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장군은 기독교와는 무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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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장군은 기독교와는 무관할까?
  • 고성은 <광리교회 담임목사·목원대 강사>
  • 승인 2020.09.0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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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 100주년 특집 -1

올해는 홍주군 고남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1889년 부친 김형규와 모친 이중규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100주년이자 서거 9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뜻 깊은 해이다. 청산리대첩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민족적인 항일영웅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다. 1920년 10월에 일어난 청산리대첩은 1919년 평화적인 3·1독립운동이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 절망이 깃들어 있던 우리 민족에게 민족적 의기를 온 천하에 드높인 위대한 ‘승리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민족적 기상을 드높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은 종교적으로는 전통 종교인 유교인에서 민족종교인 대종교인으로 개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어떤 기록이나 구전이든 간에 상동교회로 상징화 할 수 있는 신민회와의 연관성 이외에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생애 속 활동은 기독교와는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 이 글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기독교인이었을 가설을 설정한 가운데, 그 단초들을 홍성에서 그가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을 위해 전개한 애국계몽활동을 중심으로 제시해 보려고 한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김좌진은 일찍이 청소년시절을 통해 개화의 길을 걸었다. 이를 통해 이미 홍성에서부터 계몽활동과 교육활동 등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을 향한 행보를 시작했다. 

이처럼 민족적 행보를 가능케 한 개화의 길로 나서는 데 있어서 절대적 영향을 미친 선구적 인물은 김석범이었다. 기독교의 상징적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는 고향으로 귀환할 때 이미 단발까지 시행했던 개화적 인물이었다. 추측컨대 김좌진의 단발에는 김석범이 롤모델이었다고 사료된다. 

이런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는 김좌진의 스승들로 거명되고 있는 김광호, 김동익, 지산 김복한 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끼친 신학문의 스승이자 개화의 선배이며 의기투합한 동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성우 교수가 저술한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김좌진(2011)’에 보면 김좌진의 단발 시행을 서울 상경 이후로 추정하고 있지만 미당 서정주가 저술한 ‘김좌진장군전(1948)’에 보면 그의 단발은 고향 땅 홍성에 기거하던 시절에 단행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전기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김좌진의 모친인 이중규, 미망인이었던 오숙근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증언이 여실히 녹아 있는 작품이기에 일정한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그의 단발 시행이 개화를 알리는 서막이었다면 노비해방은 그의 개화를 꽃피운 절정이었다. 노비제도 폐지는 갑오개혁을 통해 법제화 됐지만 조선 사회의 현실은 제도와 법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한 마디로 허울 좋은 법과 제도였다.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서 여전히 노비들이 존립하고 있었다. 

이처럼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엄연한 조선 사회 현실에서 처음으로 노비를 해방시킨 선구자는 감리교인이었던 윤치호였다. 1895년 오랜 망명 끝에 귀국한 그는 자기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켰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이를 통해 노비해방이라는 조선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선도한 것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무렵 김좌진 역시 ‘이제 너희들은 우리 집 종이 아니다. 모두 자유롭게 나가 살아라’고 말하며 노비문서를 불태운 ‘해방사건’이 발생했다. 1930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에서는 그의 집에서 부리던 계집 종 한 명이 천주교에 입교한 가운데 그녀와 함께 천주교도 50여명이 김좌진의 집을 찾아와 종을 해방해 달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평소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던 그가 다음날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노비해방을 실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소재한 그의 묘비에는 그가 평소 깨달았던 바에 대해 ‘인간 평등’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선한 일깨움을 선사해 준 결정적 계기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미당 서정주가 저술한 ‘김좌진 장군전’에 보면 그의 형인 김경진이 살아있을 때 서울에 올라가 정동에 자리한 배재학당을 구경하면서 형과의 대화를 통해 상하차별이 없는 교육을 인지하게 된 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일깨움을 얻으며 노비해방에 나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상정하고 있다. 승려이자 시인이며 작가인 조영암이 저술한 ‘순국선열전서(1965)’에 의하면, 김석범이 김좌진에게 들려준 ‘배재학당은 양반도 상놈도 다 통학한다’라는 교훈에 충격을 받은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며 노비해방에 나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민족 독립운동사 연구를 개척한 윤병석 교수가 저술한 ‘위대한 한국인-백야 김좌진(1972)’에도, 김좌진의 사랑방에서 갈뫼의 한약방 주인이었던 김석범이 김좌진에게 들려준 ‘배재학당엔 양반도 상놈도 가림 없이 다 통학하지. 상놈이 공부를 더 잘하기도 한다네’라는 교훈이 김좌진이 노비해방을 생각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각각의 맥락 속에서 그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일깨움을 선사해 준 공통적인 매개체는 배재학당이었다. 이 같은 그에 관한 전기들의 진술들을 종합해보면 그의 노비해방은 기독교의 교육선교사업이 가져다 준 혁명적인 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개화의 길은 변혁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행동으로도 표출되고 있다. 1930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에서는 그가 심심하면 성황당이나 산신 묘를 파괴하는 행위까지 자행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돌출 행동에 대해 이 신문에서는 개인적 일탈 행위로 치부하고 있지만 이는 미신적인 신앙을 배격한 신앙적 행동이 아니었을까 사료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개화의 길은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을 교수하는 학교가 아니라 신학문을 교수하는 학교 설립에도 기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홍주군 갈산면 상촌리 325번지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호명이란 명칭은 ‘호서지역을 밝힌다’는 원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김좌진 평전(2010)’, ‘만주벌 호랑이 김좌진 장군(2010)’, ‘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2016)’ 등 대동소이한 내용이지만 김좌진에 대한 연구서들을 연달아 간행하며 일약 백야 김좌진 장군에 대한 연구자로 떠오른 박환 교수는 김좌진의 호명학교 설립에 대해 99칸 혹은 80칸이 되는 상촌리 325번지 그의 가옥과 토지를 제공해 설립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김좌진이 호명학교에서 맡은 직책에 대해서는 교장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김좌진 장군 장례식에서 낭독된 ‘고김좌진선생약력’과는 달리 1930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를’ 인용해 학감을 역임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박환 교수는 호명학교의 설립에 대해 김좌진이 단독으로 설립했다기보다는 안동김씨 문중이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성은 <광리교회 담임목사·목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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