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땅, 민족의 성지 ‘연변’에서 만난 민족시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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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의 땅, 민족의 성지 ‘연변’에서 만난 민족시인 ‘윤동주’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1.09.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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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 애환 서린 만주벌 1만5000리 대장정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4>

 

해란강


우리민족의 역사와 애환은 광활한 중국대륙의 만주벌에 그대로 숨 쉬고 있다.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의 발상지로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의 본산지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아픈 역사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찬란했던 우리의 고대역사가 짓밟히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항일독립투쟁의 역사현장을 지난 8월 9일부터 20일까지 11박 12일의 일정으로 홍성지역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항일 사상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중국 대장정에 나섰다. 충청남도와 홍성군, 홍성교육지원청이 주최하고, 한국스카우트충남연맹(연맹장 조기준) 홍성지구회(회장 이상근)가 주관한 청산리 전투 승전 91주년 기념 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 역사 대장정은 홍성지역 중·고등학생 65명과 교사, 임원 등 83명이 함께했다. 본지는 중국 동북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 일대에 산재된 우리의 역사유적과 독립투쟁의 현장 등 민족의 영토와 삶의 현장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 시가지는 1960~70년대 한국의 도회지 또는 시골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1950~60년대의 한글 간판들로 빼곡한 건물.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 잘 전달되지 않는 중국식 표기도 보였다. 그래도 중국 땅에서 한글간판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도 한글이 먼저 표기되거나 위에 표기된 간판이다. 조선족은 조선의 문화를 그대로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선 중국어 사용을 삼가고 결혼 또한 중국인이 아닌 조선족과 하도록 장려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독립운동 현장이 비교적 잘 보존된 것을 보더라도 이들 조선족의 노력에 우리 모두가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인구는 약 200만명으로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예전에는 북간도로 불렀다. 연변·도문·돈화·용정·훈춘 등의 5개시와 안도·와룡·왕청의 3개현을 관할하고 있으며, 조선족이 41%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족은 일제시대 일본과 중국, 그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의 틈바구니에서 자생적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남한과 북한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억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7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민족주의 타파’라는 이름 아래 또 한 번의 고난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집 구조만 봐도 조선족의 집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땅은 잃어버렸지만 사람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은 위기를 겪었다. 수만 명의 조선족이 한국으로 왔다. 불법 체류, 취업 사기, 처녀들의 결혼과 이민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조선족자치주 안에서 과반수이던 조선족도 40%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최근 조선족은 또 다른 위기를 겪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에 조선족 학자들을 동원하고 있다. 한국에서 조선족 동포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국 정부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간도영유권 주장은 이들에게 또 한 번 ‘목숨을 건 선택’을 강요하는 셈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지금까지 청산리항일전승지, 봉오동항일전승지, 일송정 등 유적지가 남아 있다. 북한은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독립운동의 맥이 사라졌고, 한국은 친일파가 정부의 핵심관료가 되면서 반민특위가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 땅 연변은 일제강점기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얼을 그대로 지켜오면서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 명동촌 윤동주생가 앞에서 기념촬영한 대장정 단원들


북간도 명동은 선각자들의 이상향이었다 
북간도 명동은 선각자들의 이상향이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은 선조들이 만주 등지를 떠돌기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북간도에 우리 이름인 ‘명동촌’을 형성, 독립운동의 본거지를 삼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명동촌은 용정에서 남서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1899년 12월 문병규(문익환 목사의 조부), 김약연, 김하규, 남위언 등 함경도 네 집안의 142명이 중국인 지주한테서 땅 600만 평을 구입한 뒤 집단 이주해 일군 마을이다. 윤하현(윤동주 시인의 조부) 일가는 1년 뒤인 1900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들은 김약연을 중심으로 ‘간민회’를 결성,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일궈나갔다. 이상설의 서전서숙을 시작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학교도 속속 설립됐다. 이들은 개간해 논밭을 만들면 제일 좋은 땅의 10분의 1을 떼어 ‘학전’으로 공동 관리했다고 한다.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서 말이다. 구한말 만주 북간도에 명동학교를 세웠던 선각자는 규암 김약연(1868~1942)이다. 함북 종성에서 두만강 건너 명동까지 약 28㎞로 꼭 하룻길이라고 하는데, 이동 경로상의 지명도 모두 한국식이라는 것이다. 당시 명동학교의 교육은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간도지방 독립투쟁의 밑거름이 됐을 뿐 아니라 문익환·윤동주의 정신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지금 우리가 명동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될 때이며, 그들의 정신을 계승해야할 이유가 바로 이곳에 숨 쉬고 있었다.

만주 독립운동의 요람인 명동촌(明東村)에서 명동교회와 윤동주 생가, 옛 명동학교 터를 만났고, 옛 대성중학(大成中學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사용)에서 조국과 한민족에 대한 새로운 정신과 의식을 만났다. 항일운동의 중추 거점인 명동촌에 세워진 근대식 학교인 명동학교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나운규 등 걸출한 인물들이 모두 명동학교 출신들이다. 명동학교를 졸업한 청년들 상당수는 이후 독립군사관학교로 들어가 정예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광복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북간도지역 민족운동의 모태인 셈이다.

꿈 많던 학창시절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을 애송했다. 윤동주의 시는 국민들의 정신적 마음의 고향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함경북도 회령에 고향을 두고 민족의 얼이 숨 쉬는 겨레의 옛 땅 용정시 명동촌으로 이주, 1917년 12월 30일 태어났다. 일찍이 명동소학교 4학년 때 한글 문예지 ‘새명동’을 등사지로 만들어 발행 했으며,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절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중퇴, 용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서울 연희전문(현 연세대)에서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종로구 누상동의 소설가 집에서 하숙을 하며 서시, 별헤는 밤, 자화상 등의 명시를 남겼다. 인왕산 자락 논가를 걸어 학교를 다니며 민족의 애환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를 당하기까지의 일생이 근대 한민족의 수난사를 교훈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우리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가곡 ‘선구자’의 ‘일송정 푸른 솔’을 만나기 위해 용정으로 떠났다. 용정의 곳곳에는 한민족 시련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용정은 19세기부터 경제·정치적인 이유로 이주한 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낯선 땅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끈질기게 삶의 터전을 닦아 용정을 북간도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용정이라는 지명이 당시 한인들이 정착한 ‘용두레촌’에서 기원했다고 하니, 용정의 역사를 찾는 발걸음이 특별한 느낌이다.

 

 

 

 

 

 

 

△ 우리 민족 애국혼의 상징이 된 일송정터


일송정(一松亭)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龍井)시에서 서남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비암산 정상에 우뚝 서 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용정시를 굽어보고 있다. 일송정에 올라보면 용정시 양쪽으로 대평원이 펼쳐지고 뒤쪽으로 한줄기 해란강<사진 위>이 굽이굽이 흐른다. 저 너른 땅이 소설 ‘토지’의 무대인 용정이며, 굽이굽이 저 곧은 강이 해란강인가.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 노래는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불러봤거나 들어보았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정서와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노랫말도 일제시대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군들이 연상될 정도로 장엄하고 여럿이 함께 노래를 부르다 보면 머리가 쭈뼛해지기도 한다. 또 민주화 시위나 노동운동 현장에서도 불려지며 ‘저항과 투사’의 이미지로 각인돼 왔다. 한국인들에게 선구자와 일송정은 동일한 이미지로 각인되며 만주벌판의 독립운동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미지만큼이나 아픈 상처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일송정이다.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의해, 해방 이후에는 중국에 의해 애물단지로 전락하며 고난의 여정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일송정의 소나무는 독야청청, 푸르름을 자랑하며 한민족의 정기를 담은 채 만주벌판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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