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護國)의 별 조헌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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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護國)의 별 조헌 선생
  • 김주호 <한국스카우트 충남연맹 이사>
  • 승인 2020.06.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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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하면 임진왜란(1592년)때 금산전투에서 승장(僧將) 영규대사와 함께 왜군(대장, 고바야가와)과 싸우다 700여명의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봉 선생이 대학자로 국가 사회에 큰 공헌을 하신 문무를 겸비한 충신열사란 점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10살에 모친을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도 주경야독의 표본으로 학문에 정진해 24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옥천, 보은 현감 등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주로 홍문관, 성균관, 교서관 등 학문연구와 관련이 깊은 부서에서 벼슬살이 하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가면서 궁중 의례행사의 비용을 줄이고 허례허식을 폐하자고 상소를 올렸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된 후 중봉이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토정 이지함을 만나 의기투합했다. 이율곡, 성우계의 문인이기도 한 중봉은 특히 토정의 사상과 식견에 매료돼 항상 토정과 그 궤를 같이했다. 즉 농업이 근본임을 부인할 수 없으나 바다에는 소금을 비롯한 무궁무진한 보화가 담겨 있으니 수산업, 상공업도 발전시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한다고 강력히 주창했다.

이 중봉의 개혁론은 후기 실학자의 거목인 초정 박제가 선생이 저서 ‘북학의’에서 “나는 어릴적부터 중봉의 사람됨을 사모해 비록 뒷 시대에 살고 있지만 중봉의 마차를 끄는 마부가 되어 그 분을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피력할 정도였으니 조선 후기 시대정신을 강조했던 초정이 자신보다 200년을 앞서 살았던 중봉을 높이 평가할 정도로 중봉의 선구자적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명나라 만력제의 탄신축하 성절사를 수행(질정관으로 참여)하고 돌아와 쓴 동환봉사(東還封事)에서 보듯이 남의 나라 제도와 풍습이라도 우리 보다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각종 행사의 비용절감, 유능한 서얼등용, 허례허식을 철폐하고 상공업, 수산업을 발전시켜야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꾸준히 제기했다.

중봉의 사상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할 점은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문무를 겸비한 100만의 정예병을 양성해야 한다는 소위 100만 양병론이다. 율곡의 10만 양병론보다 진 일보한 백만 양병론을 주창한 것은 숭문경무(崇文輕武)의 풍조가 당연시 되던 시대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탁월한 발상이었다. 여기서 전체 인구 1000만명 남짓한 조선에서 100만 양병이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율곡의 10만은 정규군이고 중봉의 100만은 병농(兵農) 일치에 기반한 예비군(지금의 향토예비군과 같은 맥락)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농한기에 훈련을 시켜 강군을 만들자는 것이다.

즉 문약(文弱)한 송나라가 멸망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숭문숭무(崇文崇武)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율곡의 10만 양병론이나 중봉의 100만 양병론이 채택 실현됐다면 왜란, 호란, 근세의 6·25같은 미증유의 국난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벼슬에서 물러나 옥천에 후율정사(後栗亭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중 임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나라가 없으면 백성도 없다면서 의병단을 조직해 청주성을 수복하고 북상하는 왜적을 금산에서 막다가 순절했으니 당시 조선으로서는 큰 별을 잃은 셈이었다. 바른말을 자주해 선조와 불편한 관계였으나 그 공을 누를 수 없어 문열공(文烈公)의 시호를 내리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 영조때 영의정에 추증된후 문묘에 배향됐으니 가히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예부터 일러오기를 “살아있는 3정승이 죽은 대제학 1명만 못하고 살아있는 대제학 3명이 문묘에 배향(동방 18현)된 한 분만 못하다”고 할 정도로 배향된 개인은 물론 그 가문 전체(배천 조씨)가 더 없는 영광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실제로 종묘에 배향된 역대 왕과 왕비들보다 문묘에 배향된 충절들을 백성들이 더 존경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난이 발생하자 제 한 몸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공과 같은 순절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무공을 세운 사람 중에서 문묘에 배향된 분은 중봉 선생이 유일하다. 문묘뿐만 아니라 공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종용사(금산), 성곡서원(금산), 표충사(옥천), 문회서원(배천), 상현서원(보은), 우저서원(김포)등에 배향됐다. 특히 우저서원은 중봉 한 분만 배향하고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다.

임란 때 경상도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면 장군은 화살 한 번 쏘아보지 않은 진골 선비였으나 나라가 위급하니 불부터 끄고 다시 공부하자며 만석 재산을 털어 군량미를 조달하고 용전분투하다가 임란 다음해 과로로 득병하여 군중 막사에서 임종할 때 '지지유국 불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 다만 나라가 있는 줄만 알았지 내 한 몸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이라는 피 맺힌 유언을 남기고 순국 한바 있는데 이 분 역시 중봉 선생과 맥을 같이 하는 분이다.

세간에 ‘요새 군대도 그게 군대냐! 그놈들 전쟁나면 다 도망갈 놈들’이라는 과장된 혹평이 회자되고 있는데 왜 그런 말이 시중에 떠도는지 위정자들부터 깊이 반성해야한다. 그런 약군을 만든 원죄가 있는 사람들이 위정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안보가 불안하고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작금의 형편에 공과 같은 살신성인의 충의지사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맞는 호국보훈의 달에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싶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고 나라가 없으면 백성도 없다’는 중봉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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