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에는 뱃놀이 하는 사람은 보여도 푸른 물은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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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에는 뱃놀이 하는 사람은 보여도 푸른 물은 흐르지 않는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1.10.0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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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 애환 서린 만주벌 1만5000리 대장정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5>

 

두만강 건너편 건물이 보이는 곳이 북한이며, 다리 전등부분이 국경선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
분단된 대한민국 땅의 북한 쪽 맨 끝의 땅 덩어리, 금단의 지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인정해준 조선족의 땅, 이곳의 통제된 왕래를 두만강은 그래도 허락하고 있었다. 오직 이곳을 통해서만 북한과 중국이 무역창구나 사람들의 왕래를 허용하고 있는 곳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고 하지만 두만강에는 푸른 물이 흐르지 않았다. 좁은 강폭이라서 그런지 흙빛의 물살위로 조중 국경다리인 ‘1941년 11월 준공’이라고 쓴 문패를 가슴에 안은 ‘도문대교’가 걸쳐 있었다. 이 다리를 통해 북한 쪽으로 많은 생필품이 넘어 간다고 한다.  연변지역의 동포들이 북한의 친척 방문을 갈 때면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 가지고 가야하며 보다 많은 것을 가져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곳 연변 동포들이 말하는 생활수준의 순서는 말할 것도 없이 단연 대한민국, 연변, 북한이라고들 말한다. 만주 땅이었던 곳에 사는 연변 사람들의 한 서린 말처럼 들린다.

 

 

△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 표지판


중국에서 두만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풍경 
연변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역인 도문에 있는 두만강이다. 이곳에서는 두만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중국 땅에서 바라보는 두만강의 폭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북한이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정말 조금만 건너가면 북한에 닿을 수 있는 곳, 북한 땅.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인 두만강에서 뱃놀이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순간 기분이 묘하다. 두만강 위에 노니는 뗏목 배를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같은 민족의 땅, 북한 쪽엔 가까이 갈수도 없다. 중국과 북한의 연결통로인 도문대교 중간지점에서 발을 멈췄다. 약 100여m에 이르는 도문대교의 중간에는 다소 바랜 글씨로 ‘변계선’이라는 중국어와 한글의 흰 글자가 페인트칠로 씌어 있다. 도문시와 북한의 남양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만강 위의 다리였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는 회색빛 다리로 얼어붙은 듯 바로 국경선이다. 이 선이 지도를 가르고 국적을 갈라놓은 것이다. 어느덧 한국인의 머릿속에도 두만강은 회색빛 다리 중간이 바로 국경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만강은 강물의 폭이 불과 30여m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한반도의 머리 위에 굵게 그어진 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모습이다. 하지만 더 이상 바래지길 바라지 않는 듯 중국은 ‘중조변경’ ‘국경’ ‘중조국경’ ‘중국도문구안’ ‘중조우의탑’이라는 현란한 표식물을 세워놓았다. ‘중국도문구안(口岸)’이란 표식은 장쩌민 전 중국 주석이 1991년 6월 8일 다녀가면서 친필로 쓴 기념물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중조국경선’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현장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위해 이 강을 넘어선 투사들도, 가난을 이기지 못해 간도로 넘어간 사람들도 강을 넘는다고 해서 결코 다른 나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만강 너머에 보이는 산도 우리의 땅이며, 그 밑으로 펼쳐지는 마을의 모습에도 분명히 우리의 이웃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곳이 국경선이 아님을 말해주지 않았다. 국경선 아래에서도 강물은 흘렀다. 결코 묻을 수 없는 과거의 역사와 이를 슬쩍 묻어버린 현재의 땅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다.

 

 

 

 

 

 

 

 

△ 봉오동 골짜기가 지금은 저수지로 변했다.


봉오동전투, 승리의 함성이 잠든 봉오저수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1920년 6월7일 일본군과 최초의 정규전을 벌여 150여명을 사살한 봉오동전투 현장은 도문에서 북쪽으로 약 1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지금의 봉오동은 지난 1993년 계곡 입구에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잡초만 무성했다. 봉오동전투 전적지에는 한 그루 소나무 옆에 기념비만 외로이 서 있다.

 

 

 

 

 

△ 봉오동 전적지를 찾은 대장정 대원들



3·1운동 이후 일본군은 만주지역으로 출병해 독립군부대를 토벌하려고 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의 일본 헌병수비대를 공격하자 일본 남양수비대 소속의 1개 중대 병력이 화룡현에 있는 삼둔자에 출병했다. 대한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과 사령부장 홍범도는 매복 작전으로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 도착한 일본군에게 총격을 가했다. 독립군이 매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한 봉오동전투는 ‘독립전쟁’으로 불리면서 무장투쟁의 시작을 알리게 됐다. 봉오동전투는 우리의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뒀으니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으며, 심지어 중국신문에서도 봉오동전투의 결과가 크게 보도됐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봉오동전투는 시작일 뿐 4개월 뒤 청산리 대첩이 이들을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의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활발히 하고 세력을 증강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항일무장독립운동의 거목이었던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은 전설적인 봉오동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역임에도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인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평양에서 출생한 장군은 오동진, 계연수 장군 등과 함께 배달민족의 역사서인 ‘한단고기’를 편찬하기도 했다. 1919년 51세에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한 최초의 승전인 봉오동대첩을 달성하고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했다. 이후 러시아로부터 조선독립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동포를 위한 협동농장을 주도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해 그곳 크즐오르다 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비운의 나날을 보내다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홍범도 장군의 시신이 아직도 카자흐스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비운이다.

또한 봉오동전투가 있었던 옛 봉오동골짜기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봉오저수지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 깊은 저수지의 물 아래, 우리의 땅은 아니지만 우리민족의 승리의 기쁨과 함성까지도 이곳 저수지에 묻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봉오저수지에서 50여m 내려가면 봉오동반일전적지를 알리는 비석만이 이곳이 독립전쟁의 역사적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비석에는 봉오동 전투의 기록에 대해서 쓰여 있는데, 이런 비석이나 표지판의 문구마저도 훼손하거나 글자나 획을 빼거나 부수는 등 역사왜곡의 실상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마음이 아려왔다.

 

 

 

△ 윗줄에는‘자’라는 글자가 빠졌고, 아래에는 ‘자’가 ‘지’로 표기됐다.

 

 

 

△ ○부분 글자 ‘령’자를 훼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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