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는 나무와 바람과 새들처럼 중요한 산(山) 식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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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는 나무와 바람과 새들처럼 중요한 산(山) 식구다
  • 유태헌 서울총괄본부장
  • 승인 2011.03.0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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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의 전국 100대 명산 산행기 <11> 관악산 ②

홍주신문은 국토의 등뼈를 밟아가는 산꾼 유태헌(홍주신문 서울총괄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손전화 010-3764-3344)의 전국의 100대 명산 산행기를 연재하고 있다. 홍주신문 독자들과 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관악산 연주암

 

 


산행일자 : 2011년 2월 13일
구 간 : 관악산정문 - 234봉 - 칼바위- 장군봉 - 깃대봉 - 삼막사- 삼성산 - 상불암 - 무너미고개- 8봉능선 - 연주암 - 관악산정상- 마당바위 - 관음사 - 사당동
산행거리 : 13.7km
산행시간 : 7시간 30분 소요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의상․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17년(677)때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다.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정화시켜[삼성산(三聖山)]이라 칭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인 아미타불과 그 왼쪽에 있는 관세음보살 및 오른쪽에 있는 대세지보살을 삼성(三聖)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명이 유래 됐다는 것이다.

삼성산에는 삼막사를 비롯하여 염불암, 망원암, 안양사, 성주암 등의 사찰이 있으며, 임진왜란(1592)때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역임하고 후에 우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생전에 이 산에 올라 읊은[차유삼성산운(次遊參三聖山韻)]이란 장시와, 일제강점기에 고백록(高百祿)의 시조가 전해진다. 또 일찍이 왕건(900)이 금주, 과주고을 등을 정벌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안양사를 지어 오늘날의 안양시란 이름이 탄생되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삼성산 정상에서 잠시 내려오면 작은 암자인 상불암을 만나고 그 아래 아름드리 노송군락지 쉼터가 있다. 이곳에서 건너다보면 마치 넓은 도로 같은 암릉구간이 바로 관악산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스릴 넘치는 8봉 능선이다. 경사가 심한 미끄러운 비탈진 등로를 내려오면 무너미고개를 만나고 안양천계곡을 건너 1봉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을 숨을 몰아쉬며 오른다. 8봉 능선을 설악에 공륭능선에 비교 하기도 한다. 그만큼 힘들지만 스릴과 재미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2봉인 엉덩이 바위도 지나고, 전방 암릉 중앙에서 아래로 조각을 이루어 늘어선 바위가 일명 지네바위다. 마치 한 마리의 꿈틀거리는 지네의 모습이다. 고인돌 형상의 멧돼지바위를 지나면 왕관바위가 속살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의젓하게 왕관을 쓰고 백성을 걱정하는 성군의 모습처럼 보이는데, 누군가 왕관에 올라 서 있는 모습이 민망스럽다.

 

 

 

 

 

 

 


한 구간 한 구간 암봉을 기를 쓰고 손바닥이 닳도록 타고 넘으면 또다시 이어지는 암릉길.

암릉길 산행에 맛들인 많은 사람들이 관악산 8봉과 6봉 능선을 찾는다. 암릉산행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보니 정신이 맑아지고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는 것이다.

나무와 바람과 새들처럼 중요한 산 식구의 하나인 바위를, 우리들 산에서 드러낸다면 전체 산의 반은 덜어내야 할 정도로 먼 옛날부터 바위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한강의 방위를 뚫을 만큼 강력한 바위산 관악산의 화중을 제압하고자 광화문에 해치를 세웠다는 전설이 바위가 아니라 선조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가를 실증하는 좋은 사례이다. 어머니의 가슴만큼이나 넓고 속이 깊은 바위, 열연에 빠진 연인들의 입맞춤보다 더 뜨거운 바위, 오랜 친구만큼이나 듬직하고 믿음이 가는 바위, 여인의 다리보다 더 멋있는 바위, 물보다 더 빨리 뜨거워지고, 차가워지는 감정이 살아있는 바위, 그러나 어떠한 애련에도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는 의지의 바위, 지금 이러한 바위를 부둥켜안고 있노라면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평온함이 느껴진다. 의지의 시인 청마 유치환 님은 이렇게 '바위'를 노래했다.

- 바 위 -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꺽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지털문명의 빠른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해 이 시대에 중심에 서 있지 못하고 언저리로 밀려나 속상해하는 사람들은 죽으면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단단한 바위가 되어 제자리를 지키고 싶을 것이다. 그럴 때 훌훌 털고 8봉에 오르면 모진 세월에 끄떡도 않고 자리를 지켜온 바위를 만나볼 수 있다. 어떠한 애련에도 물들지 않고 희로에도 움직이지 않는 의지의 바위들을 하루 종일 만나볼 수 있는 곳이 관악산이다. 8봉 정상에 서면 우측에는 6봉 정상에 태국기가 펄럭이며 오라 손짓하고, 좌측으로 학바위 능선이 고고한 학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KBS 송신탑을 지나 제2왕관바위(촛불바위)를 내려서면 깔딱고개인 안부에 도착한다. 좌측은 관악문으로 내려가는 계곡 등산로이며, 우측은 연주암을 거쳐 과천향교로 내려가는 길이다. 연주암에 들려 커피한잔에 잠시 휴식을 취한다.

연주암(戀主庵)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번지인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을 즐겨 찾는 이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찰이며, 해발 629미터의 기암절벽에 위치한 연주대와 함께 관악산의 명소로 손꼽힌다. 연주암은 [연주암중건기]등의 자료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하였으며, 677년에 그 아래 관악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이 고려 후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 창건 연도가 꽤 오래된 고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연주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그 첫 번째는 고려 말의 충신이었던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하자 관악산 의상대에 숨어 살며, 여기서 멀리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그리워했음으로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인 효령대군이, 태종의 셋째인 충령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을 하면서 40칸 정도의 건물을 새로 지어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후에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각각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연주암에는 현재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종각 등의 전각과 2동의 요사체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근대 이후에 들어와 세워진 것이다. 또한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연주암을 지나 계단 길을 오르면 관악산(681m)정상에 있는 연주대에 오른다. 연주대는 경기도지방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으며, 서울 근교에서는 보기 드문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처음 이름은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여 의상대라 불리었다가, 고려 말 충신들과, 양령․효령대군이 각각 개성과 경북궁을 그리워한다고 해서 연주대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상에서 하산길은 가파른 암릉 구간이다. 조심조심 내려오면 안부에 이르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에는 지도바위, 관악문을 통과하면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제3헬기장을 지나고 너럭바위인 마당바위, 하마바위가 있는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멀리 남산과 한강이 젓줄처럼 흐르고 그 뒤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암릉길은 급경사로 가파르다. 조심조심 내려오니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관음사(觀音寺)다. 관음사는 관악구 남현동 519번지 관악산 북동 기슭, 남태령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사찰 가운데 영험 있는 관음 기도량 중의 하나였다. 관음사는 1943년 이후에 쓰여진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9년(895) 도선대사가 세운 비보사찰(碑補寺刹)중의 하나라고 전한다. 조선 초기에 쓰여진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변계량이 관음사의 절경을 읊은 시가 수록 되어 있어, 이 무렵까지 관음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영조 때 쓰여진 [여지도서]에도 관음사가 보인다. 예로부터 관음사 아래에 있는 승방벌이라는 마을과 그 앞에 승방교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관음사는 작은 규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 14년(1863) 8월에 행념이 당시 철종의 장인인 영은 부원군 김문근의 시주를 받아 다시 고쳐지었다. 1975년에 중창을 발원하여 7년여 동안 여러 건물을 차례로 중수하였다. 관음사 입구에는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가 있어 지정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관음사 경내를 들러보고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시니 오늘의 피로가 확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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