가운데에 둥근 바위가 놓여 있는 소(沼)로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는 용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추비폭이라는 이름이 붙였다한다. 바닥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물 맑은 계곡과 소나무와 참나무 고목, 바위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이루는 죽계구곡을 따라서 내려온다.

소백산 동쪽에 자리한 영주는 영천, 풍기, 순흥은 세 고을이 합쳐진 고을이다. 이중에서 죽령을 내려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고을이 인삼과 십승지로 널리 알려진 풍기다. 개성인삼과 함께 금산, 강화, 풍기를 4대 인삼 재배지로 꼽는다. 구중 풍기 인삼은 두세 번 달여먹어도 약효가 줄지 않아, 산삼에 버금가는 인정을 받는다. 풍기에 인삼 재배가 성행한 것은, 1545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봉이 산삼을 조정에 바치느라 고생하는 주민들을 위해 산삼의 종자를 직접 심어 퍼트리면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인삼을 재배하고, 사과를 따고, 인견을 짜며 생계를 이어가는 풍기의 주민들은 조선 말기를 전후해 전국에서 모인 비결파의 후손들이다. 정감록의 감결은 나라 제일의 피난지로 손꼽은 십승지 가운데서도 풍기 금계동(金鷄洞)을 으뜸으로 쳤다.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 는 '금계포란형' 에서 유래 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십승지라 하면 전란을 피하고, 질병이나 굶주림, 가뭄이나 홍수 등의 피해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소백산 지역 역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참혹한 피해를 입었고, 금계동에 있는 삼거리 역시 전란의 참화를 피하지 못했다.

순흥(順興)은 조선시대에 영월, 태백, 봉화, 울진 지역을 관할하던 한강이남 제일의 도호부(都護府)가 있던 고을이다. 이렇게 소백산 동쪽을 호령하던 이곳은 1457년(세조3년) 피바람이 불면서 황폐하고 말았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영의정 자리에 있을때,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의 옳지 못함을 지적하다 이곳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결국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로 유배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순흥부사로 부임한 이보흠을 합세시킨다.

이들은 우선 병력을 모으고 군량을 준비하며 힘이 생기면 영월에 있는 단종을 모셔 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군사를 풀어 백두대간의 죽령과 조령을 막고 힘을 기른 후 한양으로 진격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셔 사무친 원한을 한꺼번에 풀어 보려고 하였다 . 허나 금성대군의 몸종과 순흥부사의 부하가 공모해 세조 측에 밀고함으로써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뒤 끝은 피바다였다. 주모자뿐만 아니라 역모에 가담했던 수많은 주민들이 참살을 당했다. 이때 희생자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30리 밖까지 흘러 내렸는데, 그 마을은 지금도 '피 끝'으로 불린다. 권력을 위해서 라면 형제, 아들도 처단 하는게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인지.

주차장에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식당에 들어가니 연탄난로가 따뜻하다. 언 몸이 녹는가했더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어올라 있다. 동상이다 생각하며 옆 사람을 보니 역시 같은 현상이다. 택시를 불러 영주 기독병원에서 응급 치료 후 증상이 심한 4명은 서울로 후송했다.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미물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자연 앞에 겸손하고 날씨에 순응하야 하며, 준비를 철저히 해서 남은 백두대간을 무사히 마쳐야겠다고 다짐한다. 다음날 치료차 병원에 가보니 대원중 8명이나 입원 치료중이다. 이들이 빨리 쾌유하고 완치 되기를 기원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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