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장군은 기독교와는 무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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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장군은 기독교와는 무관할까?
  • 고성은 <광리교회 담임목사·목원대 강사>
  • 승인 2020.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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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 100주년 특집 -3

이런 영적 광풍이 부는 가운데 1909년 3월 9일 갈산에도 구세군지영이 개전됐다. 이러한 갈산지영의 개전과 관련해 1909년 8월 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충남 홍주군 갈산 안동김씨 종중에서 구세군지영을 설립하고 동포를 열심 권면하는 중 판서 김병익은 연금 팔십에 해영을 찬조함으로 현금 해영에 입참한 자가 이백여명에 달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갈산 구세군 영문은 갈산지역에서 오랜 세월 정착한 가운데 갈산김씨 혹은 갈뫼김씨로 호칭되고 있는 신(新)안동김씨 문중에서 설립했고 급속하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교회를 특정 개인이 아닌 문중에서 설립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7월호 ‘구세신문’에 의하면, 갈산지영의 평신도 지도자 김세균을 언급하고 있는바 안동김씨일 개연성이 크다.
 
이 같은 김씨 문중의 구세군 입참은 신앙적 결단이라기보다는 구국적 결단으로 사료된다. 이 때 이 지역에서 구세군들이 이백여명에 달했다는 것을 실증해 주는 자료도 있다.  1909년 9월 21일 지방헌병대에서 조선통감부에 보고한 고비 발 제249호의 ‘구세군의 지방활동 보고의 건’에 의하면 “구세군은 본월 16일 홍주군 고남면에서 연합회를 개최하고 내회자 197명 경성본영으로부터는 허가두와 밀돈(Milton. Ensign) 두 사람이 임석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김준철 사관이 편저한 ‘허가두 생애와 사역(2007)’에 보면,  허가두 정령 역시 홍주 갈산에서의 집회에 대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구세군 초기 충청남도 선교사업에서 급부상한 갈산지영은 한국구세군 역사 서술의 대부격인 장형일 사관이 저술한 ‘한국 구세군사(1975)’나 김준철 사관이 저술한 ‘한국 구세군 백년사(2008)’에 의하면, 1909년 11월 11일 충청지방을 개설하면서 중앙영문으로 자리매김했고, 지방관에는 후커(Hooker, Jacob)정위가 부임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구세군의 초기 충청남도 선교에 있어서 주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 갈산영문이 1909년 3월 9일 개전한 장소는 갈산면 상촌리 327번지였다. 일제가 한일병탄 직후에 시행한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처음 사정했던 1913년 7월 31일에 이 번지의 소유자는 김영호(金永滈)였다. 당시 갈산면 상촌리 325번지 소유자가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金東鎭)으로 돼 있는 것과 비견할 만하다. 

만일 이 번지의 소유자인 김영호가 김석범의 자제로 언급되고 있는 김영호와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김동진과는 호명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양반자제 학생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가 김석범의 자제일 개연성은 매우 농후하지만 일단 심각한 역사적 오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전옥진이 저술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2001)’에 보면 김석범의 장남 이름이 영호(榮浩)라고 기록하고 있기에 명확한 확인 작업은 필요하다. 

어쨌든 김영호의 부친이 김석범이라고 한다면 그도 구세군에 입참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며 김좌진 역시 김씨 문중의 일원으로서 구세군에 입참했을 개연성만큼은 분명히 제기할 수 있다. 더욱이 이성우 교수가 저술한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김좌진’에서 보듯 1909년 상반기에 김좌진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홍성에 오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2016년도 홍주정신 함양 기획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민황기, 손세제의 ‘백야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운동’이라는 학술논문에서 보듯 김좌진은 1909년 4월 이후 기호흥학회홍주지회 참여를 통해 1909년 상반기에는 서울 상경이 불가능한 가운데 홍성에 머문 것으로 파악한 연구 결과도 있다. 

이처럼 그가 이 시기에 홍성에 머물렀다면 김좌진 역시 김씨 문중의 일원으로서 구세군에 참여했을 개연성만큼은 제기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시기 서울에서의 행적 속에서도 기독교와 연관되는 행적을 지니고 있다. 비록 기독교단체는 아니었지만 기독교인이 주도해 1907년 4월 창립된 신민회의 인사들인 윤치성, 노백린, 유동열, 이갑 등과 교류했던 행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김좌진이 신민회 회원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단편적이나마 신민회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에 참여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김종해가 저술한 ‘주해 백야실사(2016)’에 보면 이를 근거로 신민회에 참여한 것으로 추증하고 있기도 하다. 이로 미뤄 볼 때 김좌진이 구세군에 입참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마치 암시라도 하듯 백야공원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구세군의 내부 인사법인 검지 손가락이 위를 향해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동상은 백야공원에 자리한 김좌진의 생애를 시기별로 기념할만한 사건을 형상화해 제작한 다섯 개 동상중 하나인데, 더군다나 ‘일깨움’이라는 표제 속에 호명학교를 설립하던 시기의 김좌진의 면모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우연치고는 무척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는 요사이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및 백야기념관을 방문했던 예산 대흥영문 장재흥 사관이 페이스북에 올린 단상을 태안 삭선영문 임재봉 사관을 통해 필자가 인지한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백야 김좌진 장군의 홍성에서의 애국계몽활동은 결코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가설이 초석이 돼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활동 전반에 걸쳐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추적하는 연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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