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난 압록강철교, 생생한 분단의 상흔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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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난 압록강철교, 생생한 분단의 상흔이 담겨 있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1.09.0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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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 애환 서린 만주벌 1만5000리 대장정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1>

 

 

 


우리민족의 역사와 애환은 광활한 중국대륙의 만주벌에 그대로 숨 쉬고 있다.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의 발상지로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의 본산지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아픈 역사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찬란했던 우리의 고대역사가 짓밟히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항일독립투쟁의 역사현장을 지난 8월 9일부터 20일까지 11박 12일의 일정으로 홍성지역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항일 사상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중국 대장정에 나섰다. 충청남도와 홍성군, 홍성교육지원청이 주최하고, 한국스카우트충남연맹(연맹장 조기준) 홍성지구회(회장 이상근)가 주관한 청산리 전투 승전 91주년 기념 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 역사 대장정은 홍성지역 중·고등학생 65명과 교사, 임원 등 83명이 함께했다. 본지는 중국 동북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 일대에 산재된 우리의 역사유적과 독립투쟁의 현장 등 민족의 영토와 삶의 현장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천년의 세월 속에 주인은 바뀌었지만 그 땅 위에 새겨진 선조들의 자랑스런 역사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서린 만주벌의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찾아 가는 길은 고요하리만치 잔잔한 바닷길을 빼고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홍성의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를 출발해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에서 17시간의 항해 끝에 중국 대련에 도착, 또 다시 버스로 5시간 정도 달려가니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단동에 닿았다.

 

 

 

 

 

 

 

단동 전경

 

 


중국 단동(丹東),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 
중국이 아무리 동북공정으로 이 지역이 자신들의 지방정권이라 우겨도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선명한 것은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한국기업이 적지 않게 진출하여 한국인들로 북적이면서 이제는 남의 나라라는 느낌이 별로 없는 도시 대련, 신도시가 조성된 거리는 중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물론 거리 질서가 엉망인 것은 별반 차이가 없지만 말이다. 단동은 중국의 요령성과 북한의 국경지대로 1960년대 이전까지 당나라 때에 설치되었던 안동관할보호관청에서 유래된 ‘안동(安東)’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의미가 별로 좋지가 않았다. ‘동쪽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니 중화제국적인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알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에 부탁하여 1965년에 ‘紅色東方之城, 해가 뜨는 동방의 붉은 도시’라는 뜻을 가진 단동(丹東)으로 명칭을 바꿔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중국 최대의 변경도시이면서 최북단의 연해도시로 단동이 가진 특유의 자연조건과 오랜 역사가 지닌 문화유적들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건너편으로 북한을 볼 수 있는 압록강은 단동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우리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평양과 북경을 달리는 국경열차가 이곳을 통과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식 건물이 도시 곳곳에 세워지는 등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삼림면적 비율이 51%를 차지하고 있으며, 120km의 아름답고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단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압록강 근처에 위치해 강 사이로 북한 신의주를 볼 수 있는 압록강공원과 6·25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교각만 남아 있는 압록강 단교다. 단동은 인구가 260만 명으로 한족, 만족, 몽골족, 회족, 조선족 등 28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만족이 많이 살아 31%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압록강은 ‘푸른 물’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민족의 애환을 대변이라도 하듯 세찬 비가 내렸기 때문인지 완전 흙탕물이다. 압록강, 한자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청둥오리 털빛처럼 푸르다’는 뜻이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만났다는 압록강은 우리의 국토인 신의주가 빤히 건너다보이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지금의 압록이라 하면 당시 부여의 서울인 하얼빈과 너무 멀고, 다른 곳이라면 다른 곳에는 압록이 없으므로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단계에서 광개토왕비문에서 압록강을 아리수(阿利水)라 한 것을 보고 압록강의 이름이 ‘아리(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는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해 한국과 만주를 잇는 철도교량으로 지난 1908년 8월 착공해 1911년 11월 1일 준공됐다. 평북 신의주와 중국 단둥(丹東)을 연결하는 개폐식철교로 공사에 동원된 인력은 연 51만명 이었으며, 건설비는 당시 175만원으로 일본과 청나라가 분담했다고 한다. 압록강철교는 압록강 하구로부터 상류 쪽 45km 지점을 가로질러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丹東)을 연결하는 인도교 겸용 장대철교로 그 연장은 944m라고 한다. 교각은 모두 12개를 세웠으며, 교각의 기초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으로서도 처음인 압기잠함(壓氣潛函)공법으로 시공됐다. 교량 상판은 활 모양의 궁상형(弓狀形) 강형(鋼桁)을 사용했으며, 이 트러스(truss)는 모두 미국에서 1905~1910년 사이 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상판의 가운데는 단선 철로를 깔았으며, 그 좌우로 2.6m의 인도(人道)를 설치했다. 따라서 압록강철교는 한반도에 가설된 두 번째 철교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적 장대 인도교(人道橋)라는 의미도 부여할 수 있다. 1932년의 통계에 따르면 인도 통행자가 연간 320만명 이었다고 전한다.

철교, 90° 회전해 十자 모양으로 여닫은 선개교 
이 다리는 역사 이래 현재까지 한반도에 건설된 유일무이한 회전 장대교였다. 즉, 신의주로부터 9번째 교각의 형을 개폐식으로 건설했는데, 케이슨(caisson)공법을 적용, 형을 90° 회전시켜 다리를 열면 十자형, 닫으면 一자형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45°를 여는 데 2~3분이 걸렸다고 하며, 조작상의 위험으로 인해 수동으로 개폐하였는데 예비로 12마력의 석유 발동기를 갖췄다고 한다. 이 회전 구간은 하루 2번,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 번씩 다리를 열고 닫았는데, 1934년 3월31일부터는 교량 보존 등을 이유로 가동을 중지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 광복을 기념해 단 한 번 가동된 적이 있다고 한다.

압록강철교는 당시 동양 제일의 국경 명물로 일컬어지며 해외에서도 그 명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수평으로 회전해 다리를 개폐하는 선개교(旋開橋, swing bridge) 방식이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압록강철교를 ‘얄루리버브리지(Yalu River Bridge)’라 부른다. 그러나 이 다리는 6·25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폭파됐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당시 중공군이 전쟁 개입을 결정하면서 압록강철교가 군사 요충지로 부각되면서 당시 미군은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이 넘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미군의 B-29가 폭파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다리는 당시의 상흔을 간직한 채 압록강단교(斷橋)라는 이름으로 보존돼 단동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듯했다. 그리고 1943년 5월에는 압록강철교에서 상류 쪽으로 70m 지점에 신철교(新鐵橋)가 복선으로 건설·개통(연장 943.3m)되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현재까지도 조중친선우의교(朝中親善友誼橋)라는 이름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오늘날 중국과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압록강 철교는 아직까지도 자동차와 기차가 동시에 다닐 수 있으며, 북한으로 들어가는 물자의 80%가 이곳을 통하고 있다고 한다. 끊어져 동강난 압록강철교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전망대를 설치하는 등 시설물을 개·보수해 중국은 이곳을 국경 관광지로 활용하며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주로 한국, 중국인들이지만 방문 목적은 사뭇 다르다. 한국관광객들은 이곳에서 6·25 한국전쟁이라는 민족분단의 역사 현장과 북한을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찾고 있다. 중국 관광객들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에서는 6·25한국전쟁을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오고 있다. 또 이곳에서 중국의 경제발전상과 북한의 경제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그들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압록강 주변에 조성된 압록강공원은 무료입장이 가능하지만 끊어진 철교를 오르려면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곳에 오르면 북한의 신의주시와 강변을 자세히 볼 수 있는데, 고층빌딩이 즐비한 단동시와 초라해 보이는 신의주시의 대조적인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밤에는 두 도시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국 쪽은 화려한 건물조명, 북한쪽은 가로등도 하나 없는 적막강산이 연출되고 있다. 폐쇄된 북한과 대비됨은 민족의 아픈 상처임에 분명했다.

 

 

 

 

 

 

 

 

신의주

 

 


압록강변에는 유람선이 있는데 북한지역 강변과 북한사람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유람선을 탈 수밖에 없다. 북한쪽 강변 가까이까지 갈 수 있어 국경초소의 북한군은 물론 정박 중인 낡은 배, 선전문구와 북한주민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적십자에서 제공한 비료와 쌀 등도 이곳을 통해 북한 내륙 쪽으로 들어가며 화물선에서 지원물품을 하역하는 장면이 노출되기도 한다. 중국 측에서 운영하고 있는 유람선 관광은 확실한 돈벌이 수단이다. 북한을 관광자원으로 삼아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압록강변은 한마디로 단동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효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도 신의주는 돈벌이 창구다. 중국과의 교역은 물론 밀무역 통로로 활용되고 있으며, 고위층은 물론 주민들까지도 밀무역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단동과 우리 땅 북한의 신의주 풍경이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광경은 그대로 우리민족의 또 다른 아픔의 현장이었다.

 

 

 

 

 

 

 

 

신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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